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27. 이상동몽(異床同夢) (5)
“하영이가 조만간에 한 번 만나자고 해요. 식사도 대접하고, 보답도 하고 싶다고.”
“쩝! 진짜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그래도 사람 마음이 어디 그런가요. 다른 것도 아니고 생명의 은인인데. 그래서 다음 주로 약속을 잡으려고 하는데 괜찮죠?”
강호야 딱히 문제될 것은 없다.
“저야 뭐 반 백수나 다름없는데 아무 때나 상관없습니다. 근데 영화 촬영 때문에 바쁠 텐데 괜히 저 때문에 무리하는 거 아닙니까?”
“괜찮아요. 영화 촬영도 막바지고 하영이 촬영 분량은 추가 촬영이 생기지 않는 이상은 사실상 거의 끝났어요. 다음 주부터는 하영이도 시간도 널널해요.”
“다른 스케줄은 없나 봐요?”
“말년이잖아요. 회사에서 계약 연장 의사가 없으니 스케줄도 안 잡는 거죠. 보통은 6개월 전에 연장 계약을 하거든요. 그런데 3개월도 안 남았는데 소식이 없는 건 연장 의사가 없다는 거죠. 회사측에서요.”
안 그래도 인터넷 연애뉴스를 살피다 보면 간혹 핑크캣츠 계약 문제가 한 번씩 언급되곤 하는데, 사실상 계약 종료로 가닥이 잡혔다는 기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때문에 핑크캣츠의 팬 커뮤니티에서 지금 난리라고 하는데, 사실 아이돌 그룹에 그렇게까지 관심이 있는 편이 아니기에 강호는 그렇구나 할 뿐이었다.
“그럼 계약이 끝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뭐, 다른 기획사를 찾거나 아니면 연예계를 떠나서 일반인으로 살아가는 거죠. 근데 하영이는 데려갈 곳이 많아서 괜찮을 거예요.”
“다행이네요.”
“왜요. 하영이 한테 관심있어요?”
“딱히 관심이라기 보다는 팬심입니다. 팬심.”
“진짜일까? 하영이 보면서 딸치거나 한 건 아니고요? 이거 괜히 질투나네.”
역시 변태 마스터는 질문의 수위도 다르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강호도 대놓고 대답을 해 버렸다.
“그래도 시연씨 보다는 적게 했으니 질투하지 않아도 됩니다.”
“호호호! 이거 괜히 으쓱해지네요.”
강호의 대답에 흡족한 미소를 지은 강시연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하영은 남자라면 누구라도 사랑에 빠지고도 남을 스타일의 여자다.
예쁘고 귀여운 외모에 늘씬하면서도 풍만한 육체.
특히, 큰 가슴에 로망을 가지고 있는 남자들에게 오하영은 그야말로 판타지의 정점에 있는 가슴이라고 할 만 했다.
사람들은 모르지만 옷을 벗긴 오하영의 가슴은 더욱 대단한데, 보통 가슴이 크면 아래로 축 처지고 모양이 예쁘지 않은 경우도 많다.
하지만 드물게 가슴이 크면서도 모양이 예쁜 여자들이 존재하는데 오하영이 바로 그렇다.
그런 사람이 성격도 좋다.
백마 탄 왕자와의 사랑을 꿈꾸며 순결을 지켜왔을 정도로 착하고 순수하면서도 사람과의 관계나 일에 있어선 똑 부러진다.
성격적으로 현모양처 스타일이고 남자에게 헌신적이지만 단점이 있다면 성적으로 너무 소극적이어서 침대에서 마저 남자를 만족 시켜 줄 수 있을 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런데 최근에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긴 것인지 남자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하자면 성에 대해 부쩍 관심이 늘어났다.
성적인 호기심이 늘어났다는 이야기인데, 강시연으로서는 좋은 징조라 할 수 있었다.
‘그런 하영이가 강호씨에게 관심이 있단 말이지.’
그것이 자신을 구해준 사람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인지, 아니면 이성으로서의 관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관심이 있는 것 만은 분명하다.
문제는, 단순한 호감을 이성으로서 호감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오래도록 배우 생활을 하면서 늘게 되는 것 중의 하나는 바로 캐릭터 분석 능력이다.
작가가 시나리오를 집필 할 때, 특정 캐릭터의 성격을 나름대로 분석해서 시나리오에 녹여내기는 한다.
하지만 시나리오는 소설과 다르다.
대략적인 지문이 서술되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간단한 상황 설명이나 어중간한 묘사로 이루어져 있고, 대부분은 대사 위주로 작성되어 있다.
배우들이 시나리오를 받아 들고 캐릭터를 연구 하고 분석 하는 것도 이 때문이고, 그러다 보면 작가의 의도와는 다르게 해석을 하기도 한다.
즉, 시나리오를 통해 캐릭터의 성격을 배우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오하영에게 적용해 보면 참 애매하다.
오하영이라는 캐릭터는 어린 시절 백마 탄 왕자와의 운명적인 사랑을 꿈꾸기 시작한 이후, 20년 동안 가슴에 품고 살아온 여성이다. 그것도 순결을 지킨 채로 살아온 세월이다.
그 정도의 시간과 노력이면 백마 탄 왕자에 대한 꿈이 이제 환상에서 집착으로 변해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이라 할 수 있다.
순수하게 운명적인 사랑을 꿈꾸어 오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의 집착이 되어 자신의 꿈을 버리지 못하는 캐릭터일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랑과 집착은 동전의 양면이어서 때론 구별하기 어렵다고 한다.
특히, 오랫동안 품어온 사랑이 집착으로 변하는 걸 당사자는 절대로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사랑이 더 깊어졌다고 인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하영의 꿈이 집착으로 변했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위험하다.
만약 이 사람이 꿈에 그리던 백마 탄 왕자라고 정의하는 순간 집착은 현실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목숨이 경각에 달린 공주를 구하듯 강호라는 존재가 등장했다.
오하영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백마 탄 왕자처럼 여겨질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다르게 해석하면 집착으로 변해버린 환상이 강호를 백마 탄 왕자로 만들어 버린 것일 수도 있다.
전자와 후자는 엄연히 다르다.
하나는 기다림 끝에 만난 운명적인 사랑이라 할 수 있겠지만 후자는 20년 동안 억지로 붙들어 온 환상이 만들어 낸 집착의 산물에 불과하다.
하지만 강시연에게는 그것이 운명적인 사랑이든, 집착의 산물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강호씨에게 호감이 있다는 게 중요하지. 그게 중요한 거야.’
사랑이 집착이 되듯, 집착이 사랑이 될 수도 있다.
지금 오항영의 관심이 집착이 만들어 낸 감정의 허상이라면, 진짜로 만들어 주면 된다.
집착을 더 키우고 키워서 진짜라고 믿어 버리게 만들면 된다.
‘그래서 강호씨 없이는 살 수 없는 여자로 만들어 버리면 되는 거야.’
문제는 오하영이 순순히 받아 들일 수 있느냐다.
사랑을 하고 집착을 하는 것과, 이미 여자가 있는 남자의 또 다른 여자가 되는 건 다른 문제다.
속된 말로 세컨드가 되는 일이다.
과거의 표현을 빌자면 첩이기도 하고 후처, 후실이라고도 한다.
현대 사회에서 한 남자가 여러 여자를 거느리는 것은 그 자체로 부도덕한 일이고, 사회적으로 그릇된 것으로 규정되어 금기시 되는 터부다.
태어나면서부터 현대적인 교육을 받으며 형성되어온 가치관은 종교적인 신념과도 같다. 그리고 굳은 믿음이라는 것은 쉽게 깨뜨릴 수 없기에 신념이라고 한다.
오하영을 설득하고 강호의 여자로 만든다는 것은 그런 사회적인 터부이지 신념을 뒤흔들고 깨뜨리는 일이다.
그게 쉬울 리가 없다.
‘하영이가 아무리 강호씨한테 마음이 있어도 그런 관계를 쉽게 허락할 리 없어. 내가 진짜 너무 쉽게 생각했어.’
그런 생각을 하자 자연히 강호에게로 시선이 옮겨간다.
‘그리고 강호씨도 설득을 해야 하고.’
남자가 삼처사첩에 대한 로망을 지니고 있다고는 하나, 마찬가지로 사회라는 테두리에서 형성된 가치관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설마 강호씨까지 거부하면 안 되는데. 아니야. 이렇게 정력이 강한 남자가 나 혼자로 만족할 리가 없어.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제고 다른 여자를 찾게 되어 있어.’
결국 오하영을 설득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결론만 확인한 셈이다.
‘일단 내가 강호씨 곁을 절대로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하영이한테 확실하게 어필해야 해. 그리고 강호씨의 정력이 너무 강해서 나 혼자로는 감당이 안 되니 다른 여자가 필요하다는 식으로 계속 암시를 심어 주어야해.’
그런 식으로 강시연 나름대로 오하영의 문제를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비단 강시연만이 아니었다.
오하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무섭게 강호의 머릿속에는 자연스럽게 파트너 시스템이 떠올랐다.
‘오하영 같은 여자는 어떤 고유 스킬을 가지고 있을까? 호칭도 궁금하네.’
그런 생각은 오하영만이 아니었다.
파트너 시스템의 실체를 알게 된 후, 강호는 집에서 나와 만나는 모든 여자들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여자는 어떤 호칭을 가지고 있을까?
이 여자는 어떤 스킬을 가지고 있을까?
문제는 그것을 확인하자면 동반자로 만들어야 하는데, 강시연이 그런 관계를 수용해 주느냐 하는 것이다.
아무리 그녀가 변태 마스터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런 관계까지 수용해 줄지는 의문이다.
‘강시연씨 칭호가 변태 마스터라고 했으니까 또 모르지.’
변태가 왜 변태겠는가.
평범한 성적 취향과는 다른 이상성욕을 가지고 있기에 변태라고 하는 것이다.
게다가 강시연은 변태 중의 변태인 변태 마스터다.
아직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어 그녀의 이상성욕의 한계를 짐작하기 어렵지만, 마스터라는 수식어가 아무에게나 붙을 리가 없다.
변태 마스터라면 다른 여자와 한 침대에서 뒹구는 걸 오히려 좋아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빠른 시간 안에 새로운 동반자는 무조건 만들어야 해. 그 전에 강시연씨부터 설득해야 하고. 흐음! 쓰리썸하는 야동을 다운 받아서 슬쩍 그거나 같이 보자고 해 볼까? 그러면서 반응을 슬쩍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그런 생각을 하며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리고 서로의 속내를 숨긴 채로 태연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데 어딘가 모르게 두 사람의 미소는 미묘하게 뒤틀려 있는 것이 그 누가 보아도 속내를 숨기고 있는 듯한 그런 미소였다.
이상동몽(異床同夢)
의도는 다르지만 결국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과연 서로가 결국은 같은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런데 의외로 두 사람이 서로의 숨긴 속내를 들여다보게 되는 사건이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