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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 용신제의 끝


​ 좋은 소식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고 하던가. ​ “살점 속에서 사람이 발견됐다고 하네. 젖소 수인이랑 정화자 직속 부대의 엘프라고.” ​ “아...” ​ 길드장은 힘겹게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한입 마시며 미간을 찌푸렸다. ​ “인스턴트는 내 취향이 아니...” ​ “그 사람들!” ​ “응?” ​ “둘 다 무사해?” ​ 다급하게 길드장에게 다가가 묻자 그녀는 몸을 조금 뒤로 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뭐, 검사는 해봐야 알겠지만, 외관상으로는 괜찮다고 하던데.” ​ “으으으...따아아앗!!” ​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 “꺄악! 므, 무, 뭐야!” ​ 길드장이 뒤로 넘어가며 커피를 흘리는 참사가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다. ​ “믿고 있었다고, 젠장! 망할 보지 여신님!” ​ 진짜 만나자마자 덮쳐서 풀발기 자지로 자궁을 북북 긁어서 행복하게 만들어줄게요! ​ 나는 그만 참지 못하고 발기하고 말았다. ​ “제에엔장! 길드장!” ​ “으에...?” ​ 순진한 얼굴을 하고 바닥에 주저앉은 길드장을 향해 달려들었다. ​ “꺅! 잠, 우웁!” ​ 품에 안기는 체온처럼 사람을 안심하게 만들 수 있는 게 있을까?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도 행복했다. ​ 주변은 황폐해지고 아직 비명과 피 냄새가 나는 현장이지만 그게 뭐 어쨌다고. ​ 나는 어미의 품을 파고드는 새끼강아지처럼 길드장의 품을 파고들었다. ​ 급작스럽게 달려들긴 했지만, 지금은 격렬하고 에로스한 키스를 원하는 게 아니었다. ​ 그저... ​ “웅...쪼옥- 후훗. 이럴 때 보면 시우는 참 귀엽다니까.” ​ “키, 키스나 해...길드장 키스 좋아하잖아...” ​ “그래, 그래. 자, 쪽-” ​ 따스한 입술이 뭉개지고 서로의 코가 맞닿았다. ​ 거의 움직임도 없이 정적인 키스였지만 깊이 가라앉아 나만을 바라보는 애정 어린 길드장의 눈빛이 좋았다. ​ 피로감과 긴장감이 서로의 숨결과 함께 부서지며 흩날렸다. ​ 서서히 감기는 눈으로 길드장의 따뜻한 눈빛을 보다가 어느샌가. ​ 나는 깊게 잠들었다. ​ *** ​ “후아... 이 요망한 게...” ​ 정혜지는 평온한 얼굴로 품에 안긴 시우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 “잠들었어?” ​ 곁에 다가온 박아라와 이유라가 그런 시우를 보며 피식 웃었다. ​ 새하얀 길드 정복에 묻은 먼지와 피가 군데군데 얼룩처럼 남고 얼굴에도 숯검댕이 묻은 모습이었다. ​ “...어떻게 됐다니?” ​ “...공식적으로 세리안 렐리트의 사망이 발표된다고 하네. 지하에서... 머리만...” ​ 박아라는 무표정한 얼굴로 길드의 수뇌부들이 모여 회의 중인 가장 큰 천막을 바라봤다. ​ 길드장은 잠시, 아주 잠시 오랜 세월을 세계수의 수호자로 군림했던 엘프의 비참한 끝을 생각했다. ​ 인생무상이라는 말이 딱 맞는 오늘이었다. ​ “무투전은?” ​ “당연히 취소. 올해는 끝.” ​ 이유라는 길드장의 옆에 털썩 주저앉아 검을 꺼내 들어 기름먹인 천으로 천천히 닦아냈다. ​ “피피가 보급한 물약 값은 지윤이가 협상 중이야. 후려치려는 년들이 많아서 일단 한놈씩 패놓고 왔어.” ​ “...그래.” ​ 길고 길었던 무투전이 이렇게 막을 내려버리니 김이 새는 느낌이다. ​ 아샤의 비늘을 얻으려고 시우에게 소원권을 빌미로 길드원들을 낚아채 간신히 기회를 잡았는데. ​ 허탈해진 기분으로 조심스럽게 한숨을 내쉴 때 가만히 검을 닦던 이유라가 어깨를 들썩이며 입꼬리를 주욱 끌어올려 웃었다. ​ 흠칫! ​ “뭐, 뭐야. 너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 거야!” ​ 하도 이유라에게 당한 게 많다 보니 저 웃음을 볼 때면 저도 모르게 경계하게 된 장애를 가진 길드장이 시우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 그가 깰까 봐 차마 소리는 못 지르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 박아라 마저도 그 음흉한 표정을 짓자 길드장은 공포에 질려 숨을 헐떡였다. ​ “길드장.” ​ 이유라의 음산한 목소리에 벌벌 떨며 눈을 질끈 감은 길드장의 볼에 차가운 무언가가 닿았다. ​ “꺄...아?” ​ 결이 그대로 남아 빛을 받으니 오묘하게 반짝이는 새하얀 비늘이었다. ​ “히히히.” ​ “크큭. 손은 눈 보다 빨라.” ​ 정혜지는 멍하니 손에 비늘을 들고 입을 벙긋거리며 한참을 가만히 바라봤다. ​ “너희...” ​ “어때? 맥주 가지러 가다가 딱! 어? 딱 있는거야. 주변을 둘러보는데 마침 유라가 나랑 눈이 마주치는 거 있지?” ​ “강화 유리도 별거 아냐. 그냥 썰어버렸어.” ​ “그때 딱 통하는 게 있었다니까? 어차피 무투전은 흐지부지되고 주인은 지옥으로 가버렸는데 남겨둬서 어디 쓰겠어.” ​ “음. 음. 마땅한 보수.” ​ 시우를 품에 안은 정혜지는 하이 파이브를 하는 둘과 비늘을 번갈아 바라봤다. ​ 악동처럼 흐흐 웃어대는 우리 집 망나니들. ​ 오늘따라 왜 이렇게 예뻐 보이는지. ​ 비늘을 소중하게 품속에 넣고 양손으로 시우의 귀를 마나를 덧씌운 손으로 감싸고 가슴 깊은 곳에서 폭발하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 “꺄아아아악!!! 너희는 오늘부터 길드 청소 제외야! 평생 제외! 맥주 냉장고 필요하다고 했지!? 내가 사줄게! 이리 와! 뽀뽀 한번 해보자!” ​ 입가에서 침을 줄줄 흘리며 발광하는 길드장을 보던 이유라와 박아라는 조금 놀란 듯하다가 뽀뽀라는 말에 질색하는 얼굴로 후다닥 멀어졌다. ​ “우웨에엑!” ​ “오우... 유라한테 많이 해줘. 난 사람 오는지만 본 거야. 쟤가, 쟤가 다 했어.” ​ 둘은 길드장이 시우를 품에 안고 있어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 ​ 모든 것을 어느 정도 수습하기까지는 이틀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 사망자와 부상자의 집계와 수색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었고 다소 놀랄만한 소식도 들려왔다. ​ [이번 무투전에서 발생한 ‘마기 혼합 괴생명체’ 사건의 사망자가 오늘 오전 9시경 2백명을 넘겨...] ​ [용신제 주최 측인 드라고니아에서 공식적으로 세리안 렐리트님의 사망 소식을 전했습니다. 세계수 연합의 차기 수호자에 대한 선거가...] ​ “결국 죽어버렸네. 쯧.” ​ “그, 그러게요오...” ​ 바짝 굳어버린 채로 내게 안겨있는 청란과 침대에 누워 이번 사태에 대해 떠드는 뉴스를 시청했다. ​ 하나로 올려묶은 머리카락 아래 새하얀 목덜미가 보였다. 삐져나온 잔머리가 사랑스럽게 몇가닥 늘어져 있었다. ​ 그곳에 얼굴을 파묻고 가벼운 한숨을 내쉬자 청란은 흠칫 떨면서도 가만히 내게 몸을 맡겼다. ​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체온과 조금의 움직임이 이렇게나 안도의 감정을 주다니. ​ 한숨에 섞인 안도감과 자괴감이 선명했다. ​ ‘아무것도... 아무것도 못 했어.’ ​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해낸 일이 뭐가 있는지. ​ 세리안 렐리트가 폭주했던 때부터 모든 일이 끝나기까지 그저 여자들의 품에 안겨 덜덜 떨고만 있었던 내가 한심하다. ​ 신비가 담긴 물건은 써보지도 못했고 괴물에게 내린 명령은 듣지도 않았다. ​ 마기는 함부로 쓸 수도 없어서 봉인된 상태였고 그마저도 별 도움이 안 됐을 것 같았다. ​ ‘싸움...’ ​ 누군가를 다치게 하고 물리적인 힘으로 상황을 해결하는 방식이 너무나도 낯설다. ​ 태어나고 자라오면서 일방적인 폭력이 아닌 대등하게 싸웠던 적은 초등학교 이후로 한 번도 없다. ​ 이전 세계의 사회란 그런 곳이었고 웬만해서는 서로 죽일 듯 싸우는 정도까지 가지도 않으니까. ​ 그래서 이곳이 싫었다. ​ 폭력을 사용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세상. 나는 그런 곳에서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저 막연하고 안일하게 생각하면서. ​ 이불보 위에 늘어져 있는 청란의 오른팔에 깁스가 보였다. 처참했던 손은 피피와 레베카의 응급처치 이후 제대로 된 신성력 사용자에게 보이는 것으로 회복했지만 뼈가 붙을 때까지는 얼마간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 ‘...힘이 필요해. 수단 방법 가릴 때가 아니야.’ ​ 젖소 누나에게 처음으로 흡정을 해보고 얻은 기이한 문신이 기억난다. 그리고 조금 더 많아진 마나의 양도. ​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미적거리며 여자친구들의 눈치를 봐왔지만 이젠 그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 “청란.” ​ “네, 녜에...” ​ 내 품에 안겨있는 것이 행복한지 연신 꼬리를 붕붕 흔들어 내 허벅지를 때리던 그녀가 흐물흐물해진 입을 움직여 간신히 대답했다. ​ “나 강해질 거야. 수단 방법 안 가리고 강해져서 이런 일이 있을 때 도움이 될래.” ​ “하으... 넷...네?” ​ 꼬리는 붕붕 흔들어 내 허벅지를 때리던 청란이 움직임을 멈추고 놀란 듯 나를 바라봤다. ​ 짤랑-! ​ 하지만 지금 나는 그녀에게 어떤 대답도 해줄 수 없었다. 오로지 내 시선은 이전의 내가 고려도 해보지 않았던 상품들을 세심하게 훑어보고 있으니까. ​ [신비상인 전용 상점] *최상급 마나 회로 이식술 [8천만 골드] *라이칸 혈청 [1억 골드] *고대 거인족 무투술 [7천만 골드] *세계수 일족 정령술 교본 [7천 5백만 골드] *천년 이무기의 내단 [1억8천만 골드] . . . ​ 이미 수없이 봐왔고 한때는 이것들은 이용해서 강해지려는 생각도 했었다. ​ 그러나 끝내 호신용 무기나 가지고 다녔던 이유는 폭력에 대한 지독한 트라우마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 빌런에게 무차별적으로 맞아보니 차마 주먹을 휘두를 엄두가 나지 않았었다. ​ “시우 님? 어디 아프신 건 아닙니까?” ​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는 청란의 손에 새하얀 깁스. 한세희와 이유라가 청란이 잠든 사이 그려놓은 외설스러운 그림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 “나 강해질 거야. 누구보다도.” ​ 청란의 순진무구한 얼굴을 보며 굳게 다짐했다. 악착같이 벌어뒀던 10억 골드의 카르마. ​ 그것의 가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욱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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