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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D마트 대피소의 일상 (1)


1. 새벽에 일어난 D마트 동시습격사건은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신지하는 옥상으로 침입해서 위에서부터 적들을 죽이며 내려오는 길이었다. 그러다가 2층과 3층을 정리하고 올라온 나와 만났고, 나를 최철남 쪽의 능력자로 착각하고 공격했다. 결국은 세레나에게 제압되었지만 다시 생각해 봐도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신지하는 눈물을 펑펑 흘리며 사죄를 해왔다. "김도하 님……!" "아, 신지하 씨? 지훈이한테 말씀 들었습니다." 나는 놀랍게도 천재 프로게이머이자 대한민국의 국민 처남인 백지훈을 이제 '지훈이'라고 부른다. "저, 정말 죄송해요……! 도하 님은 최철남을 처치해 주신 것도 모자라 단 2명이서 대피소 사람들을 구출해 내기 위해서 20명의 능력자들에게 싸움을 건 영웅이신데, 제가 그것도 모르고……!" "……." 너무 추켜세워줘서 언뜻 비꼬는 것처럼도 들렸다. 내가 심성이 꼬였나? 그러나 그녀는 완전히 진심인 것 같았다. 눈물 젖은 얼굴로 연신 고개를 꾸벅거리는데 기다란 보라색 머리카락이 출렁이는 것이 눈에 띄었다. 머리색은 따로 염색한 것이 아니라 능력을 각성한 이후로 갑자기 변해버렸다고 한다. 뭔가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짙은 보라색이었다. "감히 저따위가 도하 님에게 해를 입히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사고가 났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정말 거듭 사죄드립니다, 도하 님. 정말 죄송해요……!!" "아, 아. 괜찮습니다. 뚝 그치세요." 내가 사과를 받아주자 신지하의 머리가 조심스럽게 올라왔다. 이제서야 제대로 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백선아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예뻤다. 백선아가 청순하게 예쁘다면 얘는 귀엽게 예쁜 느낌? 머리도 엄청 작은데 선이 얇은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하게 들어찬 것이 인형 같은 여자였다. 아, 리얼돌 같다는 의미는 아니다. 신지하는 내 눈치를 살피면서 인형 같은 입을 열었다. "호, 혹시…… 제가 뭔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은 없을까요? 정말 뭐든지 편하게 말씀해 주시면 좋겠어요……. 당장 지금이 아니라도, 언제든지요……." "오, 그러면… 상태창 좀 보여줄 수 있어요? 지하 씨의 능력이 궁금해서요. D급이라고 들었거든요." "아, 네. 그, 레나 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상태창." 그녀는 상태창을 띄워서 허공에 터치를 몇 번 했다. 그러자 내 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신지하' 님이 상태창을 공유했습니다.] [수락 / 거절] 나는 바로 수락을 터치했다. 띠링-! [상태창] 이름 : 신지하 나이 : 20 신장 : 161cm 체중 : 42kg 근력 : D+ 내구 : E- 체력 : E 마력 : D+ 종합 능력치 평가 : D- 특성 : [날렵한 몸놀림 : E+] 특수 능력 : [그림자 걷기 : D] [날렵한 몸놀림] 특성 평가 : E+ 유연하고 가벼운 신체와 더불어 뛰어난 운동신경은 유사시에 평소보다 날렵한 움직임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근력과 체력에 보정 능력치를 받고 공격속도와 이동속도가 빨라집니다. ※ 특성으로 인해 얻은 보정 능력치는 상태창에 수치로 반영되지 않습니다. [그림자 걷기] 능력 평가 : D 그림자(주변에 비해 상대적으로 빛이 적은 공간)가 있는 곳으로 숨을 수 있습니다. 그림자 걷기를 사용하는 동안 사용자는 모든 종류의 기척이 한계까지 사라지고 그림자에 동화되어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빛이 없는 짙은 그림자일수록 그림자 걷기의 효과가 강화됩니다. "와…… 지하 씨, 엄청난 능력인데요?" "아, 아니에요……." "아니긴요. 밤만 되면 적수가 없겠어요." 말하고 나니까 뭔가 성희롱 같다. "그, 레나 님한테 한 번에 붙잡혔는데요……." "아." 신지하는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침울해 보이는 모습이다. 어쩌다 보니 빈말을 한 사람처럼 되어버렸네. "레나는 신경 쓰지 마세요. 걔는 규격 외로 강한 녀석이라, 졌다고 침울할 필요 없어요." "음, 네, 네……." "……." 어색하다. 딱히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신지하가 그리 사교적인 성격도 아닌 듯하고. 나는 악수나 하자는 의미로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같은 대피소에서 지낼 텐데. 잘 부탁해요, 지하 씨." "앗, 넵! 잘 부탁드립니다, 김도하 님!" 신지하는 내 오른손을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받았다. "그냥 편하게 도하 씨라고 불러요. 도하 오빠나." "아…… 그러면, 도하 씨……!"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싫은 건 아닌 듯한데, 진짜 낯을 엄청 가리는구나. 그래서 그림자와 관련된 능력을 각성했나? 뭐…… 앞으로 또 친해질 기회가 있을 것이다. 2. "여어, 지훈아." 마트를 지배하던 능력자들을 깡그리 청소한 지도 벌써 7일째. 7일 전에 백지훈과 인사를 나눈 뒤로 지훈이가 먼저 내게 형 동생으로 지내자고 제안해왔다. 나는 당연히 냉큼 고개를 끄덕였고, 그 뒤로는 지훈이를 만날 때마다 이렇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여어, 지훈아.' 이 얼마나 좋은 울림인가? 만년 다딱이(레전드 아레나의 랭크 티어, 다이아몬드)인 내가 세계 최고의 천재 프로게이머의 친한 형이 되다니! 비록 지금 환경이 게임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점은 좀 아쉽지만 말이다. "어, 형님! 오셨습니까?" 지훈이는 밝게 웃으면서 내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캬아! 저 잘생긴 얼굴 좀 봐라. 백지훈한테 왜 여성 팬이 많은지 궁금하다면 그냥 얼굴을 보면 된다. 얼굴이 개연성이다. 지훈이는 내가 인사해오는 것이 귀찮을 법도 한데 매번 해맑게 웃으며 받아줬다. 진짜 착한 녀석이다! "청소는 좀 어때, 힘들진 않아?" "에이. 형님이 나가서 목숨 걸고 좀비들 잡는 거에 비하면 저는 노는 거죠. 청소가 뭐가 힘들어요?" 백지훈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넉살좋게 대답했다. 겁나 힘들어 보이는데. 7일 전, 마트는 1층에 커다랗게 피운 불과 스프링클러 때문에 온통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아침이 되자마자 대피소의 사람들은 가장 먼저 청소를 시작했다. 백선아의 주도 하에 5층에서부터. 1000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열심히 청소했기에 마트는 빠르게 정리되어갔다. 그리고 7일째가 되는 오늘, 드디어 1층 청소까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내가 맨날 너 훔쳐보는데 제일 먼저 나와서 제일 늦게까지 청소하더라. 좀 쉬면서 해, 지훈아. 그러다 쓰러진다." "하하하하. 이 정도로 쓰러질 약골이면 더 혹사시켜서 체력 좀 길러야죠! 저는 괜찮아요, 형님." "너가 정 그렇다면 뭐…… 쓰러지면 내가 간병해 줄게. 대신 누워서 월드 챔피언십 우승했던 썰 좀 풀어주라." "네? 푸하하하하! 형님 진짜……!" 백지훈과 웃고 떠들고 있는데 옆에서 백선아가 튀어나왔다. "둘이 뭐해요? 엄청 재밌어 보이네. 나도 껴줘, 지훈아." 스윽. 백선아가 내 팔에 팔짱을 껴왔다. C컵 정도 되어 보이는 말랑말랑한 가슴 사이에 팔꿈치가 끼어버렸다. "……!?" 남동생 앞에서 무슨 짓을……!? 나는 재빨리 백지훈의 표정을 살폈으나 녀석은 여전히 구김살 없이 웃고 있었다. 분명히 백선아가 노골적으로 스킨십 해오는 것을 봤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나 인정받은 거야, 처남……?' 처남은 오히려 자기 누나한테 뭐라고 했다. "누나, 형님 좀 편하게 쉬도록 놔둬라. 큰일 하시는데 귀찮게 하지 좀 말고." "뭐? 내가 뭘!? ……혹시 제가 귀찮아요, 도하 오빠?" 백선아는 거절당할까 두려워하는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하하, 그럴 리가." 큰일 났다. 귀찮은 게 문제가 아니고 발기할 것 같았다. 백선아는 요즘 부쩍 스킨십이 많아져서 내가 쉬고 있으면 이렇게 찾아와서 애교를 부렸다. 이건 내가 좋아서 이러는 걸까, 아니면 가족을 구해줬다는 부채감 때문에 이러는 걸까? 후자라면 솔직히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내겐 이미 세레나가 있으니까. 여자가 더 있으면 나쁠 건 없지만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다. 이렇게 딴 생각을 하면서 필사적으로 발기를 억누르고 있는데, 뒤에서 나를 부르는 또 다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장님." "응?" "아……." 그 목소리를 듣고 백선아가 조심스럽게 내 팔을 놓아주었다. 휴. 간신히 반쯤 발기된 상태에서 멈췄다. 20cm쯤 되는 자지가 선 채로 텐트를 친다면 정말 대참사였다. "토벌 대원 7명 모두 오후 토벌 준비를 마쳤습니다. 언제든지 출발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내게 보고를 해온 것은 이진아라는 여자였다. 백지훈과 함께 D마트를 습격했던 8인의 특공대 중 한 명, 능력자다. 그녀는 내가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음에도 나의 부관 역할을 자처하고 있었다. 그래서 현재 능력자들의 대장 역할을 맡은 내게 능력자들과 관련된 사항들을 이렇게 일일이 보고해온다. 솔직히 이진아가 있어서 편하긴 했다. "아, 그래요? 10분 후에 출발하죠. 집합장소는 마트 정문으로." "네. 다른 대원들한테도 전파하겠습니다." 이진아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물러났다. "……잘 다녀오세요, 도하 오빠. 다치지 않게 조심해요." "형님. 언제나 감사합니다. 형님이랑 토벌대원 분들 덕분에 좀비 걱정 없이 편하게 청소해요. 오늘도 고생하십시오!" "응, 다녀올게 선아야. 지훈이 너도 고생해. 진짜 쓰러질 때까지 청소하지는 말고!" "……." 백지훈은 대답 없이 웃었다. 나는 마트 정문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지난 7일간, 사람들이 마트를 청소하는 동안 나와 세레나 및 7명의 여성 능력자들은 팀을 짜서 마트 근처의 좀비들을 소탕했다. 좀비의 위협으로부터 평범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일이었고, 우리 스스로를 지킬 힘을 얻기 위한 전투 연습이기도 했다. "도하야!" "엇!" 정문으로 향하는 길. 세레나가 달려오며 살짝 점프해서 내 목에 팔을 걸고 꽉 껴안아왔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딱 붙은 몸을 슬쩍슬쩍 비벼온다. "레나야. 사람들 보는데……." "헤헤." 세레나가 아쉬운 듯 웃으며 떨어졌다. 저쪽에 보이는 마트 정문에는 이미 7명의 토벌대원들이 모여있었다. 오후 토벌을 출발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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