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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아니, 여기는 수풀이 아닌데? 주의 : 하피 출현 지역!


"와. 이걸 살았네." 정신을 차린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내 팔다리를 느슨하게 속박하고 있는 덩쿨들. 툭 건들기만 해도 끊어질 것처럼 얇은 덩쿨이지만, 내 체중을 지탱하는 것으로 보아 보기보단 질긴 모양이다. "무작정 끊어 버리면... 안 되겠지." 조금 거슬리지만 일단은 나의 생명줄이다. 이 덩굴들이 끊어지는 순간 나는 땅바닥과 굿바이 키스를 하게 되리라. 그래서 내가 밟을 땅은 어디쯤에 있나. 슬쩍 고개를 내린 나는 바로 후회하며 질끈 눈을 감았다. "제기랄. 차라리 보지 말걸 그랬어." 얼마나 높은 나무길래 바닥이 안 보이지? 그 불합리한 높이를 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시발, 진짜로 죽을뻔했네." 뭐. 아무튼 살았으니까 됐지만. 사방에는 우거진 나뭇잎과 흩날리는 바람뿐. 손가락 하나라도 잘못 움직였다간 그대로 추락을 하고 만다. 그녀라도 살리기 위해 운디네는 미리 집어넣은 상태. 그래선지 에로몬을 소환하는 것은 지친 상태에서도 꽤나 수월했다. "나와라. 드라이어드." 나의 왼팔에서 밝은 빛무리가 흘러나왔다. 드라이어드는 나무줄기 위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 "!!!" 뿅 하고 멋쟁이 포즈를 잡기도 잠시. 드라이어드가 아래를 바라보더니 깜짝 놀랐다. 그녀는 무섭다는 듯 허벅지를 벌벌 떨며 나무 껍질을 꼬옥 붙잡았다. "그런 곳에다가 소환해서 미안하다. 보시다시피 지금 상황이 많이 안 좋아서." "???" "자세한 이야기는 이따가 하고. 일단 나 좀 내려 줄래?" 얼굴에도 뺨에도 잔 상처가 가득한 나. 상황을 파악한 드라이어드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드라이어드가 뿌리묶기를 사용했다.] 슬금슬금. 드라이어드는 나무의 정령. 게임에서는 숲 타일에서 능력치에 보너스를 받았다. 현실 역시 그리 다르지는 않은 모양. 한결 강력해진 나무줄기가 담쟁이 넝쿨처럼 나무의 몸통을 휘감으며 올라왔다. 그렇게 올라오던 세 갈래의 나무줄기가 한데 뭉치더니, 커다란 밧줄로 변해서 내 몸을 휘감았다. "와. 우리 드라이어드 스킬이 많이 늘었네?" 부드럽게 칭찬하자. 드라이어드의 콧대가 슬쩍 올라갔다. "살짝 오른쪽으로." "..." "멈추고. 이번에는 왼쪽." "...?" "이게 애매하게 매듭이 묶여 있어서 그래. 이제 마지막이다. 위로 살짝 들어 올려." 끼이이이잉! 드라이어드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리며 스킬을 사용. 몸이 살짝 위쪽으로 떠오르더니. 마침내 나의 등에서 딸깍- 소리가 들려왔다. "오- 됐다!" "!!!" "이제 조심조심 내려 줘." 천천히 천천히. 여기서 떨어지면 무조건 죽겠지. 인형 뽑기 집게에 집힌 인형처럼 드라이어드의 뿌리에 얌전히 몸을 맡겼다. 빳빳한 몽둥이처럼 가만히 서서 한참을 기다리자. 톡- 소리를 내며 발바닥에 땅이 닿았다. 그렇게 흙을 디디자 갑자기 눈물이 다 나왔다. "와- 살았다!!!" 물론... 아직 완전히 살지는 않았지만! 주변을 둘러보니 상황은 여전히 암울했다. 사방에는 온통 우거진 나무들 뿐. 검은 숲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주변은 온통 짙은 그림자로 깜깜했다. 나뭇잎이 빽빽하게 드리워진 하늘을 보고 있으니, 내 마음도 덩달아 음울해졌다. "그래서 이제 어쩐다냐..." 여기 총 면적이 여의도의 몇 배더라? 나는 현재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허리춤에서 판치라 스캐너를 뽑아 들었다. 고장이 나지는 않았나 조심조심 버튼을 누르고. 고장이 나지 않았음에 감사하며 판치라 스캐너에서 지도 버튼을 클릭. 그리고 절망이 나를 덮쳤다. [통화권 이탈 지역입니다.] "드라이어드야." "?" "우리, 망했다." 길을 잃고 죽던가 아니면 굶어 죽겠지. 일단 둘 중 하나는 확실했... 잠깐만. 내겐 숲의 정령 드라이어드가 있잖아? 나는 깨달은 사막여우 같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드라이어드야, 혹시 주변에 있는 샘물이나 동굴, 먹을거리 같은 걸 찾을 수 있겠어?" 내 말을 들은 드라이어드가 눈을 감았다. 정신을 집중하자. 그녀의 주변에 숲과 같은 향기가 맴돌았다.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것을 기다렸다. "어때, 찾을 수 있겠어?" 제발 찾을 수 있어라. 나는 두 손을 맞잡은 채 무릎을 꿇었다. 절박하기까지 한 기도. 나도 모르게 마른침이 꼴깍- 넘어갔다. 마침내 눈을 뜬 드라이어드. 그녀는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애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자기도 될지 안 될지 모르겠다는 뜻이었다. 제기랄. 레벨업 좀 하고 올걸 그랬어! 나는 후회가 막심했다. "실패해도 괜찮으니까. 한 번만 해 볼래?" 그 말에 드라이어드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두근두근- 주변에서 심장 소리가 들렸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노랫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그것은 구급차의 엠뷸런스 소리처럼 길게 늘어지며 숲에 자취를 남겼다. "~~~♪♬" 손을 하늘로 뻗은 상태에서 훌라후프를 돌리듯이 허리를 흔들흔들. 드라이어드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삼바나 훌라춤과 비슷한 느낌의 댄스였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서서히 서서히. 그녀의 머리에 달린 꽃망울이 열리기 시작했다. "――♬♪ ̄♪___♪" [드라이어드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드라이어드가 태양찬송을 배웠다!] 쏴아아아아- 바람이 그 순간을 축하하듯 드라이어드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휩쓸고 지나갔다. [드라이어드가 태양찬송을 사용했다.] [태양이 떠오른다.] [드라이어드의 능력치가 상승했다.] 드라이어드의 몸에서 초록색의 무언가가 흘러나왔다. 희미하게 뻗어나간 그것은, 마침내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였다. . . . "으으... 눈뽕." 황당한 마음 반. 경외하는 마음 반. 처음 보는 스킬의 획득에 속으로는 무척 놀란 상태였다. 감았던 눈을 슬쩍 벌려서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드라이어드는 언제나와 같이 조신한 얼굴. 다만 조금 힘이 드는지 숨을 조금 헐떡이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홀린 듯이 그녀에게 다가가. 드라이어드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수고했어." "!!!" 드라이어드가 손가락을 뻗어 숲의 어느 지점을 가리켰다. 아, 내가 먹을 걸 찾아달라고 했었지? 그제야 원래의 목적을 떠올린 나는 민망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그쪽에 누군가가 있다고?" "...!" 나뭇가지에 긁혀 상처가 난 손바닥. 얼굴에는 피곤이 가득. 하지만 팔을 휘두를 만큼의 기운은 남아 있다. 세차게 손을 휘두르자. 흙먼지가 묻어 군데군데 찢어진 옷소매 사이로 밝은 불꽃이 흘러나왔다. 흘러나온 빛무리는 두 개의 인형으로 나눠어 바닥에 착지했다. 그렇게 튀어나온 운디네와 서큐버스는 꾀죄죄한 나의 얼굴을 요리조리 확인하더니 내 품에 포옥 안겨들었다. "???" "주인니이이이이임!!!" "얘들아, 무거워. 나 방금 넘어질뻔했다." "운디네한테들었어요어떤우라질하피녀석들이감히주인님을건드렸다고하더라고요제가전부잡아서하피를묶어놓고그 앞에서유정란으로게란후라이를해 버리겠어요!" "진정해. 나 아직 안 죽었으니까." 그렇게 한참을 토닥이자. 그제야 서큐버스의 얀데레 모드가 해소되었다. 완전히 화가 풀린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농담을 건넬 정도는 되었다. "앗! 주인님이 처음 만났을 때의 동정 너드 상태로 돌아가 버렸어!" "지금은, 그냥 힘이 없어서 그래. 그리고 처음 만났을 때가 어때서 그렇지. 서큐버스?" 나는 싸가지 없이 솔직한 서큐버스의 볼을 쭈욱 잡아당기며 그녀를 응징했다. 그리고... 운디네. "운디네야." "뀨류류류류류류류류-" "그만 울고 나 좀 봐봐." 운디네는 지금 내 바지를 부여잡은 채 복숭아씨만한 눈물을 그렁그렁 흘리고 있다. 눈물을 하도 쏟아내다 보니 유체형의 몸이 확 쪼그라들었다. 나는 쓰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일단 치유 파동 좀 써 줄래? 오빠가 몸이 조금 쑤시네." 피와 흙먼지로 철갑칠이 된 손바닥을 보여주자. 그것을 본 운디네가 깜짝 놀라며 손을 뻗었다. [운디네가 치유파동을 사용했다.] 위잉- 위잉- 밝은 빛이 나의 몸을 휘감았다. 스킬을 사용하는 운디네는 조금 지친 얼굴. 오늘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스킬 사용이다. 당연히 지칠 수밖에 없다. 나는 욱신거리던 손바닥의 통증이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운디네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운디네야, 이 정도면 됐어." "(˚ ˃̣̣̥⌓˂̣̣̥ ) ( ˃̣̣̥⌓˂̣̣̥ ˚) (˚ ˃̣̣̥⌓˂̣̣̥ ) ( ˃̣̣̥⌓˂̣̣̥ ˚) " "얘가 갑자기 왜 이렇게 응석을 부릴까. 많이 놀랐나 보네." "뭐어~ 아직 어리니까요." 나와 서큐버스는 매미처럼 달라붙는 운디네를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근데 너도 아까는 이랬잖아." "크흠! 일단은 먹을 거부터 찾죠!" "아, 드라이어드가 저쪽에 먹을게 있다고 하더라." 길잡이는 드라이어드. 치료는 운디네. 전투는 서큐버스가 주도하는 생활이었다. 정말 완벽한 기둥서방 생활이군. 나는 속으로 만족하며 세 에로몬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그렇게 검은 숲 탐험이 시작되었다. 때때로 수풀에서 튀어나온 야생의 에로몬과 싸우기도 했다. 레벨 스케일링에 충실한 세상이여. 수풀에서는 저렙 에로몬이 마구마구 튀어나왔다. [픽시 : Lv.4] "삐?" [서큐버스가 최면술을 사용합니다.] [운디네가 치유파동을 사용합니다.] [드라이어드가 뿌리묶기를 사용합니다.] "삐이!!!" [이런. 픽시가 도망쳤다!] 일반적인 전투. 거의 자동사냥 수준이었다. 게임과는 다르게, 현실에서는 3:1의 다구리가 가능했다! "그래, 게임이 이상한 거였어. 왜 플레이어만 다구리를 못하냐고." 모처럼의 게임혼이 불타올랐다. 올라가는 경험치만 봐도 배가 불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드라이어드가 내 옷깃을 틱틱 잡아당기며 다음 목적지를 알려왔다. "!!!" "그래, 바로 앞에 있다고?" 우리는 사냥 대형으로 발기척을 줄이고 이동했다. 다시 고요해진 숲. 수풀을 헤치고 나아간 우리의 앞에는 작은 구덩이가 나타났다. 방금 막 만들어진 구덩이인 모양. 안쪽의 흙이 채 마르지 않은 상황이었다. "어? 저기 저거 에로몬 아니에요?" 서큐버스의 말마따나 구덩이의 가운데에는 에로몬 한 마리가 보였다. 그녀는 흙먼지가 가득 묻은 상태로 바닥에 나동그라진 상태였다.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했나. 모종의 이유로 인해 기절한 것으로 보였다. "좋아. 이 에로몬에게 길을 물어보자고." 나와 서큐버스는 쓰러진 에로몬을 보며 사악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에로몬의 정체를 확인한 나는 보기도 싫다는 듯 진저리를 치며 물러났다. 갑자기 PTSD가 쓰나미처럼 몰려왔기 때문이다. "아이 씨. 얘가 왜 여기에 있어." "응? 뭔데요? 뭔데요?" "!!!!!!!" 운디네도 얼굴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지만, 이걸 어떻게 안 놀라? 공터에 쓰러져 있는 것은 나를 괴롭혔던 하피 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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