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아니, 여기는 수풀이 아닌데? 주의 : 하피 출현 지역!
그렇게 시작된 대치 상황.
하피 퀸을 필두로, 뒤쪽에서 하나둘 하피들의 모습이 가까워졌다.
쓸 만한 것이 있나 싶어 가방을 뒤적거리는 가운데. 아이다가 두 손을 입가에 모은 채 내게 무언가를 소리치기 시작했다.
"오빠!!! @^@(%!$!&^!"
하지만 그녀의 소리는 바람에 뭉개져서 들리지 않았다.
대화가 도저히 통하지 않자 가슴을 두드리며 답답하다는 수신호를 보내는 아이다.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원기둥 모양의 은색 물체를 이리저리 흔들기 시작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요!!!"
소심한 아이다의 자신감을 불러일으키는 아이템이라.
밀려오는 바람 때문에 눈이 시렸지만. 나는 억지로 실눈을 뜨고 아이템의 정보를 확인했다.
그것은 눈이 크게 뜨일 정도로 훌륭한 옵션의 아이템이었다.
[에로몬 방지 스프레이 (소모)]
- 반짝반짝 빛이 나는 스프레이. 몸에 뿌리면 야생의 에로몬과 만나지 않는다.
오 세상에나.
저런 아이템이 있었어?
콩밥의 절망에 젖어 있다 희망을 발견한 나의 눈빛에 다시 생기가 돌아왔다.
"이! 거! 사! 용! 하! 세! 요!"
아이다는 투수가 공을 던지듯, 아이템을 던지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셋! 하면! 던져요!"
나는 두 팔을 머리 위로 둥글게 말아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아이다의 얼굴을 바라보는 나.
아이다가 입술을 크게 벌리고. 내 쪽을 향해 소리쳤다.
"하나!"
"둘!"
"세엣!"
9회 말 투아웃에 등장한 구원투수.
아이다 선수가 완벽한 오버핸드 자세로 팔을 휘둘렀다.
휘익- 소리를 내며 날아오는―
... 스프레이는 곧바로 거센 바람에 휩쓸려 뒤쪽으로 날아갔다.
"..."
"..."
그렇게 스프레이님은 가시고.
나와 아이다는 멍청한 얼굴로 동시에 뒤쪽을 바라봤다.
"시발."
하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만 나왔다.
내 모험은 여기까진가.
그래 뭐. 하피 무리에 둘러싸여서 착정 생활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콩밥은, 나무 열매를 위주로 먹도록 하자.
나는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벨트를 느슨하게 풀어놓았다.
[샐러맨더가 불꽃방울을 사용했다.]
파앙!
그때. 바람을 뚫고 들려오는 소리.
갑작스러운 굉음에 놀라서 바라보니. 아이다의 샐러맨더가 짚라인의 브레이크를 녹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아이다가 결연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제가! 구해! 드릴! 게요!"
저러다가 떨어지면 어쩌려고!?
누가 주인공 아니랄까 봐 오지랖도 참 넓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나는 안도 반 걱정 반의 눈빛으로 아이다를 바라봤다.
무언가 부품이 획- 하고 날아갔다.
짚라인의 안전장치가 풀리며 2호선의 짚라인의 속도가 올라갔다.
키이이이잉-
빨간 불꽃을 튕기며 앞서 나아가는 아이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반짝이는 것은 익숙한 아이템이다.
[에로몬 방지 스프레이 (소모)]
- 반짝반짝 빛이 나는 스프레이. 몸에 뿌리면 야생의 에로몬과 만나지 않는다.
"...하나 더 있었어?"
아이다의 등 뒤로 후광이 비쳤다.
금방이라도 던질 것처럼 손을 흔드는 그녀.
지금도 나와 아이다의 거리는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더 이상의 기회는 없겠지.
나는 퍼팩트 게임의 마지막 야구공을 받는 포수처럼 결연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다의 입술이 뻐끔거렸다.
조금은 먼 거리였지만. 한계까지 달아오른 집중력이 그 말의 뜻을 알아듣게 해 주었다.
= 하나.
= 둘.
"...셋!"
태양의 빛을 반사하여 별처럼 반짝거리며 날아오는 스프레이.
무척 눈이 부셨지만 꾸욱 참고 눈을 부릅떴다.
두 팔을 넓게 벌리며 골키퍼의 자세로 날아오는 스프레이를 응시.
고도의 집중력으로 인해 시간마저 천천히 흘렀다.
잡나? 못 잡나.
긴장되는 순간.
휘익- 하고 날아오던 스프레이가 손바닥에 착지.
나와 아이다는 두 팔을 번쩍 들어올리며 동시에 소리를 내질렀다.
"――――――――――――――!"
"그래, 됐어. 됐다고!!!"
시이발 그래, 이게 섹스지!
알몸으로 그랜절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나는 미치광이같이 웃으며 입을 크게 벌린 채 입가에 스프레이를 마구 칠해댔다.
극도로 흥분한 나의 입에서 아무 말이 마구잡이로 튀어나왔다.
"오, 신은 날 선택하셨어. 날 발할라로 데려가실 거야! 잘 있어라 닭장들아!!!"
[에로몬 방지 스프레이를 사용했다.]
[매혹적인향기가 발동.]
[아무래도 효과가 없는 듯하다.]
.
.
.
"댓?"
이게 무슨 알림창이지?
브레이크가 해체된 아이다가 따봉을 날리며 앞서 나아갔다.
그렇게 나는 혼자가 되었다.
벙찐 얼굴로 알림창을 바라보던 나는, 무심코 시선을 먼 곳으로 돌리다가.
"..."
"...어."
"..."
하피 무리와 아이 컨택트를 해 버리고 말았다.
이종족 차별 금지법에 의거. 정신을 차린 나는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닭장이라는 말은 농담이었어요. 아시죠?"
[하피 퀸 : Lv.16]
속성 : 바람 / 비행
종족 능력치 : A 개별 능력치 : B
특성 : [신속] [날카로운발톱]
기술 : [상승기류] [깃털사격] [깃털다듬기] [노래하기] [날개바람]
호감도 : -17 / 100
상세내용 확인은 ☆Click☆
좋아.
현재 하피 퀸의 호감도는 마이너스 17.
적어도, 내게 호의적인 입장은 아닌 듯하다.
흥분해서 내지른 막말의 업보가 이렇게나 깊다.
"잡아!!!"
[하피 퀸이 날개바람을 사용했다.]
[하피가 날개바람을 사용했다.]
.
.
.
[하피가 날개바람을 사용했다.]
휘이이이이-
하피들이 동시에 날개를 펄럭이자 짚라인에 역풍이 일어났다.
낡은 나룻배같은 소리를 내며 속도가 줄어드는 짚라인.
차라리 다른 에로몬들을 소환할까?
떨어지는 것을 각오하더라도 그러는 것이 좋지 않을까?
나의 머릿속이 굉장히 복잡해졌다.
"시발. 될 대로 되라지."
끼릭- 끼릭- 거세게 흔들리는 줄에 몸을 맡기며, 나는 가방에 있던 아이템을 무작정 집어던졌다.
[당신은 포획도구를 사용했다.]
[SM 플레이용 수갑 (강철 / 포획도구)]
"오. 당첨이네."
서큐버스와 사용하던 그것이다.
저거 맞으면 아프겠지?
거짓말 조금 보태서 주먹만 한 쇳덩어리가 휙-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날카로운 철제 수갑이 변신 합체 로봇트처럼 철컹거리며 풀리더니, 하피의 날개를... 날개를...
향해 날아가다가 쓰잘데기 없이 발목을 묶었다.
[당신은 포획에 실패했다!]
"아니 날개를 못 묶으면 소용이 없잖아."
"삐이!!!!!"
한쪽 발에 족쇄가 걸린 하피가 발목을 들어올리며 고함을 지르더니.
[하피의 호감도가 상승했다. -3 >>> 5]
"...좋아하고 있다?"
까마귀가 그렇다고 하던데.
반짝거리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이쪽 새나 저쪽 새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물론 내가 지닌 수갑보다 하피의 수가 많았기에 하등 쓸모없는 호감도 상승이었다.
"인가아아아안!!! 얌전히 우리의 씨받이가 되어라아!!!"
예비 남편에서 인간 씨받이로 호칭이 변했군.
일단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얌전히 선다면 가끔은 동굴 바깥으로 산책도 시켜 주겠다 삐이―!!!"
제기랄. 확실히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나를 노려보는 하피 군단.
그 수는 대략 스물.
정면승부로는 도저히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이다.
"평생 동굴에 묶어놓고 깃털의 부드러움을 알려주겠다 삐!!!"
게다가 그녀들에겐 인권이란 단어가 없는 듯하다. 그야말로 야만적인 에로몬다운 모습이다.
얼굴만 봐도 알겠다. 굉장히 화가 많이 난 것을.
이 짚라인이 멈추는 순간 '베드 엔딩 : 하피 퀸의 능욕 #1'을 찍게 되리라는 직감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니갔다.
...그건 그것대로 괜찮을지도 모르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지만 아무튼.
나는 일단 최대한 저항을 해 보기로 했다.
"운디네!"
"뽈록?"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는 운디네.
짚라인의 무게중심 때문에 다른 에로몬은 소환을 할 수 없는 상황.
언제라도 싸울 수 있다는 듯 앙증맞은 주먹을 꽈악 움켜쥔 상태로 운디네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수상한 액체를 내밀었다.
"이것 좀 마셔 줄래?"
[달콤한 발정제 (소모 / 포획도구)]
- 달콤한 맛과 향기가 나는 음료수. 마신 에로몬은 일정 확률로 매혹 상태 이상에 걸린다.
음료수를 받아 손에 든 운디네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루?' 하는 표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그래. 방법은 그것뿐이야."
이런 상황에서 믿음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도 소용없겠지.
약빨이 부족할 것 같아 굳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나는 운디네, 너만 믿는다!"
"!!!"
[효과는 굉장했다!]
[운디네가 달콤한 발정제를 사용했다.]
[운디네가 달콤한 발정제를 사용했다.]
[운디네가 달콤한 발정제를 사용했다.]
한 개. 두 개. 세 개.
운디네가 의욕이 넘치는 표정으로 결연하게 음료수를 들이켰다.
아이고 우리 운디네 잘도 마시네.
내가 박수를 치며 응원하는 와중에도 운디네의 목울대는 쉼 없이 넘어가는 중.
세 병을 모두 마신 운디네의 몸이 포도색으로 물들었다.
[운디네는 매혹에 걸렸다!]
운디네가 술에 취한 것처럼 몸을 비틀거렸다.
능력 없는 오빠가 미안해.
슬픈 눈망울로 머리를 쓰다듬자 운디네가 내 손에 머리를 비벼왔다.
나는 그런 운디네의 머리카락을 계속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손가락으로 하피 무리를 가리켰다.
"운디네. 치유파동!"
[운디네가 치유파동을 사용했다.]
그녀의 손끝에서 뿜어지는 희미한 빛무리.
저번까지 연습하던 스킬과 다른 점은, 그것의 색깔이 보라색이라는 점이다.
솔직히 인게임에선 구현이 안 되었던 설정이라 긴가 민가 했다.
"후- 설정집 읽기를 잘했구만."
고마와요. 남우위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팝콘을 준비했다.
[하피는 매혹에 걸렸다!]
[하피는 매혹에 걸렸다!]
"삐이!?"
몇몇 하피들이 술에 취한 주정뱅이처럼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포위 대형이 흐트러진 것을 확인.
하피 퀸이 경악하며 우리와 하피를 갈팡질팡 바라봤다.
"모두, 정신을 차려라 삐이!"
황급히 진형을 추스르려고 노력하지만 소용없는 일.
이게 공중에서 일어나는 추돌 사고보다 끔찍한 일이 또 없다.
"저 남자는 내 거다. 삐이이이이이!!!"
[하피가 깃털사격을 사용했다.]
원래 술에 취하면 애미애비도 못 알아보는 법이다.
서서히 분위기가 달아오르더니. 야만적인 야생의 하피들은 급기야 서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서로를 할퀴고 물고 때리고.
흰 깃털들이 피로 붉게 물들어 이리저리 흩날렸다.
그러던 중 비틀거리던 하피 하나가 케이블의 위쪽으로 떨어졌는데.
와이어에 부하가 걸리며. 내가 앉아 있던 짚라인이 위아래로 거세게 흔들렸다.
오매나.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네.
나는 식겁하며 의자 손잡이를 꽈악 움켜쥐고 하피 퀸에게 항의했다.
"조심하라고! 이러면 정액이고 나발이고 없어?"
"미, 미안하다 삐!"
그 순간.
쇠로 만들어진 와이어에서 팅- 하고 기타줄 튕기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굉장히 들려서는 안 될 것 같은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어?"
"삐이?"
"삑?"
"뽁뽁!"
[하피의 날카로운발톱이 발동했다.]
"잠까-"
말을 이어 나갈 새도 없이 중력의 가속도가 짚라인을 덮쳤다.
나와 운디네는 늘어진 비명만을 남긴 채 아래로 아래로 하염없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