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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천재 해커 신지하


1. 새벽에 시작된 섹스는 결국 저녁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시엘은 피학 성향을 자극할 때마다 아래를 쫀득하게 조여왔고, 그 느낌이 좋아서 나는 이곳저곳을 강하게 주물러주었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몸은 구석구석까지 내 손바닥 자국이 붉게 남아버렸다. 새하얀 도화지에 색칠놀이를 하는 기분이라 꽤나 재밌었다. 누군가 이 손자국들을 본다면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결백했다. 중간중간 좀 자제해 보려 할 때마다 시엘이 "조금만 더 해주세요오……♡" 하고 응석 부렸으니까. 이런 시엘과는 반대로, 세레나는 역시 맞는 것보단 러브러브한 섹스를 좋아했다. 안에 싸줄 때마다 좋아서 못 참겠다는 듯 다리를 꽉 감싸서 내 엉덩이를 꾹꾹 눌러온다. 그 열렬한 포옹을 받고 있으면 열심히 싸라고 응원해 주는 것 같아서 더 기분 좋게 쌀 수 있다. "흐음……." 아직 초저녁이지만 세레나와 시엘은 벌써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이대로 하루를 끝내기도 아쉬우니 나는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나씩 끝내기로 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2. 나는 컴퓨터용 저장 장치인 SSD 5개를 들고 D마트의 복도를 걸었다. 이것들은 모두 파주 MHC(Make Human Company) 창고에 있는 컴퓨터에서 뽑아온 것들이었다. 내게는 능력을 사용하기 위한 고퀄리티의 리얼돌들이 더욱더 필요하다. 하지만 국내 MHC 창고에 있던 6개의 리얼돌들은 모두 박살 나버렸다. 다행히 특별 검수 대상으로 따로 보관되어 있었던 시엘만은 건져서 사람으로 만들 수 있었지만, 더 이상 리얼돌을 구할 데가 없으니 아쉬운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미 배송이 완료되었거나, 배송 중이었던 리얼돌들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이 좀비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리얼돌의 소유주는 리얼돌을 버리고 대피소로 떠났거나 이미 죽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설마 밖에 좀비가 드글거리는데 실제 사람과 1:1 비율로 만들어진 리얼돌을 들고 대피소로 향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즉, 그들의 주소를 찾아서 방문하면 주인 없는 리얼돌이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이 아주 높은 것이다. 이 생각으로 나는 MHC의 창고에 있는 모든 컴퓨터를 켜봤었지만……. '전부 직원 ID가 없으면 정보에 접근할 수 없는 보안 프로그램이 깔려 있었지.' 그래서 나는 아쉬운 대로 컴퓨터들의 보조 저장 장치, SSD만 싹 빼서 가져왔다. 혹시 해킹을 할 줄 아는 사람한테 맡기면 정보를 빼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우리 D마트 대피소에는 해킹을 할 줄 안다고 했던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그건 바로……. 똑똑똑. 방문을 두드리고 잠시 기다리자 안에서 소심한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 누구세요……?" "나야. 김도하." "대장님!? 가, 갑자기 무슨 일로……." 철컥. 열린 문 사이로 드러난 것은, 보라색 머리칼에 검은색 일색의 추리닝을 입은 여자. 신지하였다. 3. 신지하와 나는 첫 만남이 상당히 인상적인 관계였다. 나를 D마트를 지배하는 최철남 휘하의 능력자로 오인했던 그녀는 갑작스럽게 기습을 해왔었다. 다행히 세레나가 막아준 덕분에 죽지는 않았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일격이었다. 세레나나 시엘이 없어도 상당히 강한 축에 속하는 내가 속절없이 당할 뻔했던 이유. 그건 바로 신지하의 특별한 능력 때문이었다. D급 특수 능력, [그림자 걷기] 한 마디로 그림자에 동화되는 능력이었는데, 그림자가 짙으면 짙을수록 능력이 더 강화된다. 하필 그때 나는 적들을 습격하겠다고 마트를 정전시켜서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있었으니, 그야말로 신지하의 먹잇감이 되기에 딱 알맞은 상황이었다. 물론 그 뒤로는 오해가 풀려서 신지하는 만날 때마다 사과를 반복해왔고, 우리는 같이 토벌대에서 활동하면서 점점 유대를 쌓아왔다. 신지하는 상당히 소심한 성격이라서 처음에 말 붙이는데 애먹었지만, 지금은 꽤 친하다고 자부한다. 아마 그녀가 먼저 대화를 틀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한 명이 나일 것이다. "대장님……?" 신지하가 보라색 눈동자로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그림자 걷기] 능력을 각성했을 때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이 모두 보라색으로 변해버렸다고 했었지…. 나는 거두절미하고 일단 방 안으로 들어갔다. "실례할게." "아앗……!" 철컥. 신지하가 문을 닫고는 재빨리 뒤따라왔다. "무, 무슨 일이에요, 대장님…!?" 방 안을 둘러보자, 역시나. PC가 구비되어 있었다. 그것도 2대나. 본체만 2대고 모니터는 4대였다. 상당히 화려한 세팅이다. 나는 신지하의 눈앞에 SSD를 펼쳐서 보여줬다. "혹시 부탁 좀 하나 해도 될까?" 그녀는 SSD를 스윽 훑어보더니 우물쭈물 대답했다.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상당히 자신감 없어 보이는 대답이지만…… 나는 믿고 있었다. 내가 부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선택지가 신지하라는 것을. 4. 처음 그 얘기를 들은 것은 백선아에게서였다. 섹스를 마치고 서로 몸을 쓰다듬어 주며 필로우 토크를 하던 중에 문득 신지하에 대한 얘기가 나왔었다. "아, 오빠 그거 알고 있어요? 지하에 대한 거." "지하? 신지하 말하는 거야? 걔가 왜?" "처음에는 머리 색이랑 눈동자 색이 변해서 못 알아봤는데, 우리 학교에 있던 신지하가 맞더라고요." "너네 학교면…… 서울대학교?" "네." 백선아는 내 허벅지를 쓰다듬으면서 말을 이었다. "걔 처음 입학할 때부터 유명했어요. 천재 해커가 올해 컴퓨터공학부 신입생으로 들어왔다고." "천재 해커? 내가 아는 신지하 말하는 거 맞아?" 놀라서 되묻자 백선아는 내 엉덩이를 찰싹 때리면서 대답했다. "그렇다니까요." 물론 나도 맞고만 있는 성격은 아니라서 백선아의 엉덩이를 세게 주물럭거렸다. "흐읏…♡ 그, 그러니까…, 해커들의 세계에는 보안 취약점 현상금이라는 게 있거든요. 일명 버그 바운티. 알고 있었어요?" "아니." "보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대 기업이나 단체들이 현상금을 내거는 거예요. 우리 보안 시스템이 갖고 있는 치명적인 문제점을 찾아내서 알려주면 보상금을 주겠다고." "아하……." 처음 듣는 내용이라 신기하게 들렸다. 보안 취약점 현상금이라? 꼭 판타지 소설에나 등장하는 모험가 길드 의뢰 같은 느낌이라 재밌다. "그런데 신지하가 그쪽 분야에서 엄청 유명했어요. 중학생의 나이에 세계적인 거대 IT기업을 상대로 치명적인 보안 취약점을 제보해서 100만 달러를 타간 천재 해커로……." "뭐, 뭐? 100만 달러!?" "네. 한화로 약 12억 정도 하는 금액이죠." "오우……." 취약점 하나에 12억? 내가 갖고 있던 금전 감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원래 그렇게 통 크게 주는 거야…?" "당연히 아니죠. 신지하가 찾아낸 취약점이 그만큼 치명적이었대요. 악의적인 크래커에게 먼저 발견되었을 경우 서비스 전체가 마비됐을 수도 있을 만큼." 맙소사. 그런걸 겨우 중학생 여자애가 발견해냈다고? "천재잖아……." 내 감탄에 백선아도 신나서 대답했다. "그쵸? 신기하죠? 저도 신지하가 우리 학교에 입학했을 때 처음 알게 된 거예요. 학교 전체가 떠들썩했거든요." "그럴 만도 하네." 그 이후, 나는 D마트 안에서 우연히 신지하와 마주쳤을 때 백선아와 했던 대화가 떠올라서 말을 걸어봤다. "지하야. 너 엄청 실력 있는 해커라며?" "네? 누가 그래요…?" "선아가 그러던데. 학교에서 유명했다고." "아……." 손을 꼼지락거리던 신지하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보안이나 암호화 관련해서는…… 잘해요." "오오……!" 매사에 자신감 없어 보이는 신지하가 스스로 잘한다고 말할 정도라니. 나는 신나서 물어봤다. "그럼 앞으로 컴퓨터 관련해서 모르는 거 있으면 너한테 찾아가도 돼?" "…네." 신지하는 고개를 돌리면서 자그마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제 방으로 오시면 돼요." 5. …이런 대화를 나누었던 것이 불과 얼마 전. 설마 나도 이렇게나 빠르게 부탁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니까…… 이 SSD들에 암호가 걸려 있는데 내부 데이터를 읽어보고 싶다는 말씀이신 거죠?" "맞아." "어디서 가져오신 건데요?" 나는 잠시 고민했다. 리얼돌 회사 창고 컴퓨터에서 뽑아왔다고 말해야 하나? "……비밀." "……일단 해볼게요." 신지하는 컴퓨터 두 대를 동시에 부팅 시키며 SSD를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 컴퓨터들은 서로 용도가 다른 거야?" "네. 외부 망에 접속하는 용도랑 내부 망에서만 사용하는 용도로 나눠 놓은 거예요. 외부 망에 접속하는 쪽은 아무래도 공격에 더 취약해지거든요. "……." 내가 벙어리가 되어 가만히 서있자 신지하는 간단하게 바꿔서 다시 말해주었다. "하나는 인터넷 연결되고 다른 하나는 안돼요." "아하." 진작 그렇게 말해주지. 쉬운 거였잖아. 신지하는 본체 외부로 빼놓은 SSD 연결 포트에 내가 가져온 것들 중 하나를 꽂았다. 외부 망에 접속하는 용도의 컴퓨터였다. 모니터 화면에 관리자 권한을 요구하는 창이 떠올랐다. 그러자 신지하는 책상에 있는 자그마한 서랍을 열었다. 드르륵- 거기에는 비슷하게 생긴 USB가 십수 개 들어있었다. "와…… 이게 다 뭐야?" "예전에 만들어둔 해킹 프로그램들이에요. 일단 이것들로 하나씩 시도해 보고 다 실패하면 취약점을 찾아서 새로 만들어봐야 해요." "와아……." 모니터 화면에 복잡한 코드들이 어지럽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신지하는 중간중간 y나 n을 칠 뿐, 별로 건드리는 것은 없었다. 아마 미리 만들어둔 프로그램을 실행시킬 뿐이라 그런 것 같다. 신지하의 방은 손님 올 일이 없어서 그런지 의자가 하나뿐이었다. 그녀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니 나는 등받이 뒤에 서서 허리를 굽히고 모니터를 구경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가만히 서있자니……. "……." 내 머리 아래에 있는 신지하의 정수리. 거기서 좋은 향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마치 포도 향 같은……. 이거 무슨 샴푸지? "흐음……." 내가 조용히 향을 감별하고 있자 그걸 눈치챈 신지하가 화들짝 놀라선 두 손으로 정수리를 가렸다. "가, 갑자기 왜 냄새를 맡으시는 거예요……!" "아니, 좋은 향기가 나길래……. 샴푸 뭐 써?" "모, 몰라요. 여기 서있지 마시고, 저, 저기……." 신지하가 손가락으로 침대를 가리켰다. 그녀의 취향인지 침대 커버부터 이불까지 온통 그레이 계열인 침대였다. 아마 침대만 보고 맞추라고 하면 남자 방인 줄 알 것 같다. "저기 가서 앉아 계세요. ……힘들면 누워 계셔도 괜찮고요." "그래? 고맙다." 나는 사양하지 않고 침대에 가서 앉았다. 아무래도 해킹하고 있는데 옆에서 어슬렁거리면 방해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침대에 앉으니 아까 맡았던 그 향이 또 올라오기 시작했다. 킁킁……. 이거 샴푸 향이 아니었던 건가? 그럼 설마, 이게 신지하의 체취? "왜, 왜 침대에서도 냄새 맡는 거예요오……!!" 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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