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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저주의 마도서


"앗따따······." 앞으로 한 발짝식 내디딜 때마다 다리 사이가 저려왔다. 원인은 분명 어제의 섹스일 것이다. '내 물건이 그렇게 컸을 줄이야.' 적어도 디아의 신체에 비에서는 매우 큰 사이즈였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절대로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태어나서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근육통을 섹스 때문에 겪는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끔찍해. 최악이야.' 물론 어떠냐고 묻는다면 기분 자체는 좋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남자로서 동정을 떼지도 못했는데 처녀 상실을 먼저 경험한 것이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하아." 정적만이 흐르던 침실에 레인의 한숨이 울려 퍼졌다. 지금 레인은 방 안에 혼자 있었다. 그리고 딱히 문이 잠겨 있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도망가고자 마음먹으면 언제든 도망갈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레인은 그러지 못했다. 마왕 녀석에게 침실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이 몸으로 도망간다고 해도 의미도 없고.' 몇 번이고 거울을 들여다봐도 벚꽃색 머리칼을 가진 소녀만이 비치고 있었다. 일단 마왕 녀석에서 벗어나기 전에 원래 몸을 되찾을 방법을 찾아야 했다. 디아는 마왕군에 용사와의 전투가 끝났음을 알리러 갔다. 용사의 몸으로 자신이 마왕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지 의문이었지만, 디아는 다 방법이 있다는 식으로 말하고는 사라졌다. 레인을 데려가지 않은 것은, 지금까지 적이었던 자들을 만나게 되면 원성을 들을지도 모른다며 디아가 배려한 것이었다. '어차피 거의 죽이지도 않았는데.' 처음 마왕 토벌을 시작했을 때부터 레인은 마왕에게 죽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레인은 최대한 많은 마왕군이 살아남아 자신의 국가인 에스티아에 복수해 주길 원했다. 그렇기에 적은 쓰러뜨리되, 될 수 있으면 목숨은 빼앗지 않으며 여기까지 왔다. 용사의 힘은 규격 외였기에 그다지 힘든 일은 아니었다. 뭐, 목숨은 빼앗지 않았어도 용사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녀석들은 많을 수 있으니까. 레인은 쑤시는 다리의 통증에 다시 침대에 드러누웠다.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딱히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불안에 떨며 디아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잠이라도 잘까." 지금까지 왕국에 노예처럼 굴려지느라 제대로 쉬어 본 적이 없는 레인이었다. 이참에 그동안 못 누린 휴식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선가 의문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와줘. 살... 줘] 처음에는 피곤함에 잘못 들은 환청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시할수록 목소리는 점점 또렷하게 들려왔다. [디... 아.] "어떤 자식이야!" 모처럼의 휴식을 방해받은 것에 신경이 쓰인 레인은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이끌고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침실을 샅샅이 뒤졌다. 평소에는 맹수들의 울음소리가 울리는 야외에서도 숙면을 취하던 레인이었지만, 푹 쉴 기회가 주어진 이상 전력으로 쉬고 싶었다. [제발... 도와...] 이젠 슬슬 화가 나려고 했다. 방 안을 전부 부숴볼지, 아니면 그냥 무시하고 잘지에 대해 고민하던 찰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침대... 밑...] 소리가 들린 즉시 더블 사이즈 보다 큰 침대를 반대쪽 벽까지 밀어버렸다. 아무리 소녀의 몸이라고는 해도 역시 힘만큼은 마왕의 신체였다. 침대가 있던 자리의 석재 바닥에는 누가 봐도 수상한 나무로 만든 문이 있었다. [아무... 나.] 기분 나쁜 목소리는 이 밑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레인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나무문을 열어젖혔다. 사다리로 이어진 어두운 지하에서 싸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지하통로? 아니. 감옥인가..?' 레인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사다리를 타고 통로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머릿속은 온통 빨리 저 목소리를 멈추고 잠을 자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다행히 지하 통로도 침실 '안'에 해당하는지 침실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명령에도 내려갈 수 있었다. 꽤 긴 거리를 내려가자 발이 땅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려는 찰나 어디선가 빛이 나오기 시작하며 지하 공간을 비췄다. 석벽으로 둘러싸인 10평 남짓한 크기의 공간. 아무런 특징 없는 방 안에는 검은 로브를 걸치고 마녀같이 끝이 뾰족한 모자를 쓴 여자만이 중심에 있는 진열대에 앉아있었다. 디아의 꼬맹이 신체와는 달리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를 가지고 있는 굴곡진 몸매가 눈길을 끌었다. [디아..? 네가 먼저 나를 찾아오다니, 드디어 계약할 마음이 생긴 거구나!] 바로 앞에서 말하고 있었지만 멀리서 말하는 듯 울리는 목소리였다. 매우 듣기 불편한 목소리에 레인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지금 내가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 없느니 한 번만 더 내 휴식을 방해하면 죽여버리겠다." 할 말을 마친 레인은 바로 몸을 돌려 사다리에 타려 했다. 그러자 뒤편에서 거의 애원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잠깐 디아! 너도 더는 그런 빈약한 신체는 싫다며! 나랑 계약만 하면 나처럼 글래머한 여성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니까? 어떤 소원이든 들어줄게!] 사다리를 잡은 레인의 손이 멈칫했다. 저 기분 나쁜 녀석을 믿을 수는 없지만, 소원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지금 자신은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 그리고 더 나빠질 것도 없는 상태였다. 혹시, 정말로 혹시나 낮은 확률이라도 저 여자가 원래의 몸을 되찾아 줄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레인이 자신의 말에 관심을 가진다고 생각했는지 더욱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역시! 디아 너도 쭉쭉빵빵한 몸매가 가지고 싶었던 거구나! 그치. 언제까지 A컵 빨래판 가슴으로 살 수는 없잖아. 말만 하면 C든 D든 만들어 줄 수 있어. 아니, 아예 쓰리 사이즈만 말하면 그대로 반영해줄게!] 레인이 가장 싫어하는 타입인 말이 많은 유형이었다. 거기에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쏟아내는 그녀의 태도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부터 조용히 하지 않으면 네년을 패고 그냥 돌아갈 것이다. 너는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해라." [디아? 그게 무슨 말······.] "일단 말해두겠는데 나는 마왕이 아니라 용사다. 네가 그렇게 찾는 디아 자식이 몸을 바꾸는 바람에 이렇게 됐지." [에? 그러면 너는······.] "닥치고 들어라! 어쨌든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원래 몸으로 돌아가는 것. 아까 어떤 소원이든 들어준다고 했는데 다시 마왕과 몸을 바꾸는 것도 가능한가?" 그녀는 혼란스러운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내 상황을 이해했는지 다시 웃으며 떠들어댔다. [아하! 그러니까 당신은 재수 없는 디야년이 아니라 위대하신 용사님이셨군요! 어찌 이리 감개무량할 수가..! 저는 쭉 용사님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소원으로 평생 닥치고 있으라고 하고 싶은 수준의 수다였다. 레인은 원래 몸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가까스로 화를 참았다. [저는 디아에 의해 이곳에 봉인된 마도서 그리모어입니다. 저와 계약하면 그것이 누구든 어떤 소원이든 들어줄 수 있답니다.] "마도서? 사람이 아니었던 건가?" [지금은 사람의 모습이지만 원래는······.] "아니 그 이야기는 필요 없다." 다행이도 이번에는 길어지려는 말을 처음부터 끊었다.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어디서 또 옆으로 샐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공짜는 아닐 거 아냐. 대가가 뭐지?" [대가는 필요 없습니다. 그냥 저와 계약해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너와 계약하면 어떻게 되는데?" [저와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너한테는 어떤 이득이 있는 거지?" [저는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는 마도서. 이 좁은 방에서 나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대가 없이 소원을 들어준다는 말이고, 잘못된다 해도 자살까지 시도했던 레인에게는 별 상관이 없었다. 만약 계약의 대가로 목숨을 잃는다고 괜찮았다. 지금 레인은 마왕의 명령으로 자살조차 할 수 없는 상태, 오히려 바라는 바였다. "좋아 당장 계약하자." 거의 계약서를 읽어보지도 않고 도장을 찍는 정도의 판단. 더는 잃을 것이 없는 레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계약만 하시면... 에? 정말 하시는 건가요?] "빨리 안 하면 죽여버린다." 본인도 순순히 수락할 줄은 몰랐는지 당황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러면 잠시 가만히 있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모어는 레인에게 다가왔고... 입을 맞추었다. '....!!!' 그것도 그냥 키스가 아닌 서로의 혀가 얽히는 딥키스. 키스 경험 제로의 레인이 얼을 타고 있는 사이 그리모어의 혀는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레인의 입속을 휘저었다. 그리모어는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레인의 혀를 자신의 혀로 감싸 안은 뒤 쭈욱 빨아들였다. 마치 기가 빨리듯 힘이 빠진 레인의 혓바닥이 추욱 쳐지자 그리모어의 혀는 그 위를 미끄러지듯 간지럽히며 지나갔다. 레인의 혀는 어떻게는 도망치려 했지만 좁은 입안에서 그리모어의 혀로부터 도망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쭈웁. 쭈웁. 일방적인 유린이었다. 그저 혀의 테크닉만으로 온몸의 힘이 빠져나갔다. 그녀는 레인의 혀를 한참 동안이나 장난감처럼 가지고 논 후에야 떨어져 나갔다. [음! 역시 디아의 키스, 상상했던 것만큼 맛있는데.] "네, 네놈! 무슨 짓을 한 거냐!" [나는 마도서지만 실체가 없어서 말이지. 그래서 용사님의 머리속에 나의 정보를 다이렉트로 주입해 준 것뿐이야. 어쨌든 이걸로 계약 의식은 끝!] 그리모어는 계약이 끝나자마자 다시 반말을 쓰기 시작했다. 이제 목적은 달성했다는 뜻이겠지. 레인은 잠시 눈을 감고 의식을 집중했다. 그리모어의 말대로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수많은 마법의 지식들이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었다. 자신이 당한 노예의 문신부터 시작해서 타인을 저주하는 주술, 재앙을 내리는 마법 등 대부분이 흑마법이었다. [아아. 도대체 얼마 만에 느껴보는 해방감인지! 자 그럼 어서 디아년을 만나서 몸을 되찾으러 가 보자고 주인님!] 왠지 그리모어는 레인 보다 더욱 의욕적으로 보였다. 자신만만한 모습에 레인은 원래 몸을 찾을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 레인은 이때까지는 일이 잘 풀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알몸으로 마왕군 앞에 서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른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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