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저주의 마도서(3)
레인은 지극히 정상적인 취향을 가진 남성이었다.
한 번도 성관계를 가져본 적은 없었지만, 성벽은 평범의 범위 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흐아아아."
그렇기에 지금 수백 이상의 마왕군이 보고 있는 앞에서 성대하게 자위를 끝마친 것은 원래의 레인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분명 본인의 의지로 한 행동이긴 하지만 아직까지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레인은 두 번 연속으로 절정을 한 후에야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생겼다.
'지,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첫번째는 당황이었다.
어째서 자신이 이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한 단계.
"아아아..."
그리고 두 번째는 미칠듯한 부끄러움이었다.
"으아아아!!"
바로 난간을 박차고 나와 건물 안으로 몸을 숨겼다.
흥분이 식고 정신이 차가워지고 나서야 본인이 한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야. 그리모어 거기 있지? 빨리 해명해봐."
[해, 해명이라니. 뭐를?]
"너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여버리는 수가 있다. 똑바로 말해라."
한계 이상으로 올라간 레인의 수치심은 점점 그리모어를 향한 분노로 바뀌고 있었다.
극히 드문 확률로 그 순간에 레인의 숨겨진 성벽이 깨어난 게 아닌 이상 원인은 그리모어에게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했다.
[내가 아까 말했었잖아 그렇게 흥분하면 너랑 나의 정신이 일시적으로 동화 될 수도 있다고.]
"그러니까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다면 니가 도M에 노출증 환자인데 나랑 정신이 동화돼서 나까지 그렇게 된 거다 이 말이냐?"
[그.. 비슷하긴 한데 내가 도M에 노출증 환자라는 건 좀 과장된 게 아닐까...]
"당장 내 몸에서 나가!!"
그리모어랑 계약한 이후로 도움은 고사하고 방해만 받고 있었다.
이쯤 되면 마왕 녀석이 심어둔 스파이가 아닐지 의심될 정도였다.
[야, 잠깐! 너 또 흥분하고 있어 좀 진정해!]
하하.
이젠 마음대로 화조차 못 내는 상황이 됐다.
더는 상태가 악화하는 게 불가능해 보일 정도였다.
'후. 진정하자. 진정.'
이래 봬도 레인은 어렸을 때부터 온갖 수라장을 겪어온 사람이었다.
이번이 특이 케이스였던 거지 분노를 컨트롤하는 능력은 수준급이었다.
정신이 안정화됨에 따라 레인의 글래머한 신체도 다시 조그만 꼬맹이의 몸으로 차츰 줄어들어 갔다.
정신뿐만이 아니라 신체의 동화도 풀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 다른 사람 앞에서 옷을 벗는 것은...? 당연히 미친 짓이지!"
자문자답을 해 보았다.
평소와 같은 지극히 정상적인 답이 도출되었지만 더는 자신의 판단조차 믿기 의심스러웠다.
"여기가 아까 그 여자가 있던 곳이다!"
"아직도 거기 있어?"
알몸으로 복도에 주저앉아 있는 동안 아래에 있던 마물들이 올라오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레인은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들어 다시 알몸으로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모어 너 진짜 두고 보자."
[솔직히 난 억울하다고 생각하는데?]
"닥쳐!"
흥분이 가라앉자 느껴지는 추위에 옷을 두고 온 것을 후회하는 레인이었다.
---
"마왕님 마물 몇을 위로 보냈습니다."
"음..아, 잘했다."
자신의 최측근인 미리암의 말에 계속 위쪽을 올려다보던 디아는 다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갑자기 나타난 의문의 여성 때문에 연설은 잠시 중단된 상태였다.
앞에서는 저마다 방금 여자의 이야기를 하며 떠들고 있었다.
디아는 옆에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광장은 매우 소란스러웠기 때문에 더 크게 말했어도 들릴 걱정은 없었다.
"미리암.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저건 분명 '나'였어. 맞지?"
"어렸을 때부터 마왕님을 보아온 저의 소견으로는 만약 마왕님이 성장하신다면 저런 모습이 되실 것 같긴 합니다."
단상 바로 위에 있었기에 각도상 얼핏 본 것이 다였지만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비록 원래의 자신보다 컸을지언정 본인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거기에 자신이 새긴 노예 문신의 마력까지 느껴졌으니 저것은 확실히 디아의 몸에 들어가 있는 용사였다.
그렇다면 의문은 두 가지.
첫째. 어떻게 명령을 무시하고 방에서 나왔느냐.
둘째. 이게 더 중요한 건데, 어떻게 저렇게 가슴이 커질 수 있었냐.
가슴 뿐만이 아니었다.
엉덩이부터 시작해서 전체적인 몸의 라인이 곡선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수백 년간 갖가지 방법을 전부 시도해봐도 성장할 기미가 없던, 디아가 꿈꾸는 이상적인 체형이었다.
물론 평소 디아의 모습과는 괴리감이 심했기에 다행히도 아직까지 아까 그 여자가 디아의 몸이었다고 생각하는 마물은 없는 듯했다.
"애들 몇 명을 보낸 걸로는 너무 불안한데 그냥 네가 빨리 갔다 오면 안 될까?"
"지금은 아직 마왕님을 마왕님이 아닌 용사라고 의심하는 녀석들이 많습니다. 저마저 자리를 뜬다면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 될지도 모릅니다."
"하아. 귀찮게..;"
디아는 지금 인간 용사의 몸에 들어가 있었다.
그렇기에 의식을 통해 자신이 진짜 마왕임을 증명하려고 했다.
영혼의 맹세.
목숨을 담보로 자신이 한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주술이지만 아직 몇몇의, 특히 간부급의 마물들 중에는 디아가 마왕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믿지 못하는 녀석들도 있었다.
"용사 녀석도 데려왔어야 했어."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빨리도 말한다."
난간을 확인하러 갔던 마물들이 돌아온 것은 그때였다.
그들의 손에는 왠지 익숙한 물건이 들려 있었다.
"위에 있던 게 누군지 확인은 됐나?"
"죄송합니다. 저희가 갔을 땐 난간 근처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습니다. 대신 난간에서 이런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디아의 핑크빛 파자마와 백색의 팬티였다.
무언가의 액체로 축축하게 젖어있는.
"미리암."
"예. 부르셨습니까."
"네 말대로 내가 혼자 여기 남는 건 문제가 될 수 있으니 네가 여기 혼자 남아라."
"예?"
"나는 지금 당장 가봐야겠다."
용사란 놈이 기껏 배려해 줬더니 본인의 위신을 실추시켰다.
게다가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멋대로 몸을 건드려 이곳저곳의 사이즈를 키워 놓았다.
특히 가슴이. 커다란 가슴이 부러웠다.
자신의 몸이었지만 뭔가 패배한 느낌이었다.
'용사,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것 같군.'
자신을 부르는 미리암을 무시하며 디아는 광장을 떠났다.
---
"으으.. 내가 대체 왜 이러고 있는 거지?"
현제 레인은 마왕성 안에 있는 정원의 풀숲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다시 침실로 돌아가려 했으나 무작정 도망가는 바람에 길을 잃고 말았다.
따라서 아직 레인은 알몸인 상태였다.
"너 아까는 길 안내 잘만 하지 않았냐?"
[그땐 디아의 마력을 따라간 거고. 나도 밖으로 나온 건 오랜만이라 길 같은 건 잘 몰라.]
"도움이 되는 게 하나도 없군."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레인도 길을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생각보다 길 안내를 잘하던 그리모어만 믿고 길을 외워두지 않은 것이 패착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아예 마왕성으로부터 도망치는 수밖에 없나."
[무리일걸 노예의 문신을 새긴 시전자는 노예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알 수 있어.]
"그런 건 좀 진작 말하라고 했지!"
다시말해 레인이 아무리 몸을 숨겨도 의미가 없다는 뜻이었다.
완전히 진퇴양난이었다.
"어머 마왕님 아니신가요? 어쩐 일로 저의 정원에?"
목소리가 들린 것은 뒤쪽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순백색의 새하얀 피부를 가진 그녀의 하얀 머리칼에는 다양한 종류의 꽃잎과 풀들이 조화를 이루며 피어 있었다.
마치 여신을 연상시키듯 여러 겹의 천으로 된 옷을 입고 있는 그녀는 천천히 레인에게 다가왔다.
"그런데 어째서 옷을 다 벗고 계신 거죠?"
레인을 살펴보던 그녀의 시선이 아랫배에 새겨진 문신에 멈춰 섰다.
한동안 둘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제가 알고 있는 지식이 맞다면 그건 노예의 문양이 아닌가요?"
"그러니까 이건 말이지 그게..."
"드디어 찾았다 용사!"
위를 올려다보자 익숙한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분명 지금쯤 광장에 있어야 할 터인 디아였다.
"어.. 그러니까 그쪽은 용사?"
잠깐동안 머리에 물음표를 띄우던 그녀였지만 이내 무언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지금은 그쪽이 마왕님인 거네요."
"음? 용케도 알아챘군 아라우네."
"저 이래 봬도 눈치는 좋은 편이랍니다."
아라우네라고 불린 그녀는 칭찬이 기분이 좋은 듯 후훗 하며 웃어 보였다.
"그런데 어째서 전 마왕군을 불렀을 텐데 넌 아직도 여기에 있는 거지?"
"마왕님도 아시잖아요. 저는 이 정원 자체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분체를 만들어서 보내는 것 정도는 가능할 텐데."
"마왕님도 참. 그런 건 모른 척 넘어가 주는 게 예의라고요."
핑계를 들켰음에도 아라우네는 여유로운 듯 빙글 돌아 보였다.
아마도 디아가 이곳에 온 목적이 자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지금은 이쪽의 귀여운 아가씨가 용사인 거군요."
"맞다. 이 녀석이 우리들의 숙적인 용사지."
그저 디아가 머리 위에 손을 올렸을 뿐인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압도적인 강함을 가진 채 살아왔기에 공포라는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던 레인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저 정신 나간 마왕이 이제부터 레인에게 어떤 짓을 해올지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아무튼 지금부터 이 녀석에게 벌을 주어야 하니 이만 가 보도록 하지."
"네? 방금 벌이라고 하셨나요?"
갑자기 아라우네가 흥미가 있다는 눈빛을 보이며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이것은 불길한 징조였다.
"왜 그러지?"
"그러니까 그 벌이라는 게 저 귀여운 마왕님의 신체를 어떻게든 괴롭히면 된다는 뜻이죠?"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만."
왠지 정원이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근처의 식물들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 '벌'이라는 것을 저한테 맡겨주실 수 있으신가요?"
안돼. 당연히 안된다.
무슨 짓을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정상적인 행위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디아는 아라우네의 물음에 잠시 고민을 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내 불안에 떠는 레인의 얼굴을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보니 자신의 얼굴에 악마의 얼굴이 겹쳐져 보이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아. 좆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