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양주를 향해서
1.
처음에는 누워있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신지하의 해킹이 생각보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녀는 얼마나 걸릴 것 같다든가 다음에 오면 결과를 알려주겠다든가 하는 말없이 컴퓨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동그란 안경까지 꺼내 쓰더니 무아지경으로 모니터만 보고 있으니 말을 걸기도 뭐했다.
'시력이 안 좋은가……?'
자세히 보니 안경알에 왜곡이 없다. 도수가 없고 알이 노란 걸로 보아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인 모양이었다.
'저런 건 안 챙길 것 같은데 생각보다 건강에도 신경 쓰는 타입이구나…….'
이후로도 1시간이 넘도록 이어지는 해킹 시도.
타닥- 타다닥-
가끔씩 울리는 키보드 소리를 제외하면 아주 조용하다.
시간은 점점 흘러 늦은 밤이 되었고, 나는 결국 신지하의 침대에 냅다 누웠다. 방주인이 누워도 된다고 했으니 괜찮은 거겠지.
'좋은 냄새…….'
신지하에게서 느껴졌던 포근한 체취가 침대 전체에 가득하다. 그걸 맡으며 누워있으니 잠이 솔솔 쏟아져서 나는 그만 잠들어버렸다.
2.
"으음……."
눈을 감은 채로 몸을 뒤척였다.
깊이 잠들었는지 몸이 상당히 개운했으나 푹신한 이불의 감촉에 조금만 더 뒹굴고 싶었다.
내 옆에 나란히 누워있을 세레나를 찾아서 팔을 뻗는다.
"……."
손바닥에 부드러운 살결이 잡혔는데 반응이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잠들어 있는 세레나가 귀신같이 반응하며 나를 꽉 껴안아오는데…….
나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별 고민 없이 품에 안았다.
"……!"
세레나가 품 안에서 흠칫 떠는 것이 느껴진다. 아무래도 악몽을 꾸는 모양이었다.
진정하라는 의미에서 옷 안으로 손을 넣어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이렇게 몇 분간 쓰다듬어 주면 세레나는 다시 편안한 표정이 되어서 새근새근 잠들곤 했다.
그러고 나면 나는 항상 손을 더 위로 올려서 풍만한 가슴을 가지고 노는데…….
"흐읏……!"
뭔가 이상하다.
손에 잡히는 가슴이 명백하게 빈약했다.
세레나보다 작은 건 물론이고, 이건 시엘이나 백선아보다도 더 작다. 요즘 내가 주물러 본 가슴들 중에서는 가장 빈약한 가슴이었다.
나는 확실한 확인을 위해 한 번 더 주물러봤다.
"히으으읏……♡"
품 안에서 새어 나오는 신음 소리.
이건…… 신지하의 목소리였다.
그제야 생각났다. 내가 신지하의 방에서 잠들었다는 사실이.
'해킹을 끝내고 자기도 침대로 들어와서 잠든 건가? 방에 잘만 한 곳이라곤 침대 하나뿐이니까…….'
큰일 났다. 안 그래도 소심하고 친해지기 어려운 신지하인데 실수로 껴안고 가슴을 주물러버렸다.
어쩐지 작다 싶었다. 전에 상태창으로 확인했던 신체 스펙이 161cm에 42kg이었던가…?
그보다 만약 신지하가 깨어있었다면 앞으로 일주일 동안은 말도 못 붙여볼 만큼 어색한 사이가 될 것이 뻔했다.
"……."
잠시간 숨을 죽이고 반응이 나오길 기다렸지만, 아무래도 신지하는 잠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진짜…… 천만다행이다.
나는 은근슬쩍 신지하의 옷 속에서 손을 빼낸 후에 껴안았던 팔을 풀고 다시 자는 척을 했다.
잠은 이미 충분히 잤지만 그녀가 깨어날 때까지 이대로 선잠이라도 잘 생각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약 30분 정도 기다리니 옆에서 기지개를 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흐으음……!"
잠에서 깬 신지하는 내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대장님. 대장님, 일어나세요. 벌써 점심시간이에요."
나는 혼신의 연기를 다해서 가슴 따위는 안 주물렀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기상했다.
"어, 어…? 벌써……?"
신지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중얼거렸다.
"잠꾸러기……."
일어나서 본 그녀의 얼굴은 약간의 붉은색으로 물들어있었다.
3.
세수하고 이불을 갠 후에 우리는 다시 컴퓨터 앞에 모였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내가 물어보자 신지하는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못했어요. 해킹."
"아……."
나는 탄식을 흘렸다.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된다면 사실상 내용물을 볼 방법이 사라진 셈이었다.
천재 해커라고 불리는 신지하가 실패했는데 어디 가서 이 보안을 해제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다행히도 그녀의 대답은 아직 끝나지 않은 거였다.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보안 방식들을 공격하는 16가지의 해킹 프로그램들을 모두 사용해 봤지만 전부 실패했어요. 그건 이 SSD의 보안 프로그램이 독자적으로 개발된 형식을 갖고 있다는 뜻이에요."
"……."
방심하고 있던 나는 제대로 알아듣질 못했다. 그러자 신지하는 간단하게 바꿔서 다시 말해주었다.
"문구멍에 갖고 있던 열쇠 16개를 꽂아봤는데 다 안 맞아요."
"아하."
진작 그렇게 말해주지. 쉬운 거였잖아.
"그럼 못 여는 거야?"
"아뇨. 문에 맞는 열쇠를 지금부터 새로 만들어야 해요. 그런데…… 얼마나 오래 걸릴지 알 수 없어요."
"오오……!"
오래 걸리는 게 대수냐? 못 연다고 생각했었는데, 열수만 있다면 감사한 일이었다.
"아무리 오래 걸리더라도 상관없어. 그런데 혹시 대충이라도 기간을 알 수 있어?"
"음……. 빠르면 내일 당장 열 수도 있는 거고, 정말 견고한 프로그램이라면 몇 개월이 걸릴 수도 있어요. 어쩌면 그 이상도……."
몇 개월 이상? 그렇다면 그 오랜 기간 동안 신지하가 여기에 매달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아……. 이걸 풀어 달라고 하는 건 너무 무리한 부탁인가?"
말하면서도 나는 내심 해주길 바랐다. 새로운 리얼돌에 대한 정보는 내게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것이니까.
다행히도 신지하는 수줍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니요. 저는 이런 거 푸는 걸 좋아해서 지금까지 해왔던 거예요. 맡겨 주시면 계속 시도해 볼게요."
"지하야……! 고마워!"
나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붕붕 흔들었다.
"핫…!"
아무리 좋아서 해주는 일이라고 해도, 내 쪽에서도 뭔가 감사를 표할 만한 선물 같은 것이 없을지 고민해 봐야겠다.
이렇게 신지하에게 해킹을 맡기는 것으로 MHC에서 가져온 SSD 문제는 반쯤 해결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제 진득하게 기다리는 것뿐이다.
4.
좀비 아포칼립스 세상이 된 지도 이제 벌써 한 달이 흘렀다. 최근 D마트에는 활기찬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희망의 땅으로 인해 안전을 보장받으며, 수도가 끊겨도 1층에 지정해둔 수원지로 인해 물 걱정은 없는 이곳.
사실상 이런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땅이 아닐까 싶은 이곳 D마트에도 걱정거리는 있었다.
바로 잉여인력이 너무 많다는 점.
좀비와 싸우는 건 능력자들이 다 한다. 능력이 없는 일반인들이 좀비와 싸우는 건 너무나도 위험하니까.
그렇다면 일반인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1. 매 끼니를 책임져 주시는 급식대의 요리사분들.
2. 주기적으로 마트 시설들을 점검하며 유지 보수를 해주시는 소수의 기술자분들.
이들을 제외한 수백 명의 평범한 일반인들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즉, 전부 잉여인력이었다.
그게 뭐가 문제냐? 아주 큰 문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자기 자신이 아무런 쓸모도 없는 존재라는 사실은 정신적으로 커다란 데미지를 준다.
백지훈이 어떤 일이든 먼저 나서서 하고, 겨우 찾아낸 대타라는 역할에 집착했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때문에 D마트의 대표인 나는 이 인력들을 어디에 사용할 수 있을지 고심해왔다.
그런데 이 문제도 결국엔 해결되었다. 역시나 만능, 희망의 땅에 의해서.
나는 마트 옥상에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흐읏……차!"
"후우……."
"새참 먹으려면 아직 멀었냐?"
"뭔 놈의 새참을 10분마다 찾아?"
깡—!
"악! 여기—! 겁나 커다란 돌덩이 나왔다—!"
"네, 갑니다—!"
바깥에는 건장한 남성들이 저마다 괭이나 삽을 들고 희망의 땅 안쪽의 토지를 고르고 있었다.
그들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힘들어했으나 모두들 얼굴에 활력이 가득했다.
일명 개간 작업. 척박한 땅을 일구어 농사에 쓸 수 있는 논밭으로 바꾸는 일이었다.
물론, 잘 포장되어 있던 아스팔트 바닥을 박살 내고 희망의 땅 바깥으로 옮기는 작업은 세레나와 이진아가 맡았다.
이진아는 흙이나 돌 같은 것들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대지 마법 비슷한 능력을 사용하기에 이런 일에는 제격이었다.
"흐읍—!"
이진아가 기합과 함께 손을 뻗자 거대한 돌덩이가 뽑혀 나왔다.
쿠르르르릉—!
"우오오오—!"
"언제 봐도 대단하다니까……."
"진아 씨 없었으면 저 돌 어떻게 치웠냐?"
"줄로 묶어서 어깨에 메고 다 같이 끌어야지 뭐."
"상상만 해도 어깨 박살 날 것 같네."
콰과광—!
"휘유우우우— 나이스!"
"수고하셨어요, 진아 씨!"
그야말로 화기애애한 작업 현장이었다.
그래서……. 나는 좀비를 잡고 있는 것도 아니고, 땅 고르는 걸 돕는 것도 아니고, 무엇을 하느냐?
내게는 아주 중요한 임무가 있었다.
희망의 땅의 생장 속도 증진 효과는 농작물 뿐만 아니라 가축에게도 적용된다.
즉, 맛있는 생고기를 얻기 위해서 우리는 가축을 기를 필요가 있었고, 그러기 위해선 도심 외곽의 축산 농가를 찾아서 가축을 데려와야 했다.
좀비들은 오로지 살아있는 인간만 찾아다니며 공격하기 때문에 가축들은 굶어죽지만 않았다면 아직까지 살아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현재, 나는 세레나와 시엘과 함께 마트 옥상에서 가축들을 공수해오러 출발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준비됐어, 시엘?"
"네, 주인님."
"마력은?"
내 뻔뻔한 질문에 시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자기 배를 어루만졌다.
"……."
그녀는 임신 3개월 차 임산부처럼 아랫배가 볼록하게 나와있었다. 지금 이 비행을 위해서 내가 오늘 아침에 정액을 꽉꽉 채워 넣었으니까.
그야말로 정액 만땅이었다.
"……그 정도면 충분해 보이네."
"그렇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엘이 배시시 웃었다.
옆에선 세레나가 두 팔에 힘을 불끈 주고 있었다.
"저도 준비 완료예요! 주인님 정액까지 있으면 더 좋겠지만……."
"오늘은 참아, 세레나. 너는 배가 빵빵하면 움직이기 불편하잖아."
"네에……."
좋아. 모든 것이 문제없었다.
나와 세레나는 엄마에게 과자 사달라고 조르는 철없는 아이처럼 시엘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그럼, 출발해 볼까?"
"좋아요!"
"고도 높일게요. 떨어지지 않게 꽉 잡아주세요."
후웅- 후웅- 후웅-
시엘이 날갯짓을 시작하면서 D마트 옥상의 먼지들을 사방으로 날려보냈다.
풍압이 점점 강해지면서 우리들의 발이 바닥에서 떨어졌다.
후아앙— 후아앙— 후아앙—!
고도가 급격하게 상승하고, 밑에 보이는 사람들이 점점 작아진다.
"우와아아아아—!"
신나서 소리 지르는 세레나.
이번 목적지는 경기도 양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