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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화 프롤로그


"여기가 마왕의 방인가." 거대한 문 앞에 서 있는 청년은 무표정한 시선으로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그의 이름은 레인. 국가의 명을 받아 마왕을 처단하기 위해 보내진 인류의 용사였다. -후우 한숨을 내쉬며 무심한 듯 내지른 검격에 족히 3M는 넘어 보이는 문이 맥없이 무너져내렸다. 문이 부서지자 그 뒤에는 문의 크기만큼이나 거대한 홀이 모습을 드러냈다. 홀의 내부는 대체로 어두운 분위기였다. 양 벽면에 달린 횃불들의 빛은 넓은 공간을 전부 비추지 못하고 있었다. 레인은 홀의 입구부터 반대편까지 늘어서 있는 레드카펫을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네놈이 용사인가?" "······." 레드카펫의 끝에 위치한 옥좌에 앉아있는 여자가 말을 걸었다. 옥좌는 거인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할 만큼 커다란 크기였기에 그 위에 앉아있는 사람이 더욱 작아 보였다. 그녀는 연분홍빛 단발에 살짝 뾰족한 귀를 제외하면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외모를 하고 있었다. 고위 마족일수록 인간의 모습과 비슷한 경우가 많다. 아마 분위기로 미루어 볼 때 저 여자가 마족들의 정점인 마왕일 터였다. 레인은 그녀의 물음에 별다른 대꾸 없이 그저 레드 카펫 위를 걸어갔다. "더 이상 다가오면 공격하겠다!" "······." 옥좌의 옆에 서 있던 남자가 레인을 향해 소리쳤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집사복의 모습을 볼 때 아마 그녀의 비서 역할쯤 되는 최측근일 것이다. 물론 레인은 이번에도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앞으로 걷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정말로 어이가 없군. 애초에 적에게 공격한다고 협박을 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였다. 사실 문까지 부수며 들어온 레인은 누가 보기에도 침입자였기에 경고 없이 바로 공격을 했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녀석들은 그러지 못했다. 레인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공포. 레인은 이곳까지 오면서 수많은 마왕군의 간부들을 쓰러뜨렸왔다. 혼자서. 압도적으로. 눈앞의 두 녀석도 그 사실을 알기에 섣불리 공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말을 증명하듯 레인이 계속 멈추지 않았음에도 옥좌 옆의 남성은 자신을 공격하지 않고 있었다. "공격하지 않을 셈이냐?" "큭, 우습게 보지 마라!" 전형적인 B급 악당의 대사와 함께 수많은 마력의 탄환들이 레인에게 날아왔다.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눈으로 볼 수조차 없는 빠른 속도였다. 당연히 레인은 보통 인간이 아니었기에 검을 이용해 마력의 탄환들을 전부 튕겨냈다. 그러는 사이에도 앞으로 걷는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레인은 옥좌에 바로 앞까지 도착했다. 그제야 움직임을 멈춘 레인은 젋은 여성의 모습을 한 마왕에게 검을 겨눴다. "나의 이름은 레인. 마왕을 죽일 인류의 용사다." 별로 큰 의미는 없었다. 피차 서로 마지막일 테니 예의를 한 번 갖춰본 것뿐이었다. "안 돼!" 레인이 마왕으로 추정되는 소녀에게 검을 겨누자 결국 옆에 있던 남성은 참지 못하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피하기 힘든 기습적인 공격이었지만 상대는 인류의 용사였다. [집중] 레인이 눈에 힘을 주자 그의 몸이 허공에서 멈춰 보일 정도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고의 속도를 최대로 끌어올려 주변 환경이 느리게 보이도록 하는 기술이었다. 레인은 계속 마왕에게 검을 겨눈 채 무방비 상태로 공중에 떠 있는 녀석의 복부에 발차기를 날렸다. -쾅! 그가 뒤편의 벽에 부딪히고 나서야 소녀는 상황을 이해한 듯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방금 전까지 옆에 서 있던 그녀의 부하가 쓰러져 있었다. '눈으로 보이지도 않았어.' 인류의 용사가 규격 이상으로 강하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을 몰랐다. 아마 그녀 자신이 전력을 다해도 절대 그를 이길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품속에서 단검을 꺼냈던 것은 0.01퍼센트의 확률이라도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레인은 계속 검을 겨눈 상태에서 그녀가 단검을 꺼내는 것을 보고 있었다. 보통 단검이라는 무기는 실전성이 떨어지는 무기로 기습을 하지 않는 이상 더 리치가 긴 무기를 든 상대에게 공격을 적중시키기가 거의 불가능한 무기였다. 그것도 이 정도로 실력 차이가 난다면 더더욱. '최후의 발악치고는 너무 형편없군.' 레인은 겨눈 검을 마왕을 향해 내리쳤고 마왕 또한 동시에 레인의 심장을 노리고 단검을 찔러왔다. 원래라면 상대조차 되지 않을 싸움이었다. 하지만 레인은 휘두른 검날이 마왕에게 닿기 직전 검의 방향을 틀어 허공을 갈랐다. 레인의 검이 허공을 가르는 사이 그녀는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레인의 심장에 단검을 꽂았다. '그래 이걸로 끝이야.'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레인의 얼굴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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