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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빌런 체포에 경찰이 필요한가요? 주인공은 인기가 너무 많아.


어찌저찌 다시 리백단의 본진을 찾아 들어가니. 리백단 간부놈이 나를 띠껍게 꼬라보고 있었다. 나는 군필자다운 완벽한 뒷짐 자세를 선보이며 내가 벌인 일의 전말을 술술 이야기했다. 트레이너 기별룡이 무시무시한 빌런 비주얼로 변하는 이야기. 한 남자의 처절하고 찬란한 서사시가 뚝딱 튀어나왔다. "...그렇게 된 겁니다." 보고를 하면서도 내심 기대했다. 솔직히 보상까진 바라지도 않았다. 근데 적어도 칭찬은 해 줄줄 알았다. 그러나 간부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릴 뿐. 까놓고 말해서. 그 모습을 보니 삔또가 상했다. "뭐. 그래. 수고했다." 말 한마디로 입을 싸악 닦다니. 이것이 인턴의 서러움인가. 나는 불순한 눈빛을 눈꼽에 담아 간부를 쳐다봤다. 그리고 눈을 마주친 순간. 나는 간부가 내심 곤란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전두엽이 혼자서 핑핑 돌아가며, 간부의 생각을 읽어내기 위해 듀얼코어를 돌렸다. 결론은 금세 도출되었다. "그럼, 이만 숙소로 돌아가 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뭐, 그래라."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해맑게 웃었다.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리백단 간부. 다행히도 내 달라진 분위기를 눈치챈 기색은 아니었다. "용캐도 돌아왔네. 힘들었지?" "뭐 그렇죠." 의례적인 상사와 부하간의 대화가 몇 번 오갔다. 보고서를 읽던 간부놈의 눈빛이 살짝 불손해진다. 그야 그 정도 능력도 없으면 쪼랩 주제에 기지를 지키고 있을 수 없겠지. 흐음- 낮은 신음 소리를 내며 종이 쪼가리에 코를 파묻었지만. 결국 결정적인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리백!" 그렇게 잠시 미묘한 신경전이 오가고. 나는 경례를 거수하며 문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고.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나는, 간부실을 나온 직후 인상을 구겼다. "저 새끼가 나를 팔아먹어?" 되면 좋고. 안 돼도 상관은 없고. 싼 맛에 사용하는 1회용 대포동 미사일. 간부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나의 가치는 겨우 그 정도였다. 처음부터 뭔가 수상했다. 문을 따악 열고 들어갔더니 저 새끼가 왜 무사히 돌아왔지? 그런 눈빛을 보내왔으니까. 혼란을 일으키는데 실패했으면 그대로 쫓아내고, 만약 성공했으면 경찰이 나를 처리해주겠지. 뭐 그런 생각. 20대 시절 블랙 기업 인턴 시절의 경험이 피드백되어 굉장히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아주 나쁜 녀석이야."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서 콜로세움의 귀중품을 털겠다는 계획이 성공했다. 그런데 내게는 뽀찌 하나 안 떨어졌다. 사냥개도 이것보단 취급이 좋을 텐데. 나는 이를 아득바득 갈아대며 다음을 기약했다. "오늘 밤에 보자." *** 늦은 밤. 눈을 감고 고른 숨소리를 내던 나의 눈이 번쩍- 떠졌다. 주위를 살금살금. 눈알을 돌려본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 나는 은밀·기동·신속을 유지하며 고양이 걸음으로 문을 나섰다. 현재 시각은 오전 1시. 약속 시간인 오전 1시 30분까지는 아직 삼십 분이나 남았다. 오전 1시 30분이라. 불의의 습격이 있기에 정말 좋은 시간이다. = 여, 여기가 리백단의 본거지라고요? - 약소하지만 제 보답입니다. 이렇게 빈손으로 돌려보내기엔 너무 죄송하더군요. = 정말 고마워요! 땅굴을 타고 마을 바깥으로 탈출한 직후. 나는 메가 시티 시청장 정책보좌관 레일라와 모종의 거래를 나눴다. 그녀는 실적이 필요했고, 나는 아이템이 필요했다. 게다가 경찰들의 실적 역시 올라간다. 이렇게 되면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완성되지 않을까? 어차피 빌런은 사람이 아니니까. 살금- 살금- 숨소리 하나 없이 드라이어드와 서큐버스를 소환한 나. 조금 미안한 소리지만. 운디네는 너무 촐싹거려서 소환하지 않았다. 우리는 미리 봐둔 장소로 접근했다. [수상한 벽] - 평범한 벽처럼 보인다. 다만 특정한 조건을 만족시킨다면...? "여기야." "호오~" "!!!" 통통- 노크하듯 손목에 스냅을 주며 두드리자 빈 철봉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광경을 확인한 드라이어드와 서큐버스가 작은 목소리로 감탄한다. 뭐, 드라이어드는 목소리가 안 나와서 표정만 지었지만. "자, 그럼 이제부터 스위치 찾기 시작이다." "네에~" "~♪" 야심한 밤. 손전등 세 개가 복도를 훑으며 이리저리 움직인다. 먼저 벽부터 확인하고. 그다음은 화분을 확인하고. 바닥의 이음매에 끊어진 부분이 있나 그것도 확인했다. 그때. 드라이어드가 내게 다가오더니 엉덩이를 콕콕 찔렀다. 근데 말이야. 똥구멍 말고 다른 부위를 찌르는 것은 어떻겠니? 엉덩이의 중앙부를 찔린 순간. 엄청나게 놀랐다. "!!!" "왜 그래 드라이어드야. 혹시 찾았어?" "정말요?" 드라이어드가 가리키는 것은 화분 가장자리에 놓인 돌멩이였다. 겉보기에는 다른 돌멩이와 똑같이 생겼다. 상태창을 확인하거나 직접 움직여보지 않는 이상은 모를 정도다. [은밀한 스위치] - 돌멩이와 똑같이 생긴 스위치. 이것을 누르면 무슨 일이 일어날 듯하다. "이야~ 이건 또 어떻게 발견했냐?" "~♪♬" "여윽시 드라이어드 쁠러스야. 자, 그럼 바로 열어볼까?" 막 스위치를 누르려는 나의 손을 서큐버스가 잡았다. "그런데요 주인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너무 크지 않을까요?" "괜찮아. 괜찮아." 요란스럽게 열릴 리가 있겠어. 만약 커다란 소리가 들리면서 문이 열렸다면, 조무래기들도 비밀 통로의 존재를 알고 있어야 하겠지. 게다가 무려 스위치의 이름도 은밀한 스위치라고. "그럼, 누른다." 드라이어드와 서큐버스를 번갈아 바라본다. 고개를 끄덕이는 두 에로몬. 모두의 허락을 받은 나는 조심스럽게 버튼을 눌렀다. 그그그그그- 맷돌 갈리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조용했던 밤을 시끄럽게 하는 소리. 생각보다 커다란 소리에 나도 놀라고 에로몬들도 놀랐다. 서큐버스의 꼬리가 깜짝 놀라며 위로 솟아올랐다. "소리가, 작지 않은데요?" "크흠- 이 정도면 작은 거지 뭐." 그래도 이쪽 루트가 맞을 거야 아마. 리백단 조무래기와 연속 전투를 벌이고 싶진 않다. 레벨링 노가다는 검은 숲에서 충분히 했다고. 그렇게 비밀 통로의 안쪽으로 들어간 우리 일행. 비밀 통로가 완전히 닫힌 것을 확인한 나는, 운디네를 마저 소환했다. "뽁뽁!" [운디네가 치유파동을 사용했다.] "고마워 운디네." 혼자만 따돌린 것이 조금 미안해진 나는 운디네의 머리를 메챠쿠챠 쓰다듬었다. 털털한 운디네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눈치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원래 이렇게 작은 감정 하나하나가 쌓여서 섭섭함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이제 30분만 기다리면 돼." "여기서요?" 빛 한점 비치지 않는 완전한 밀실. 소심한 드라이어드는 그것이 조금 무서운지. 두 팔로 내 허벅지를 꼬옥 껴안았다. 조용해진 분위기 속에서 서큐버스가 속삭이듯 내게 묻는다. "그런데요 주인님. 여기로 도망을 안 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무조건 도망을 칠 거야." 간단한 이론이다. 귀중품 보관소에서 본 아이템이 한두 개가 아니다. 초반부터 주인공에게 아이템을 그렇게 퍼먹이면 스토리가 개판나거든. 하지만 그녀들에게 메타발언을 할 수는 없는 노릇. 나는 대충 얼버무리며 서큐버스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드라이어드야, 보자마자 입을 막아 버리는 거야. 알았지?" "저는 최면술을 쓰면 되고요?" "그래그래." 우리는 그렇게 대화를 나누면서 첫 번째 커브길을 주시했다. 아주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기만 해 봐라 그냥.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나의 눈은 이미 훌륭한 예비 강도단. 좁아터진 생활관에서 냄새 나는 남자들과 몸을 부대끼며 잠을 잤다. 그때의 분노와 한을 풀 때가 왔다. 저벅... 저벅... "근데요. 주인님." "왜."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나요?" 서큐버스의 속삭임을 들은 드라이어드가 미모사처럼 움츠러들며 내 허벅지를 꼬옥 붙잡았다. 시선을 돌리며 생각을 나눈 우리. 일행은 소리 하나 없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저벅. 저벅. 비밀 통로를 울리는 발걸음 소리. 커브길의 너머에서 희미하게 불꽃의 반사광이 보였다. 인원은 대략 넷. 아니, 둘은 에로몬인가? 발톱 긁히는 소리가 때때로 들려온다. 공포 영화의 연쇄살인마처럼 지하공동을 울리며 다가오는 사람들. 확실하다. 누군가가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 "준비." 나는 마나를 끌어올리며 속삭였다. 동시에, 나의 에로몬들이 미리 약속한 대로 자세를 잡았다. [운디네가 강체화를 사용했다.] [서큐버스가 강체화를 사용했다.] "여... 인..." "그러... 아앗!" "온다." 바싹 일어나는 드라이어드의 나뭇잎. 운디네는 고양이의 스프린트 자세로 몸을 웅크렸다. 그렇게 숨조차 죽인 채 사냥감을 기다리는 우리들. 누군가의 손전등이 막 고개를 내밀었다. "가랏!" 운디네가 불꽃 속성 에로몬을 향해 몸을 날린다. 그것을 신호로, 우리의 기습이 시작되었다. [드라이어드가 뿌리묶기를 사용했다.] [서큐버스가 최면술을 사용했다.] 콰과과광- 조금의 오차도 없이 날아가는 에로몬들의 공격. 나무줄기가 오른쪽 트레이너의 몸을 휘감았고, 최면술을 맞은 왼쪽 트레이너의 몸이 휘청인다. 운디네는 셀러맨더로 보이는 에로몬의 경동맥을 조여서 추욱- 늘어지게 했고. [트레이너가 전기충격기를 사용했다.] [이런. 카샤가 쓰러졌다.] "이게 어디서 진화도 안 한 게 까불어." 나는 전기충격기에 뻗어 버린 카샤를 바라보며 썩소를 날렸다. 음... 솔직히 나도 한 방에 뻗을 줄은 몰랐다. 내가 강해진 걸까. 아니면 이 카샤가 유난히 약한 걸까. "진짜로 쓰러졌나?" 혹시 속임수는 아니겠지. 나는 기절한 카샤의 뺨을 톡톡 두드리며 티배깅을 시전했다. 마음 같아선 기념품 루팅이라도 하고 싶지만, 에로몬의 팬티를 수집하는 것은 합법인지 불법인지 모르겠다. 일단 게임에서는 비슷한 게 있었는데 말이야. "흐에에에에~" "어... 주인님?" "왜 그래 서큐버스야. 일단은 빨리 묶어라." "그게... 이건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서큐버스가 얼떨떨한 어조로 손에 들고 있던 포획도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이상한 덩쿨 (풀 / 포획도구)] - 이상한 덩쿨. 다른 덩쿨보다 훨씬 더 튼튼하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평범한 아이템이었다. "왜 그래. 불량품은 아닌 것 같구만." "아니요. 그쪽이 아니라 트레이너의 얼굴이..." 서큐버스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쓰러진 카샤를 귀갑자세로 묶는데 성공한 나. 19금 야겜 세계관에서 귀갑 묶기보다 완벽한 제압법은 없겠지. 나는 뿌듯한 표정으로 제압당한 카샤를 바라봤다. "그래. 그래 일단 얼굴이나 좀 보자고." 나는 털레털레 일어나서 트레이너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설렁설렁 걸어가던 자세 그대로, 눈을 뜬 채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새내기 트레이너 아이다 : Lv.16] "..." "..." "그쵸?" 그러게. 아니 왜 주인공이 여기 있지? "...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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