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이도희는 이도희(2)
설명몬과 도희몬의 숨 막히는 추격전이 끝나고, 도희는 설영이에게 멱살을 잡힌 채 끌려오고 있었다.
그 모습에 사냥꾼에게 귀를 잡힌 토끼 같아 귀여워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지금 웃으면 말짱 도루묵이이니 간신히 참아냈다.
내 앞에 도희를 잡아다 바친 설영은 명령을 수행한 기사처럼 나를 보며 허리를 숙이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영의 노고를 치하했다.
내 마음과 달리, 나는 도희를 두 눈을 매섭게 쳐다보며 말했다.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조금 시간 지나고 나니 금세 차분해졌다.
“이도희. 이때까지 재밌었지?"
이유는 설영에게 들었지만, 도희에게 직접 듣고 싶었다. 도희는 내가 무서운지,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했다.
“죄송해요. 오빠. 나중에 다 말씀드릴려고 했는데… 나중에 가면 갈수록 말할 수 없었어요.”
“왜 말할 수가 없어?”
도희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오빠가 저 싫어할까 봐요. 처음에는 장난이었는데…
오빠가 저 한테 엄청 잘해주고 그래서… 그래서 저, 오빠. 이제 정말 좋아하는데 거짓말쟁이라고 싫어할까 봐, 그럼 다시 안 볼까 봐, 그게 무서워서…흑.”
도희는 세상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분노하던 내 마음에 점점 약해진다.
그러다 결국, 그 가련한 모습을 지켜만 볼 수 없었던 나는 자신도 모르게 도희를 안아버렸다.
“흑…흑. 오빠, 정말 죄송해요.”
내 품에서 도희는 눈물을 흘리며, 계속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이렇게 울 거면서, 죄송할 일은 왜 했한 거야?”
“흑… 앞으로 잘할 테니까, 한 번만 용서해주면 안 되요. 오빠?”
도희가 울먹이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용서를 비는데, 심장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과거 절세미인은 나라를 좌지우지하기도 했다던데,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바로 용서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렇게 쉽게 넘어가면 내 체면은 구겨지는 건 당연하고, 도희의 날 쉽게 생각할 것이다.
“...생각해 볼게.”
“그럼 생각해 보고 연락해주세요. 기다릴게요.”
도희는 촉촉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알았어… 나는 이만 가 봐야겠다. 설영이는 도희 좀 잘 달래주고, 갈게.”
“안녕히 가세요, 오빠.”
“...흑, 연락해주세요.”
***
한정진이 저 멀리 사라지자, 구설영은 경외 어린 눈빛으로 이도희를 바라봤다.
“와 역시 연극영화과 차석. 연기력 개쩌네. 나도 순간 진짜인 줄 알았어.”
이도희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고, 팔짱을 끼며 콧바람을 흥- 불었다. 방금 전 눈물을 흘리던 가련한 소녀가 순식간에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이다.
“흥, 맞아, 나 연극영화과를 차석으로 입학한 여자야. 이 정도야 눈물연기야 기본이지.”
“...그 연기력으로 이상한 짓만 안 하고 다니면 참 좋을 텐데.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구설영에 물음에 이도희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뭘?”
“저 오빠, 이제 안 만날 거지? 이제 만날 이유 없잖아.”
구설영의 질문에 이도희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아니, 계속 만날건데?”
“뭐야, 이도희. 진짜 저 오빠 좋아해?”
이도희는 잠시 생각했다.
“아니.”
“그럼?”
이도희는 씨익- 웃었다. 그 웃음은 평소 정진에게 보여주던 소녀의 웃음이 아니었다.
“좋아하지는 않고 사랑해.”
“...제대로 미쳤네.”
구설영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이도희를 쳐다 봤다.
컨셉 또 이상하게 잡았네-라고 생각했다.
구설영이 이상하게 보던 말던 이도희는 신경쓰지 않고 한정진에게는 보여 준 적 없는 색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한정진이 떠난 자리를 오랫동안 바라봤다.
***
집에 도착했을 때쯤, 도희에게 문자가 왔다.
대충 앞으로 잘하테니까, 용서해 달라는 장문의 문자였다.
“내가 너무 강하게 나갔나?”
나는 용서해줄 테니 너무 신경쓰지 말라고 답장했다.
답장을 마치고 양치질을 하고 있을 때,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나는 양치질에 집중하고 있어, 누구에게 전화가 온 건지 확인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받았다.
[정진 오빠?]
웬 여자 목소리다.
“누구세요?”
어디선가 들은 익숙한 목소리다.
그치만 누구인지 단숨에 떠오르지 않는다.
[나야, 혜진이. 서혜진]
“...아, 오랜만이네.”
서혜진. 과거 동거사실을 숨기고 나를 만난 여자애.
그 후 연락은 왔지만 모조리 무시했는데, 이번에는 실수로 받아버렸다.
[그러게. 오빠, 왜 이렇게 연락을 안 받았어?]
“요즘, 회사 일이 바뻐서 그랬어. 미안 해.”
나는 어린애도 안 믿을 거짓말했다.
믿던지 말던지 상관없다. 그냥 대화하기 싫다고 둘러되는 거니까.
[...그렇구나, 그럼 어쩔 수 없지. 오빠, 나 급한데 좀 도와줄 수 있어? 돈 빌려달라거나, 보증 서달라는 거 아니야.]
“그럼?”
[이상하게 들릴 줄 아는데, 한번 묻지 말고아주라.]
“부탁이 뭐길래 그래?”
[나 옷 좀 갖다줄래?]
갑자기 옷?
***
나는 집에 굴러다니는 옷가지와 슬리퍼를 종이봉투에 담아 서혜진이 말해 준 장소로 왔다. 산동 빌라 근처 상가였다.
하지만 서혜진은커녕 아무도 없었다. 불이 전부 꺼진 삼동빌라 근처 상가건물이 전부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띠리리리
“여보세요?”
[오빠, 어디야?]
“네가 말한 장소. 어디야? 안 보여?”
[상가 뒷문 열려 있어. 거기로 와줄래?]
“...알았어.”
무언가 이상했지만 나는 서혜진의 말대로 상가 뒷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는 아무도 안 보이는 내부를 향해 소리쳤다.
“나 왔어!”
그때 어둠 속에서 속옷 차림의 서혜진이 자기 중요 부위를 손으로 가린 채 나타났다.
“...이게 무슨?”
“일단 옷부터 줄래?”
서혜진은 내 손에 들린 종이봉투를 빼앗아 가듯이 가져갔고,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내가 가져다준 옷을 입고, 신발을 신은 서혜진이 다시 나타났다.
우리는 일단 밖으로 나와 편의점에서 음료를 사고 편의점 밖 테이블에 앉았다.
“이해를 못하겠는데, 왜 속옷 차림으로 있던 거야?”
“쫓겨났어.”
“...그 상태로?”
“정확히 말하면 도망친거야.”
“누구한테?”
“...남자 친구.”
서혜진의 이야기는 이랬다.
원래 서혜진이 살던 자취방에 남자 친구가 집을 구할 때까지 잠시 살기로 했는데, 남자 친구는 그대로 쭉 눌러 앉았다.
그때까지는 서혜진은 별생각 없었다. 그냥 좀 오래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서혜진이 집을 며칠 간 비울 일이 생겨, 남자 친구만 두고 갔는데, 생각보다 일정이 빨리 끝나 일찍 집으로 돌아갔다.
벨을 눌러도 안에서 반응이 없었다. 뭔가 수상해 비밀번호를 재빨리 치고 볼록한 이불을 들추니, 남차 친구가 알몸인 채로 모르는 여자와 껴안고 있었다.
서혜진은 당장 나가라고 했지만, 남자는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며 계속 버텼다고 한다.
“그래서…?”
“걔도 바람폈으니까, 나도 필거야 라는 마음으로 어플로 오빠 만난 건데… 오빠가 연락을 안 받더라.
난 바람도 제대로 못 피나 봐. 오빠, 나 한심하지?”
그러니까, 남자 친구가 바람 피니까 나랑 맞바람 피려 했다 이 말이다. 상황이 어떻게 됐든 날 기만한 건 맞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이해를 갔다.
“아니, 네가 피해자인데 뭐가 한심해. 그 새끼가 잘못한 거지. 그리고 나 정말 바빠서 연락 못 받은거야.”
“바쁘긴... 그런데 그 새끼는 누구 말하는 거야? 내 남자 친구?”
“왜 욕하면 안 돼?”
“아니 히히, 오히려 대신 욕해주니까 속 시원하네.”
“그런데 왜 속옷 차림으로 있던 거야?”
조금 전 혜진의 속옷 차림이 기억난다. 이미지와 달리 사이즈가 상당했다.
“아니, 씻고 옷 입고 있었는데, 갑자기 싸우게 돼서… 그런데 걔가 갑자기 칼 들고 설치길래. 신발 신을 생각도 못 하고 그대로 도망쳐 나왔어.”
“잘도 핸드폰은 들고 나왔네?”
“여자는 항상 핸드폰 들고 살아.”
하긴, 여자는 죽을 위기에서 핸드폰은 달고 산다.
여자는 관심 없는 남자가 카톡 보내면 한가해도 답장 안 하고, 잘생긴 남자가 카톡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바로 답장한다. 못생긴 남자는 그동안 외면해왔지만, 사실은 어느정도 알고 있을 것이다. 세상의 불편한 진실 중 하나다.
“그런데 왜 하필 나한테 전화했어. 경찰에 전화하던가, 아니면 친구한테 먼저 전화하지. 난 전화도 잘 안 받았는데.”
“경찰에게 전화하면 너무 일이 커질 것 같아서. 그리고 친구들에게는 말 못 해. 그나마 오빠밖에 없었어. 그리고 이번에는 왠지 받을 것 같았어. ”
몇 번 봤다고 이만한 신뢰가 쌓인 건지 참으로 의문이다.
“오늘은 어디서 잘 거야? 집에는 못 들어갈 것 같은데.”
“그래서 말인데 오빠, 나 오빠네 집에서 하룻밤만 자면 안 될까?”
이 여자가, 이 험난한 세상에 내가 어떻게 할 줄 알고.
“우리 집? 차라리 찜질방 가서 자는 게 낫지 않아?”
“핸드폰만 챙겼다고 했잖아.”
나는 주머니를 뒤져 지갑을 꺼냈다.
“돈 빌려줄게. 그리고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남자 혼자 사는 집에서 자겠다고 해? 남자가 얼마나 위험…”
“무슨 짓 해도 돼.”
서혜진이 내 말을 자르며 뭐라고 말하는데 나는 내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다. 아니, 확실히 들었지만 믿기 어렵기에 다시 한번 모른척 물었다.
“...어? 뭐라고?”
“오빠라면 무슨 짓을 해도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