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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43화 - 겨울


[쿠웅-!!] ​ ​ “하아…. 하아….” ​ ​ 내가 지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 손에 들린 이 묵직한 건 대체…. ​ 옆에 쓰러져 있는 그를 보자, 순간 정신이 확 들었다. ​ ​ “서, 서서… 선배…!!” ​ ​ 얼굴을 바닥에 처박고 미동도 하지 않는 그를 흔들었다. ​ ​ “아, 아아아아…!!! 이, 일어나 봐요…!!!” ​ ​ 그러나, 아무리 흔들어도 움직이지 않는 신현제. ​ 몸의 떨림이 멈추질 않는다. ​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 ​ “끄윽…. 으으으으…. 머리가….” ​ ​ 미동도 하지 않던 그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간신히 새어 나온다. ​ ​ “서, 서… 선배…?! 괘, 괜찮…?!” “으으윽…. 씨발…. 이 미친년이…. 넌 진짜 뒤졌… 어….” “아아…. 아아아…!!” ​ ​ 피가 흐르는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키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금방이라도 몸이 굳어버릴 것 같은 오싹함이 느껴졌다. ​ 그 순간,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단 하나의 생각. ​ 도망. ​ 잡히면 지금껏 겪었던 고통의 수십 배, 아니 수백, 수천 배로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에 무작정 몸을 움직였다. ​ ​ “씨발…! 거기 안… 서…? 끄윽…!!” “으… 으아아…!!” ​ ​ 날 가두고 있던 좁디좁은 그의 자취방에서 빠져나와 무작정 복도 끝으로 뛰었다. ​ 복도 끝에 있는 계단을 타고 내려와, 현관을 빠져나와서도 발을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주변 풍경. ​ 좁아진 시야 따위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그냥 앞만 보고 무작정 뛰었다. ​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도, 다리에 힘이 풀리려 해도, 나는 단 한 번을 뒤돌아보지 않고 무작정 앞만 보고 뛰었다. ​ ​ [덜컥!] ​ ​ “아윽?!!” ​ ​ 그렇게 한참을 달리던 다리는 스텝이 꼬인 건지, 아니면 무언가에 걸린 건지 나를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넘어뜨렸고, 앞만 보고 달리던 나는 그제야 가쁜 숨을 몰아 내쉴 수 있었다. ​ 사라지지 않던 오싹함이 조금씩 진정되어 가며, 무작정 달려 도망치는 것만 생각했던 머릿속에 드디어 이성이 돌아온다. ​ 쓰레기더미 앞에 넘어져 있던 나는, 몰려오는 통증에 더 이상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고, 네발로 기어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 ​ [쏴아아아-] ​ ​ 쏟아지는 빗방울. ​ 내 온몸을 적시는 그것을 맞으며 주변을 살피자, 인기척 하나 없는 이곳은 처음 보는 동네 같았다. ​ 멍투성이인 몸과 그것을 가릴 천 쪼가리 하나 없는 신세. ​ 무릎과 손바닥에서 엄청난 고통이 느껴져 그곳을 보자, 넘어질 때 바닥에 쓸린 건지 그곳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 간신히 숨을 돌리고, 쓰레기 더미에서 일어나 그곳을 뒤졌다. ​ 비에 젖어 축축한 커다란 셔츠. ​ 그것은 더러운 오물이 묻어 군데군데 얼룩이 있었고, 목 부분은 심하게 늘어나 있어 그대로 내 어깨를 드러낼 것 같았다. ​ 그러나,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 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내 몸을 가리기 위해 더러운 그것을 입었고,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 다시 몸을 일으켰다. ​ 다행히 무릎 위까지 내려오는 셔츠의 길이. ​ 주변을 살피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 한 발 한 발 걸을 때마다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통증. ​ 그로 인해 다시 뜀박질을 하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았다. ​ 한참이 지나 골목을 빠져나온 나는 사람들과 자동차가 보이는 도로로 나왔고, 표지판을 보며 내가 살던 동네 방향으로 걸었다. ​ 그렇게 절뚝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무작정 걷고 또 걸었다. ​ 비는 언제쯤 그치는 걸까. ​ 지나치는 사람들마다 날 흘끗 쳐다보며 지나가는 게 느껴진다. ​ 그런데, 이상하게 수치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 내가 정말 창녀이기 때문일까…. ​ 예전 같았으면 벌써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을 텐데…. ​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 뺨을 타고 흐르는 건 분명 비일 테니까. ​ 그렇게 한참을 걸어 도착한 시내. ​ 수많은 사람을 피해 그곳을 걷던 중이었다. ​ ​ “차수연? 너 맞지?” ​ ​ 귓가에 들리는 건 하늘에서 쏟아지는 폭우 소리뿐이었을 텐데, 익숙한 목소리에 절뚝거리던 다리가 멈춰버린다. ​ ​ “우산도 없이 궁상맞게 뭐 하고 있냐? 신발은?” ​ ​ 단 한 순간도 잊지 않고 있던 남자가 우산 속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 ​ “아아….” ​ ​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에게 안기고 싶었다. ​ 그러나, 그가 내 마음에 새겨넣은 무거운 낙인은 내 욕구를 너무도 가볍게 억눌러버렸다. ​ 그를 향해 뻗었던 손이 다시 힘없이 아래로 늘어진다. ​ 아닐 거야. ​ 분명 환각을 보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 왜냐하면 난 그와…. ​ ​ “아니, 그것보다. 대체 뭘 하고 다니길래 꼴이 그 모양이야? 어?” “…….” “뭐야, 왜 대답을 안 해. 아무리 헤어졌다지만 그냥 쌩까기로 한 거야?” ​ ​ 비 냄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그가 피우던 향 나는 담배 냄새. ​ 환각이 아니었다. ​ 붙잡을 수 있을까. ​ 다시… 다시 그와 새로 시작할 수 있을까. ​ ​ “시, 시…!” ​ ​ 망설이는 마음을 억누르고 그에게 걸음을 옮기는 순간이었다. ​ ​ “시후야~!” ​ ​ 귀에 들어오는 낯선 여자 목소리. ​ 그의 바로 뒤에 있는 건물에서 나온 여자는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와 함께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고, 그녀는 쓰던 우산을 접어 그의 우산 아래로 들어가 다정하게 팔짱을 끼웠다. ​ ​ “미안~! 오래 기다렸지? 얼른 가자!” “아, 별로 안 기다렸어. 볼일은 다 봤어?” “응. 화장실 완전 구려. 화장 고치다 토할 뻔? 어라? 근데 얘는 누구야? 아는 사람?” “아, 있어. 저번에 말한 전 여친.” ​ ​ 그들의 왼손에 끼워진, 나와 연인일 때와는 다른 새로운 반지가 보인다. ​ ​ “아아~ 그 바람피우던 계집애? 근데 꼴은 또 왜 저래?” “글쎄, 헤어진 지가 몇 달이 지났는데. 아직도 궁상맞게 이러고 다니나 보지.” “어우~ 왜 저래? 지가 잘못해놓고 붙잡을 자격도 없는 주제에. 내버려 두고 얼른 가자. 영화 시작할 시간이야.” “아, 벌써? 그래, 가자. … 뭐 아무튼, 차수연.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고, 알아서 잘 지내.” ​ ​ [툭-!] ​ ​ 그의 손에 들려있던 우산이 내 발등을 때리며 바닥을 굴렀다. ​ ​ “그리고, 궁상맞게 그러고 다니지 말고 그거 쓰고 가라.” ​ ​ 내 어깨를 툭 치고 지나치는 두 사람. ​ 그의 손을 붙잡으며 마음에 남은 진심을 전한다. ​ ​ “시후야…. 나… 나 아직 너…!” “구질구질하게 뭐 하는 거야? 야, 차수연. 착각하지 마. 혹시라도 나랑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헛된 꿈은 꾸지도 마. 난 이제 너한테 아무런 감정도 안 느껴지니까.” ​ ​ 너무도 매정하게 내 손을 뿌리치는 박시후. ​ 등 뒤로 그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 ​ “아, 뭐야~ 내 우산 비싼 건데!” “다른 거 사줄게.” “정말~?! 나 갖고 싶은 가방 있어!” “뭐냐? 우산이 왜 가방이 돼?” “아앙~! 그만큼…!” ​ ​ 그들의 목소리가 멀어져 간다. ​ ​ [툭… 투둑….] ​ ​ 차갑게 얼어버린 마음속. ​ 뺨을 타고 흐르는 빗물이 너무 뜨겁다…. ​ 게다가 나는 왜 길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걸까…. ​ ……. ​ 아니야…. 이건 늘 꾸었던 악몽일 거야…. ​ 이제 그만 잠에서 깨자…. ​ 잠에서 깨면…. ​ 깨면…. ​ ……. ​ ​ “거짓말….” ​ ​ 붙잡을 수 없었다. ​ 새로 시작할 수도 없었다. ​ 이미 그의 옆엔 내 자리 따위는 없었으니까. ​ 늘 꾸었던 지독한 악몽은 현실과 다를 바 없었다. ​ 단지… 단지 네가 내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었는데…. ​ 네가 없어지고… 내가… 내가 무슨 끔찍한 짓을 당한 건지도 모르면서…! ​ 모든 게 다 내 탓이라며 스스로를 자책하며 몇 날 며칠을 후회 속에서 살았는데…! ​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서 살았는데…!! ​ 너는 어째서…!! ​ 너는 왜!!! ​ ​ “끕…! 흐끄으으…!!! 이젠…!! 흐끄으윽…!! 이젠 네가 미워!!! 흐아아아앙!!!!” ​ ​ 그렇게 폭우 속에서 한참을 울었고, 비가 조금씩 잠잠해져 갈 무렵이었다. ​ 울음과 함께 그에 대한 모든 미련을 털어낸 나는 다시 몸을 일으켜, 멍하니 앞을 향해 빗속을 걸었다. ​ ……. ​ 지긋지긋했던 악몽도, 잔혹한 이 현실도 모든 걸 끝낼 때가 온 것 같다. ​ 더 이상 살아 있을 필요가 없는 것 같아. ​ 그냥 죽자. ​ 이대로… 그냥 이대로 죽자. ​ 이제 집으로 돌아갈 필요도 없고, 약 같은 것도 필요 없으니까…. ​ 저 앞에 차들이 다니는 도로가 보인다. ​ 그래, 그곳으로 가자. ​ 저기에 뛰어들어 전부 다 끝내면 되는 거다. ​ 횡단보도의 파란불은 언제쯤이나 되어야 빨간불로 바뀌는 거지? ​ 아니지, 바뀌자마자 뛰어들면 안 돼. ​ 그럼 나를 세게 들이받지 못하니까…. ​ 횡단보도의 불이 빨간불이 되면 딱 10초만 세자. ​ 마음속으로 10초만 세고 뛰어들자. ​ 파란불 아래 남은 시간 초가 내 남은 수명을 말해주는 것 같아…. ​ 죽음…? 이제 무섭지 않아. ​ 어차피 나 하나 죽는다고 슬퍼해 줄 사람은 한명도 없을 테니까…. ​ 그리고, 죽지 못하고 이대로 살아버리는 것. 그게 더 무섭기도 하니까…. ​ 아. 어느새 빨간불이 되었네…. ​ 10… 9… 8… 7… 6… 5…. ​ 마침 저 멀리 엄청나게 큰 화물차도 오네. ​ 4… 3… 2… 1. ​ 가자. ​ 인도 경계석에서 내려와 한걸음, 두걸음, 그리고, 세걸음째를 내딛으려던 순간이었다. ​ ​ [빠아앙-!!!] ​ ​ 갑자기 뒤로 당겨지는 몸. ​ 눈앞으로 커다란 화물차가 커다란 경적소리를 내며 내 머리카락을 스치는 게 느껴졌다. ​ ​ “뭐 하는 거예요!!” “아….” ​ ​ 온몸을 적시던 빗줄기가 멈춘다. ​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내게 화를 낸다. ​ ​ “아까부터 불러도 대답도 없고, 지금 큰일 날 뻔한 거 알아요?!” “…….” “수연씨!! 뭐라고 대답 좀 해 봐요! 네?!” ​ ​ 아르바이트를 할 때 만났던 남자. ​ 이민형이었다. ​ ​ “… 왜 방해 해.” “네?! 무슨 소리예요?! 빨리 이쪽으로 와요!!” “왜 방해하냐고!! 이거 놔!!! 날 좀 내버려 둬!!!” “제발 정신 좀 차려요!!” ​ ​ 억지로 날 끌고 가려는 그의 손을 뿌리치려 하자, 그는 더 세게 나를 잡아끌었다. ​ ​ “아으윽…!! 씨…! 왜 이래!!!” “이쪽으로 와요!!” “놔!!!” ​ ​ 온 힘을 다해 그의 손을 뿌리쳤다. ​ ​ “수연씨!!” “왜…!! 이젠 당신 차례야?!!”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위험한 짓 다신 하지 마요!! ” “네가 뭔데…. 네가 뭔데!! 걱정해주는 척하지 마!!” “걱정하는 척이 아니라, 진짜 걱정되어서 그래요! 감기 걸리겠어요. 빨리 이쪽으로 와요!” ​ ​ 잔뜩 찡그린 얼굴로 다시 자신의 우산 속에 날 잡아당기는 이민형. ​ ​ “싫어…!! 이거 놔!!!” “왜 이렇게 고집부려요?!! 정말 죽고 싶어서 그래요?!” “그래…!! 죽고 싶어!! 죽고 싶다고!! 그러니까 제발 좀 놔!! 아니면 너도 나랑 자고 싶니?!! 어?!! 너도 내 몸이 목적이야?!!”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그런 생각 손톱만큼도 없으니까 제발 정신 좀 차려요!!” ​ ​ 몇 분 동안이나 계속된 그와의 실랑이에 결국 내가 먼저 지쳐버렸고, 그는 붙잡은 내 손목을 절대 놓지 않았다. ​ ​ “끄읍…!! 왜… 왜 다들 날 가만 내버려 두지 않는 거야…. 으흐윽…!!” “하아…. 일단, 집으로 가요. 어디에요? 데려다줄게요.” “싫어…. 다 끝낼 거야…. 다 끝낼 거라고…! 방해하지 말란 말이야…! 아흐으윽…!!” “아, 정말…!!” ​ ​ 다시 온몸을 적시는 빗줄기. ​ 우산을 옆으로 집어 던진 그가 억지로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 ​ “싫어어어…! 이거 놔…! 놓으란 말이야…! 흐으으윽…!” “가만 내버려 두면 또 위험한 짓 할 게 뻔하니까. 절대 안 돼요.” “흐끅…!! 왜… 왜 다들 날 가만두지 않는 건데…!! 왜 매번 날 방해하는 건데에!!” ​ ​ 그렇게 나는, 억지로 안긴 그의 품에서 힘껏 발버둥을 치며 벗어나려 했지만, 그는 내 몸짓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날 품에 안은 채 어딘가로 데려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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