85화 85화
85.
-뚜루루루
철우의 전화다.
퇴근하면서 들러서 같이 집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조금 불안 했다.
지금 철우의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한 것 같아서였다.
물론...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말도 안 될 정도로 내 상태도 좋지 않지만...
아무튼 간에 지금 철우는 곤란에 처해 있는 건 사실이었다.
비록... 자기가 만든 상황이기는 하지만...
-어
-도착했다. 너희 집 앞이다. 올라갈까?
-아니 올라오지 않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내가 내려갈게.
-알았다.
난 전화를 끊고 바로 내려갔다.
집이 이 모양이라 자기 전까지는 옷을 갈아입을 생각이 없었고,
모텔에서 씻고 온 터라 별로 준비할 것이 없었다.
“어. 왔어? 빨리 왔네.”
난 그의 차를 타면서 말했다.
“응. 너 먼저 보려고 왔지. 하고 싶은 말도 있어서...”
“아놔... 너 불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요즘 내가 좀 그렇다. 내가 생각해도 아슬아슬하다.”
“보는 내가 이 정도이니 넌 어떻겠냐 만은 전부 니가 뿌린 씨잖아. 누굴 원망하겠어.”
“야!.... 휴... 그렇기는 하지만...”
“아무튼 내가 도와줄 거 있으면 언제든 뭐든 말해라. 하긴 내가 그럴 입장이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다른 건 아니고, 오늘 우리 집에 갈 건데...”
“응. 말해.”
“일단 이실직고할 게 몇 개 있다. 그런데 우리가 입을 맞춰야 할 것 같아서 미리 왔지.”
“몇 개나? 아이 씨~ 너희 집에 안 가고 싶어졌다. 진짜 안 가고 싶다.”
“휴... 좀 봐주라. 저번에 너랑 이야기하고 나서 마누라랑 이야기했거든.”
“응? 아~ 그때? 이튿날 바로 대화했다는 거야?”
“응. 바로 했지.”
“뭐라고? 하도 니가 지은 죄가 많아서 어디까지 밝혔을지 궁금하네.”
“그냥... 밝혀도 문제없을 만큼만?”
“뭐야. 그럼 솔직하게 말한 건 없겠네.”
“아니야. 나의 여자 부분만 빼고는 다 말했어.”
“알았어. 일단 말해 봐. 내가 끼어들지 않을 테니.”
“응. 일단 니가 아내와 헤어졌다고 했어. 차마 아내가 도망갔다고는 못하겠더라. 그래서 그냥 남자가 생긴 것 같다고만 했어.”
“휴... 더 비참하게 만들었군...”
“미안... 그리고 또 앞으로 내가 당신과 성행위는 힘들 것 같다고 했지.”
“응? 노력해 보겠다고가 아니라 앞으로 못 하겠다고 했다고?”
“응... 솔직히 끝이 없고 가능성이 희박한 기대를 주기가 그래서... 너도 그랬잖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좋다고...”
“야! 그 방향으로 솔직하라는 건 아니었잖아. 내가 완전 이상한 말을 하라고 가르친 거냐?”
“아... 또 미안...”
“너 진짜 나한테 미안한 건 맞고?”
“헤헤...”
“휴... 그래서?”
“그랬더니 마누라도 큰 기대 안 했다고 하더라. 감을 잡고 있었다는 내 말이 맞는 거 같았어. 이혼은 안 한다고 딱 잘라서 말하더라고. 누구 좋으라고 해주냐고 하면서...”
“하... 니가 한 여자를 완전 바보로 만들었구나...”
“나도 이혼은 싫다고 했어. 마누라가 헤어져달라고 한다면 그래야겠지만, 그게 아닌데 내가 이혼해 달라고 하는 건 너무 심해 보이잖아.”
“아하~ 지금 니가 하는 행동은 안 심해 보이고?”
“휴... 미안~ 또 미안 하네.”
“제수씨에게 미안해 해야지. 왜 나한테 미안하다는 소리가 나와?”
“하... 아무튼, 그렇게 이야기 했어. 그러곤 당신도 당신 삶을 이제 즐기라고 했어. 돈은 이제 우리가 충분히 벌고, 또 앞으로도 그 정도는 벌 테니 이제는 우리 삶을 즐기면서 살자고...”
“으응~ 니가 몹시 나쁜 짓을 하려고 마음을 먹었구나? 그게 네가 즐기려고 제수씨에게 인심 쓰는 척한거지. 아니야?”
“그건 아니야.”
“뭘 아니야!”
“진짜 아니야. 그 말을 하기 전까지 나도 많은 생각을 했었어. 그런 거 있잖아. 남자가 자기는 바람을 피워도 마누라가 피는 건 못 보는 거. 그런데 진짜 고민해서 마누라도 그렇게 사는 것에 대해서 이해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말한 거야.”
“음... 한 대 때려도 되나?”
“응. 안 돼. 넌 영원히 내 편이야.”
“니 편하는 거 한 대 때리고 그만하면 안 될까?”
“응. 안 돼.”
“야! 농담 그만하고... 정말 너 잘못된 거야. 너 정말 잘못하는 거라고.”
“알아. 그런 건... 예전부터 그런 건 알고 있었어. 다만, 이제는 내 본능에 충실하고 싶다는 거지.”
“너 그래 놓고 나중에 몸 아프면 제수씨에게 의지할 거지? 밖으로 겁나게 돌면서 할 짓 다 해 놓고 아프면 마누라 찾을 거잖아?”
“아... 아니야. 정말 서로 이제 자유롭게 살기로 결심을 하고 말을 꺼낸 거야. 정말로 나중에 아프면 난 간병인 쓸 거야. 마누라에게 의지 안 해. 마누라도 즐겁게 사는데 내가 방해하면 안 되지.”
“휴... 지금은 그렇겠지... 너 그런데 돈은 없어지지는 않을 것 같고... 음... 만약 너 발기를 안 한다고 쳐. 그럼 니가 만나는 여자들은 널 받아줄 것 같아? 물론 네 돈 보고 만나려고는 하겠지. 그런데 그게 맞아? 맞는 거야?”
“내가 내 말을 뱉을 때는 그만한 뒷감당은 하겠다는 결심이 섰기에 한 말이지. 그냥 뱉었겠어?”
“휴... 내가 말을 말자. 물론 니가 뱉은 말은 반드시 한다는 것도 알아. 그리고 너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도 난 직접 봐서 알고 있고... 그래도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응. 나도 그렇기는 한데... 지금은 이 생각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어. 솔직히 만나고 있는 여자들을 더 이상 만나지 않더라도 내 생각은 변하지 않을 것 같아.”
“여자들? 여자가 아니라, 여자들?”
“아! 응...”
“미친... 정말 미친놈...”
“미안~”
“아무튼 난 모르겠으니 알아서 해라. 네가 모르는 것이 있다면 내가 알려 줘야겠지만,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 네가 그렇게 결정했다면 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이해하지?”
“아니. 절대 이해 못해... 어떻게 이해를 하냐? 특히 내가... 아내에게 바람맞은 내가 말이야.”
“아... 미안... 또 미안 하네...”
“아무튼 알았다. 네가 결정한 거니, 난 그냥 받아들일께. 그리고 나에게 이 이상의 것은 바라지 말고.”
“그 정도면 충분해. 솔직히 이렇게 미친 생각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친구가 어디 있냐?”
“친구? 친구 누구? 너 친구도 있어?”
“아놔. 미친... 진짜.”
“아무튼 무슨 일이 생기면 난 무조건 제수씨 편이다.”
“알았다.”
“물론 니가 생명이 위험하거나 삶이 피폐해지는 상황이 되면 당연히 널 살리려고 애쓰겠지만, 그전까지는 무조건 제수씨 편이니 그렇게 알아.”
“그 말이면 충분하다. 그 어떤 말보다 힘이 된다.”
“그리고 내가 더 알아야 할 건?”
“음... 없어. 그 정도?”
“알았다. 그럼 이제 출발하자.”
“아니. 난 지금 회사 들어 가 봐야 해.”
“응? 그럼 입 맞추자고 나온 거였어?”
“응. 오늘 조금 바쁜 일이 갑자기 있을 수도 있어서 혹시나 널 만나지 못하고 집에서 바로 볼까 봐. 시간 있을 때 잠시 들렀어.”
“아아.. 알았다. 그럼 난 어떻게 할까?”
“시간 되면 바로 집으로 와. 집은 알지?”
“응. 그래도 문자 넣어놔줘.”
“알았다. 난 간다.”
“조심히 가고. 돈 열심히 벌어. 제수씨에게 니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으니.”
“큭큭큭 알았다. 그건 자신 있다. 지금도 돈 벌로 간다.”
그 녀석은 출발하고, 난 일단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난 다시 소파에 앉아 남은 진을 삼키며 친구가 자신의 아내에게 한 말을 떠올렸다.
‘너에게 흥미를 잃었다. 난 자유롭게 살 테니 너도 이제 자유롭게 살아라.’
철우의 이야기는 이것일 것이다.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을 해도 결국 그거다.
나쁜 놈...
나쁜 놈이다.
지금 제수씨의 마음이 나보다 더 절망적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감정이 이제 더는 없어져,
서로가 서로에게 양심의 가책을 가질만한 행동이 없는 상태에서,
서로가 이혼은 그러니 이제 그렇게 살면 어떻겠냐고 상의를 한 것이면 다를 수 있다.
또는 서로 이제는 정에 가까운 사랑을 하는 감정이라서, 성적인 흥분은 더 이상 없다고 서로 생각해서 서로 성적으로 자유롭게 살자고 한 것이라면 그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건 일방적으로 철우가 제수씨에게 나쁜 짓을 한 것이다.
제수씨는 그러한 감정도 아닌데, 그러한 감정을 가지길 강요한 것이다.
정말 나쁜 놈이다...
내 아내를 생각하니 더 나쁜 놈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래도 남은 남인 것 같다.
제수씨가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철우보다는 가까울 수 없다.
내가 지금 아무리 욕해도 철우가 정말 위험한 상황이 온다면 난 철우 편을 들 것이다.
아내에게 그런 짓을 당해서 그렇게 힘들어했던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내 자신도 참 가증스럽지만,
어쩔 수가 없다고 변명을 해 본다.
어쩔 수가 없다고...
그래?
그럼 내 아내도 어쩔 수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건가?
휴... 그건 아니다.
......
그래... 나도 역시 미친놈이다... 철우 만큼이나...
이 정도에서 철우의 생각을 접기로 했다.
생각의 처음이 이 정도인데, 그 끝이 결코 좋게 끝날 리가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더 이상의 철우 생각은 나를 더 비참하고 어둡게 만들 것 같았다.
난 핸드폰을 켜고 내가 가고 싶었던 곳을 검색해 보기로 하였다.
지금 내가 가고 싶은 곳은 너무나 추상적이었다.
그냥 생각을 실컷하고 싶은 곳...
그리고 생각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 구체화할 필요가 있었다.
핸드폰에 여행이라는 것을 검색하다 보니,
내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인생을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다녀온 곳을 착실히도 기록하였고,
심지어는 그걸로 먹고 사는 사람도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순간 부럽기도 했다가 이내 생각을 접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생계와 직결되는 순간, 그건 더 이상 좋아할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노래를 아주 잘하는 사람이 방송에 나온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의 노래 실력에 다들 놀랐고, 심지어는 가수들이 왜 아직 가수로 데뷔하지 않았는지를 묻기도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말에 난 너무도 공감했다.
그 사람은 가수가 되는 순간, 더 이상 음악을 즐길 수 없을 것 같아서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래... 아무리 좋아해도 그것의 중심에 서는 순간, 그건 더 이상 좋아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게 된다.
그 사람은 진심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풉...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난 여행을 직업으로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여행을 직접으로 해도 되는 것에 웃음이 났기보다는,
그걸 직업으로 해도 취미처럼 할 수 있게 만들어줄 여인들이 있다는 것에 웃음이 났다.
여자 등쳐 먹는 놈...
그런데 그녀들은 한탕하고도 자신들의 옆에 있어 주길 바란다.
복에 겨운 미친놈...
그렇게 핸드폰을 보던 중 갑자기 종주가 눈에 들어왔다.
종주? 오오~
눈에 확 꽂혔다.
내가 원하는 것들이 모두 있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걸으면서 오랫동안 생각한다.
그리고 피곤하면 잔다.
그 무엇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아마 걷기 시작하면 내 생각에 집중될 것이 분명했다.
예전에 행군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군에 있을 때, 취미가 구보, 특기가 행군이라고 했다.
난 나만의 행군 노하우가 있었다.
그 노하우로 아무리 긴 거리라도 어렵지 않게 걸었다.
뭐 특별한 건 아니다. 그 비결은 행군하면서 다른 생각하면서 걷는 것이다.
난 어릴 때 만난 첫사랑부터 군에 오기 전 놀았던 술집의 여자까지 생각했다.
그 여자와 어떻게 만나서 어떻게 놀았고, 어떻게 섹스를 했는지....
그러한 생각하다 보면 그 시간이 정말 금방 간다.
그건 사뭇 나만의 생각은 아닌 것 같다.
산티아고의 순례자의 길을 수많은 사람이 찾는 이유도 거의 그런 이유가 아닌가 생각한다.
육체적인 힘듦 속에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
그 자체가 가능한 유일한 이유가 바로 걷기 때문일 것이다.
난 무릎을 탁 쳤다.
이거다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