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화 암캐를 만드는 이유
투기장에 대해 알고 있는가?
대부분 콜로세움 같은 경기장 안에서 서로 목숨 걸고 싸우는 용맹한 검투 노예들과 그 결투를 보고 열광하는 관중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하지만 일 대 일 결투는 투기장에서 진행되는 수많은 경기 방식 중 일부에 불과하다.
다 대 다로 싸우는 단체 결투, 경기장에 물을 채우고 배 위에서 싸우는 모의 해전, 사나운 맹수와 마수들을 잡는 사냥 등 현대인들이 보더라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 규모의 검투 경기들이 진행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런 검투 경기들은 규모만큼이나 경기 비용도 어마어마하다.
경기 비용뿐만 아니라 애초에 수많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고 각종 설비를 갖춘 투기장을 짓는 비용만 생각해 봐도 거대한 국가가 아니면 시도조차 하기 힘든 사업이다.
그러면 국가는 왜 큰돈을 써가며 투기장을 운영할까?
가장 큰 이유는 국민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못하게 하고 쌓인 불만들을 해소해 주기 위해서이다.
원래 정치인들이 의장봉 두고 싸우는 것보다는 검투 노예들이 목숨 걸고 싸우는 게 재미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남학생들이 대부분 축구를 좋아해도 체육 시간에 축구 안 하고 수다 떠는 남학생들도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피가 튀기고 팔다리가 날아다니는 검투 경기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투기장은 검투 경기뿐만 아니라 다양한 볼거리들도 준비해야 했다.
그중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여자 노예들의 야릇하고 자극적인 공연들이다.
축구 싫어하는 남학생은 있어도 야동 싫어하는 남학생은 없는 법
검투 경기 보고 잔인하다고 비난하던 사람들도 여자 노예가 우람한 거근들을 여러 가지 입들로 물고 빠는 공연 앞에선 입 다물고 자기 손을 아랫도리에서 움직이기 바빴다.
이런 정보를 어떻게 아냐고?
역사 전공이냐고?
아...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지금은 관광명소 따위가 되어버린 지구에 있었던 투기장의 과거가 아니다.
이세계에 지금 이 시간에도 남자들의 피와 살이 튀기고 여자들이 신음 섞인 야릇한 비명을 지르는 사둠 제국 투기장의 현재이다.
여러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트럭에 치여 가게 되는 흔히 이세카이라 불리는 그 이세계가 맞다.
물론 나는 그냥 자고 일어났더니 뜬금없이 이 지옥 같은 곳으로 떨어졌지만...
심지어 어디 책이나 게임에서 알고 있던 세계가 아닌 생판 모르는 세계에 떨어졌는데, 어떤 씨발놈이 나를 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애니나 소설 속에 넘쳐나는 치트급 사기 스킬은커녕 그 흔한 상태창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뭐 마지막 양심인지 말이라도 통하라고 이세계에 있는 모든 언어에 관한 지식을 주긴 했는데...
말이 통하면 뭐 하나, 힘이 없는데.
안타깝게도 이곳에는 토플이나 토익시험 같은 것은 없었고, 그런 형식적인 시험을 볼 만큼 평화로운 세계도 아니었다.
결국 무능력한 나는 이세계에 떨어진 지 하루도 되지 않아 노예 사냥꾼들에게 붙잡혔다.
그리고 이 무식한 놈들은 내가 모든 언어를 할 줄 아는 귀한 인재라고 아무리 어필해도 그냥 제도 투기장에 검투 노예로 팔아버렸다.
그 뒤로는 정말 지옥과 같은 삶의 연속이었다.
들어가자마자 교관들에게 개처럼 맞으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힌 채 교육받고, 교육이 끝난 뒤에는 며칠마다 목숨을 걸고 검투 경기를 치렀다.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고 와도 나에게 기다리는 건 다음 경기를 위한 힘든 훈련과 지구에서라면 상상조차 못 할 열악한 생활 환경
이런 절망적인 나날들을 보내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다면 사람은 생각보다 자기 삶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현실이 지옥이었지만 죽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어떻게든 살고 싶었다.
교관들에게 무릎이 닳을 정도로 빌면서 각종 마법과 검술을 배우고.
관객들에게 어떤 퍼포먼스를 보여줘야 인기를 얻을 수 있을지 밤새 고민하고.
악착같이 모은 후원금으로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면서 경기 정보를 알아내는 등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이란 노력은 다했다.
그렇게 마르고 흰 몸뚱어리가 근육질에 구릿빛 몸으로 변하고 새겨진 흉터만큼 인기가 충분히 쌓일 때쯤 드디어 나의 노력이 가장 고귀하신 그분께 인정받을 수 있었다.
가장 고귀하신 그분이 누구냐고?
제국 아니 이세계에서 가장 고귀하신 분이 우리 위대하신 루키우스 대제 폐하 말고 누가 있겠어?
그분은 검투 노예로서 투기장의 헌신한 내 공을 알아주시고는, 끔찍한 노예 신분에서 해방해 주시고 투기장 교관 자리까지 주셨다.
원래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폐하께 구원받은 뒤로 교관으로서 내 인생은 탄탄대로였다.
특히 검투 노예 때는 잘 활용하지 못했던 모든 언어를 할 줄 안다는 계륵 같은 능력이 교관 때는 타국 출신 노예를 가르치는 데에서 빛을 발했다.
제국에는 멸망시킨 타국의 귀족이나 왕족을 투기장의 노예로 전락시켜 제국의 국력을 과시하는 전통이 있는데.
이 때문에 나는 언어에 대한 재능을 인정받아 검투 교관에서 암캐 교관으로 보직이 변경되었고.
암캐 교관으로서도 타국의 귀족이나 왕족 출신 여자 노예들을 훌륭한 암캐로 교육해 다시 한번 황제 폐하께 인정받을 수 있었다.
여자 노예를 따로 교육할 필요가 있느냐, 그냥 따 먹는 것만 보여주면 되는 거 아니냐는 신사답지 못한 질문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녀들을 발가벗긴 후 관객들 앞에서 조롱하기는 쉬운 일이지만, 그 정도로는 제국 국민을 만족시킬 수 없다.
아무리 못해도 수많은 관객 앞에서 스스로 가랑이를 벌리고 자위하면서 자신은 암캐라고 울부짖는 정도는 되어야 한다.
당연하지만 평생 고귀하게 모셔지며 살아온 자존심 높은 년들이 치골에 노예 인장 좀 박힌다고 바로 말 잘 듣는 암캐가 되지는 않기에, 나 같은 교관들의 섬세한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수많은 고귀했던 암캐들을 만들어 낸 나는 황제 폐하의 은총을 받아 끝내 투기장 부총관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
물론 부총관이란 직함을 받긴 했지만 슬프게도 해방 노예라서 기존에 하던 일에 큰 변화는 없었다.
뭐 암캐 만드는 일이 적성에 맞았기에 별 불만도 없긴 하지만.
그렇게 부총관이란 직함이 익숙해졌을 때쯤, 황제 폐하께서 영광스럽게도 내게 새로운 어떤 고귀했던 암캐를 교육하라는 명을 얼마 전에 하나 내려 주셨다.
아... 이번에 얼마나 아름답고 절망적인 고귀했던 암캐가 만들어질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