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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큭, 죽여라.


1. 띠리리리리리리링— 시끄러운 화재 경보음. 퓨슈—! 쏴아아아— 스프링클러가 물 뿜어내는 소리,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거기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지독한 어둠까지. D마트 안의 능력자들은 모두가 철저하게 고립되었다. 2층에서 다른 능력자들을 깨우던 대머리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씨발,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야—! 누구 대답 좀 해봐—!" 대머리 남자의 고함에 각기 다른 방향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어어, 여기! 나 여기 있어!" "지금 이거 대체 무슨 상황이야!" 세 명의 남자들은 목소리를 통해 서로의 위치를 가늠했다. 시끄러운 경보음과 물소리 사이에서도 크게 소리 지르면 목소리가 들리긴 했다. "니들 계속 소리 질러봐! 좀 모여서 얘기하자!" 대머리 남자의 제안에 한 명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아아아! 여기! 아아아아아!" "어, 어! 좋아! 가고 있어!" "크흐, 씨발. 개 웃기네. 계속해!" 한 명이 계속 소리를 질러주고 나머지 두 명이 그 소리를 듣고 접근해오던 중이었다. "아아아아! 여기! 아아아, 아악—! 끄륵……." 소리를 지르던 남자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인마, 거의 다 왔는데 왜 갑자기 조용해!" "뭐해, 새꺄! 일단 우리끼리만이라도 가까이 모여봐!" 접근해오던 두 명의 남자는 서로의 목소리가 코앞에서 들리는 지척까지 모여들었다. 둘은 바로 앞에 있는 서로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아서 손을 뻗어서 상대방을 만지작거렸다. "아, 씨발. 그만 더듬고 일단 불 좀 켜봐. 너 상훈이지? 연초 피니까 라이터 있을 거 아니야?" "아, 맞다. 깜빡했네." "아, 맞다. 이 지랄. 멍청한 새끼야! 근데 아까부터 발에 뭐가 자꾸 걸리냐?" "어디 어디…… 여깄다. 불 켠다?" 상훈이라 불린 남자가 손바닥으로 불을 감싸며 지포라이터를 켰다. 퐁- 둘은 드디어 서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대머리 남자와 상훈이었다. 대머리 남자는 상훈을 보면서 히죽 웃었다. "씨발, 이제야 좀 뭐가 보이네. 야. 뭘 그렇게 봐?" "……헉!" 상훈은 경악한 표정으로 발밑을 보고 있었다. 대머리 남자의 시선도 자연스레 아래로 향했다. 그곳에는 아까 어둠 속에서 계속 소리를 질러주던 남자의 시체가 쓰러져있었다. 목이 반쯤 썰려서 바닥에 고인 물에 피가 물감처럼 번진다. "……!" 철벅. 대머리 남자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아까 전부터 발밑에 걸리적거렸던 무언가의 정체는 바로 이 시체였다. "야, 상훈……!" 그는 재빨리 상훈에게 능력을 사용하라고 말하려 했으나, 상훈의 목에는 이미 칼날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끄륵!" 퓩. 칼날이 빠지고, 상훈의 목에 뚫린 구멍에서 피거품이 보글보글 솟아 나왔다. 상훈의 뒤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가 서있었다. 벌써 이쪽 능력자를 둘이나 죽인 암살자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죽였을지도 모른다. 암살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일색의 암행복에 야간 투시경을 착용하고 있었다. "새끼가……!" 대머리 남자는 재빨리 능력을 사용하며 손을 뻗어 암살자를 붙잡으려고 했다. 그의 능력은 철인화. 온몸이 철처럼 단단해지는 능력이다. 이 능력을 사용하면 좀비가 아무리 물어대도 피부에 흠집 하나 나지 않는다. 일단 사용만 하고 나면 두려울 것이 없어지는, E- 등급의 사기적인 능력. 철마저 녹여버리는 화력의 화염을 방사하는 최철남 같은 능력자만 아니라면, 대머리 남자는 누구든 이길 자신이 있었다. "이리 와—!" 기세등등한 기합과는 달리 그는 암살자를 붙잡지 못했다. 녀석은 재빠르게 물러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털썩- 죽은 상훈이 쓰러지면서 손에 들려있던 지포라이터도 바닥에 떨어졌다. 스프링클러의 물이 바닥에 고여있었기에 라이터의 불빛은 곧바로 꺼져버렸다. 또다시 지독한 어둠이 찾아왔다. 대머리 남자는 찾아올 습격에 대비해 자세를 낮춘 채로 사방을 경계했다. "……." 쌔앵- 암살자의 칼날이 어둠 속에서 날아든다. "……!" 캉-! 대머리 남자는 반응하지 못했다. 칼날은 정확히 경동맥을 노리고 찔러져왔으나 철인화를 마친 그의 피부는 뚫리지 않았다. 곧이어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철인화 능력이군." 대머리 남자는 순간 움찔하고는 대답했다. "어디서 소문을 들은 모양이구나, 애송아. 무려 E급 능력이다. 나한테 잡히면 편하게 죽을 생각은 하지 마라. 갈기갈기 찢어줄 테니까." 그는 애써 여유로운 척을 했으나 사실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씨발. 어떻게 알았지? 나 말고도 다른 철인화 능력자가 있었던 건가? 설마…… 약점도 알고 있나?' 철인화의 약점. 그것은 지속시간이 3분이 채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즉, 3분 안에 결착을 내야 한다. 철인화가 풀리면 그는 아무런 능력도 없는 일반인이 돼버리니까. 그러나 이쪽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암살자를 공격할 수가 없었다. 결국 대머리 남자가 할 수 있는 건 겉으로는 허세를 부리고 속으로는 비는 것뿐이었다. '제발. 제발 포기하고 꺼져……!'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암살자는 엉뚱한 대답을 했다. "세레나. 녀석의 목을 비틀어." "네." 대답은 바로 뒤에서 들려왔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 대머리 남자가 무언가 반응을 해보기도 전에 여자는 이미 손을 뻗고 있었다. "뭐, 뭐야……!" 그는 등 뒤의 여자에게 머리와 어깨를 붙잡혔다. 뿌리치려고 해봤으나 손아귀 힘이 어찌나 강력한지 강철 바이스로 고정된 것처럼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여자는 그대로 팔을 움직여 대머리 남자의 목을 비틀기 시작했다. "자, 잠깐……끅, 끄으읍……!" 끼이이이이이- 철인화를 유지하고 있는 대머리 남자의 목에서 강철 다발을 강제로 비트는 듯한 쇳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말도 안돼……!' 그는 지금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목에 온 힘을 주고 버티고 있는데, 등 뒤에 선 이 여자는 손아귀와 팔 힘만으로 쇳덩이나 다름없는 자신의 목을 비틀고 있었다. "아, 안돼, 멈춰, 제발, 끄으으으아아아———!!" 끼이이이이이이익— 까드득! 대머리 남자의 머리는 그대로 180도 비틀어졌다. 여자는 시체가 된 그의 몸을 놓아주었다. 첨벙- "가자, 세레나. 다음은 3층이야." "네, 주인님." 2층의 능력자들을 모두 처리한 김도하와 세레나는 3층으로 가는 통로로 향했다. 2. 백선아의 동생, 백지훈은 살아있었다. 이 세상의 장르가 좀비 아포칼립스로 바뀐 그날, 백지훈은 음습한 야망을 드러내는 최철남과 대립각을 세운 끝에 대피소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대피소 밖의 거리에는 어딜 가도 좀비가 가득하다. 그런데 부모님까지 모시고 나온 그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건 바로 여성 능력자들 덕분이었다. 최철남은 남성 능력자들을 규합하여 능력자들을 새로운 세상의 지배 계급으로 만들고, 젊은 여자들을 성 노예로 사용할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그는 용의주도하게도 자신의 계획을 드러내기 전에 사람들의 휴대폰부터 걷어서 정보와 통신을 통제했다. 최철남의 계획을 완전히 눈치챘을 때는 이미 휴대폰을 빼앗긴 뒤였다. 그렇기에 백지훈은 자신을 따라 대피소 밖으로 떠날 용기가 있었던 몇몇 비능력자들과 부모님, 그리고 7명의 여성 능력자들과 함께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 20명 남짓한 규모의 인원들은 근처의 수많은 오피스텔 건물들 사이에 숨어서 슈퍼마켓에서 물자를 조달하며 살아남았다. 그리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봤다. 대피소에 있는 최철남과 능력자들을 모두 죽이고, 사람들을 구출해낼 기회를. 그 결행 일이 오늘이었다. 백지훈 자신과 7명의 여성 능력자들로 구성된 8인의 특공대. 그중 7명은 D마트의 입구를 통해 1층으로 진입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이었다. "이게 무슨……." 띠리리리리리리링— 시끄럽게 울리는 화재경보기. 천장의 스프링클러에서 쏟아지는 물줄기. 정전됐는지 켜지지 않는 불. 심지어 왠지는 몰라도 2층으로 통하는 통로 쪽에는 커다랗게 불을 피워놓았다. 쏟아지는 물줄기에도 불구하고 그 불은 꺼지지 않고 있었다. "어, 어떡하죠……? 지하는 이미 움직이고 있을 텐데……!" "일단 침착하시고 사람들이 있는 쪽으로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죠." 7명의 특공대는 당황하지 않고 수백 명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백지훈은 두 번째로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을 겪었다. 편의점 창고 안에서 지내고 있어야 할 누나, 백선아를 만난 것이다. "누, 누나……!?" "지훈아! 살아있었구나! 흑, 다행이다!" 백선아는 곧바로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누나. 잠시만.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야? 저 불은 뭐고?" "아, 이건……." 백지훈은 누나에게 자초지종을 전해 들었다. 편의점 창고에서 나온 것부터, 한 커플에게 목숨을 구원받은 것, 최철남과 능력자 두 명을 유인해서 죽인 것,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D마트를 습격한 것까지. '최철남, 그 새끼가 이미 죽었다고……?' 갑작스레 진행되는 이야기에 백지훈은 정신이 없었으나, 마지막 말을 듣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 뭐라고? 그럼 그 도하라는 형님이 지금 위에서 능력자들이랑 싸우고 계신 거야!?" "응. 레나라는 여자애도 같이 있을 거야." "……큰일 났다." 백지훈은 어처구니없게 꼬인 상황에 당황했다. 그들 일행 중에서 D마트를 습격하기 위해 꾸린 특공대 인원은 총 8명이었다. 그리고 그중 7명이 현재 1층으로 들어왔다. 나머지 1명은 어디로 갔을까? 그녀는 능력의 특수성을 고려해서 단독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무려 D급 암살 계열 능력의 소유자, 신지하. 어쩌면 그 도하라는 형님과 신지하가 싸우게 될지도 몰랐다. 둘은 서로의 존재를 모르고 있을 테니까. "빠, 빨리 위층으로 가야 해! 우선 저 불부터 끄자!" 누나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의 생명이 위험하다. 신지하의 능력은 특히나 이런 어둠 속에선 저항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 '도하 형님이 죽기 전에 신지하를 찾아야 해……!' 백지훈은 움직임을 서둘렀다. 3. 나는 방금 죽을 뻔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칼날이 내 목젖 앞까지 다가와있던 것이다. 캉-! "……!?" "주인님!" 다행히 세레나가 적의 칼을 튕겨냈다. 하마터면 영문도 모른 채 인생 하직할 뻔한 순간이었다. "죄, 죄송해요!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서 반응이 늦었습니다!" "진정해, 세레나. 우선 적에게 집중해." 나는 온 신경을 끌어올리며 주변을 경계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누구지?' 박상철을 심문해서 얻은 능력자들의 정보에 이런 종류의 능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박상철이 내게 거짓말을 했다? 아니. 그 정도로 배짱 있는 녀석은 아니었다. 연기를 잘 할 것 같지도 않고. '모르는 인물이다.' 나는 종합 능력치 평가가 E+급에 달하는 능력자였다. 그런 내가 칼날이 목젖에 쇄도하는 그 순간까지도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다. 심지어 세레나가 막아주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찔렸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아마…… 기척을 숨기는 종류의 능력.' 판단을 끝낸 나는 세레나에게 손짓을 했다. 내가 뭔가 해볼 테니 습격에 대비하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곧바로 발을 헛디뎠다. 찰박- "어어……!?" 아무런 장애물도 없는 곳에서 발을 헛디디다니, 내가 생각해도 뻔한 함정이었다. 그래도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단 낫겠지. 재밌게도, 적은 이 뻔한 함정에 걸려들었다. 쐐액- 탁! 나를 노리고 뻗어오는 칼날을 세레나가 붙잡는다. 드디어 숨어있던 적의 정체가 드러났다. 그건…… 여자였다. "멈춰!" "……!" 붙잡은 적의 목을 그대로 꺾어버리려는 세레나의 행동을 일단 멈춰세웠다. '이 여자는 뭐지? 최철남쪽 능력자들 중에 여자가 있을 리가 없는데…….' 최철남은 능력자를 지배 계급으로 내세우고 젊은 여자들을 성노예로 착취하는 놈이었다. 그런 최철남에게 가담하는 여성 능력자가 있다는 건 말이 안됐다. 그럼 이 여자는 정체가 뭘까? "흐윽……." 세레나에게 붙잡힌 여자는 패배자의 비참한 말로를 상상하는 듯 서글프게 흐느꼈다. 곧이어 내 얼굴을 사납게 노려본 그녀가 말했다. "큭……, 죽여라." "……." 뭔가, 적은 아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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