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62. 딸바보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
#62. 딸바보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
***
어찌 보면 예정된 수순 일지도 모른다.
택시기사한테 험한 꼴을 당할 뻔하고, 고블린에게 잡아먹힐 뻔한 것을 내가 구해냈다.
스쿼드 배틀때도 나를 돕고 싶어 했지만, 결국 혼자서 출전하는 것을 택했다.
그때 이후로 그녀는 아마 내게 상당한 부채감과 동시에, 자신의 능력에 대한 부족함에 상당한 불편을 느끼고 있음이 분명했다.
언젠가부터 그녀는 아카데미 1학년 수준에서 다루는 마법을 대부분 깨우치고, 새로운 지식에 목 말라 있다.
마법이란 정형화 된 기본 마법 외에는 대부분이 학파나 가전에서 비전으로 전수된다.
전사 계열에 오리지널 어빌리티가 있다면, 마법 계열에선 시그니처 스펠이 존재하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시그니처 스펠은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보통은 학파에 소속되어 메인 마법사의 연구를 돕는 보조로 활동하며, 어깨너머로 마법을 차근차근 배워 나가는 것이 정석이다.
마치 대학원 시스템과 비슷하다고 할까.
일반인이었다면 그런 일정 또한 빡빡하기 그지없겠지만, 천재의 입장에선 조금 달랐다.
신지윤에게 필요한 것은, 지식을 쉽게 풀어 알려줄 사람이 아니라 그저 많은 양의 지식이었다.
"아저씨가 사탕 줄까?"
도리도리
"잘했다아~"
눈앞의 귀여운 천재마법 소녀의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아저씨랑 좋은 거 하러 갈래?"
도리도리
"잘했어요~지윤이 역시 똑똑하네~"
역시 천재라 그런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
"자, 그럼 아저씨가 아주 귀~한 마법서 있는 곳을 아는데 같이 보러 갈까?"
끄덕끄덕
"틀렸잖아!!!!!"
***
황금같은 주말이란 말이 있다.
주말이 황금 같으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아마 이번 주말은 내 인생 최고의 황금같은 주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퇴원 후 서연주와 황홀한 첫날 밤을 보낸 이튿날 아침,
그녀는 알몸 에이프런 복장으로 손수 아침밥을 차리고 있었다.
"선호 씨! 일어 나셨어요~?"
"누나, 좀 더 자지.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 크헉!! 뭐야, 그 복장은!"
"그으…, 첫날 밤 뒤에는 꼭 이렇게 입고, 남편 아침을 차려 줘야 된다고 들어서요…. 후훗. 마음에 드시나요?"
"흠…. 누나는 내 아무리 생각해도 '근본'이 있어. 그냥 맏며느리 감 이잖아?"
상당히 흡족해 하는 내 리액션에 기뻐하며 얼굴을 잔뜩 붉히는데, 그 자리에서 또 한바탕 안 할 수 없었다.
청소 펠라 건도 그렇고, 어디서 자꾸 그런 것들을 주워듣고 오는 지 모르겠지만 리스펙 한다.
남자의 로망을 아는 놈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녀는 아침 식사 후 자신의 SNS 및 유두브 채널을 갈아 엎겠다고 천명했다.
이제 내 초상권도 얻었겠다, 본격적으로 무언가를 할 생각인 듯했다.
그녀의 유두브 채널은 본래 가끔 올라오는 기상천외한 실험, 각종 기계 제품들의 리뷰, 일부 소수를 위한 브이로그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실 수익의 목접보다는 그저 재미로 하는 수준이었는데, 영상의 퀄리티가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유니크한 소재들이 많아 엄청난 인기가 있었다.
대부분의 과학자, 이과생들은 그녀의 채널의 구독자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거기서 나오는 수익만 하더라도 상상을 초월한 액수임에 분명할 텐데, 그걸 갈아엎고 올린다는 것 나와 관련된 컨텐츠라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긴 했다.
잠깐 채널의 목록을 보니
[일상 V-LOG] [데이트] [전투 매드무비] [남친룩] [명예의 전당] 뭐 대충 이랬던 것 같다.
수십 개의 모니터에서 편집 프로그램이 돌아가는 중이라, 조만간 다량의 영상이 업데이트 될 듯한 분위기다.
다른 건 몰라도 [데이트] 항목의 영상이 올라간다면, 아마 전 세계 수천 만의 구독자에게 고로시 당할 예정이라는 것은 명약관화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녀가 원한다면 하게 줘야지.
그렇게 행복한 아침 시간을 보내는 도중, 문득 뭔가 잊고 있는 듯한 느낌이 뇌리를 스쳤다.
귀신에 홀린 듯 스마트 워치를 뒤졌다.
▷부재중 전화
[성아리] - 18건
▷읽지 않은 메시지
[성아리] - 69건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아리나 지윤에게는 쉬리의 24시간 감시 레이더가 작동 중이다.
저번처럼 특이사항 발생 시 즉시 나와 연주 누나에게 보고가 가도록 돼 있는데, 없었다는 것은 무슨 큰일이 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근데 그게 더 무서웠다.
뚜루루..
뚜루루...
통화 대기음만 듣고 있는데도 마치 심장이 터질 듯 약동한다.
"……."
분명 받은 것이 분명한데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리야..?"
"응."
헉,헉, 다행이다.
목소리를 들어 보니, 아직 소노 수준인가 보다.
중노는 한 번 겪은 적이 있는데, 관계 도중 무심코 뒤를 건드렸다가 그 자리에서 앙탈을 빙자한 폭력에 가슴과 팔에 피멍이 들고 말았다.
물론 바로 치료는 받았지만, 확실히 마력을 쓰지 않은 맨몸으로는 이제 슬슬 감당하기 힘들 정도가 됐다.
신지윤에 이어 아리도 힐러랍시고 항상 뒤에서 구경만 하는 것은 싫었던 탓인지, 최근 신체 단련에 힘을 쏟는 듯했다.
뜻밖에 마력의 운용에 능숙한지라, 신체의 일 점에 마력을 집중하는 요령을 알려 줬더니 이제는 곧잘 쓰는 수준에 이르렀다.
아마 이제 어설픈 전위 하나는 금세 떡으로 만들지 않을까 싶다.
힐이 되는 딜러는 그 자체로 사기적인 포지션인 것이다.
"좋았어?"
"응? 뭐가?"
"좋았냐구! 연주 언니랑!"
그도 그럴 것이 퇴원 후에 아무런 연락도 없으니, 걱정을 많이 한 것 같다.
이럴 땐 그냥 대가리부터 처박아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미안.."
"뭐가 미안한데?"
좆이 되어 버렸다.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 몰라-> 모르면서 미안 해?-> 잘못했어-> 뭘 잘못했는데?-> BAD ENDING』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 알아-> 알면서 그래?-> 잘못했어-> 사과하면 다야? -> BAD ENDING』
죽음의 무한 우로보로스 루프에 빠져 버렸다.
파훼법은 무엇인가.
그녀가 화가 난 포인트를 단 한 번에 파악하고, 석고대죄하며 그녀의 기분을 풀어 주는 마법의 조미료까지 동시에 풀어야 했다.
난이도가 상당히 있었다.
"내가 갑자기 연락 안 되면, 네가 걱정할 거 예상했어야 했는데 연락 못해 줘서 미안."
"……."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정답이다.
만약 내게 회귀 능력이 없었다면,
"연주 누나랑 노느라 정신 팔려 연락 못해서 미안 해."
"하? 내가 연주 언니 때문에 화난 줄 알아?"
라는 배드 엔딩이 기다리고 있었다.
둘 다 사실을 말하고 사과한 건데, 저게 대체 무슨 차이냐?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한 놈들은 그래서 여자친구가 없는 것이다.
그녀가 화가 난 포인트는 분명 둘 다가 맞다.
좋았냐고 묻는 점에서 그녀의 질투심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여심이란 오묘하다.
우월한 수컷이 짝을 늘리는데 있어, 불만을 표하는 여성이 쿨하지 못하다고 질타를 받는 세상이다.
더군다나 그녀는 공식적으로 내 첫 번째 여자 친구.
설령 질투심이 났더라도 그것을 표출하기보다, 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길 원할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화는 나는데, 어디에 포커스를 맞춰야 할까.
'연락이 안 돼서 걱정했다'라는 것은 원론적인 문제이다.
그녀의 질투심을 표출하지 않으면서, 내게 은근한 불만을 표현할 수 있는 훌륭한 교두보가 되는 부분인 것이다.
다행히 단번에 그녀의 니즈를 충족시킨 덕에 턴은 내게로 왔다.
"미안해 정말로, 다음부터 꼭 연락할게. 내가 아리를 제일 아끼는 거 알지? 기자들 때문에 연주 누나 집에 지금 피신 온 상태인데, 여기 미쳤어. 장난 아니야."
이정도가 적당하다.
사과는 3번이나 했고, 향후 재발방지에 대한 약조와 함께 그래도 상대를 가장 아낀다고 추켜세워 줬다.
세 명 다 매력적이고 좋아하지만, 사귀어 온 시간이 아리가 가장 긴 만큼 정도 그만큼 더 쌓였다.
거기에 화룡정점으로 흥미로운 소재로 눈길을 돌리는데 성공한다면, 지옥의 루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 다음에 또 그러기만 해 봐…. 근데 뭐가 장난 아니야?"
'휴~'
다행히 잘 넘어갔다.
앞으로 신경 써야 될 듯하다.
연애 초반에 아리는 순둥이 순두부 그 자체였다.
뭐든 받아주고,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그러려니 이해해 줬다.
요즘 들어 조금씩 자신의 욕심을 표출하는 편인데, 그래 봤자, 나와 관련된 일이 대부분이다.
나를 진심으로 아끼고 생각해 주는 것이 느껴진다.
그저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약간 번거롭다는 이유로 사랑스러운 여인과 반목할 정도로 속이 좁다면, 여자를 만날 자격도 없다.
여러 여인을 거느린다는 호사를 누렸으면, 그만한 책임도 져야 남자인 것이다.
"집 겁나 커. 그리고 로봇 메이드도 있고, 정원도 차 타고 들어와야 되고 집은 SF영화 세트장이야 무슨."
5분에 걸친 남의 집 자랑과 그녀를 보고 싶다는 아부에 혹한 아리도 합류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 왔다.
연주 누나에게 아리의 합류를 허락받는 과정에 '둘만의 행복한 시간에 굳이 다른 여인을 불렀어야 하냐'라는 약간 불만 섞인 눈흘김을 받았다.
그런 가벼운 불만은 그녀의 허벅지를 베고 가슴을 베어 물고 애교를 피우는 것으로 쉽게 넘어갔지만, 나는 상남자이기 때문에 자세한 표현은 생략한다.
***
"어서와~ 아리야~"
"우와아아!!!!! 언니이~ 집 너무 예뻐요~"
두 여인은 만나기 무섭게 나는 뒷전이었고, 둘이 재잘재잘 담소를 나누는데 한참이다.
아침부터 두 여인의 간접적인 기 싸움을 몸빵치느라 내 기만 잔뜩 빨린 느낌이다.
아리와 연주 누나가 재잘대며 노는 것을 보니, 신지윤이 생각났다.
'요새 바빠 보이던데, 뭐 하고 있으려나?'
넷이 다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도 괜찮을 듯싶었다.
이제는 넷이 한 몸이나 다름없다.
최근 신지윤이 조용한 것이 불안 했다.
딸자식 가진 부모의 마음이 이러할까, 어디 내놓기 무섭게 엄한 놈에게 뺏겨 버릴 듯한 불안감을 도무지 떨쳐 내기 힘든 것이다.
얼마 전에 씹덕후 동아리에 찾아가서 마법서를 삥 뜯는 모습도 봤지만, 세상의 모든 남자가 그들처럼 순수하게 그녀를 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3D여성에 관심 없고 2D여성에 관심이 많은 놈들이라, 별 문제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마치 인형처럼 귀여운 여성이 알고 보니, 엄청난 마법의 재능이 있는 여자였다?
인재로서도, 여인으로서도 훌륭하다.
누구든 신지윤이라는 숨겨진 원석을 발견한 순간, 탐욕에 침을 질질 흘리는 것이 당연하다.
"쉬리, 지윤이는 지금 뭐 해?"
[헌터 전용 도서관 입구에서 사탕을 먹는 중.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함]
"영상 띄워 줄 수 있어?"
테이블에 홀로그램이 떠 올라 영상이 재생됐다.
물 빛 머리에 흰색 바탕에 파란색 땡땡이 원피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마치 퀄리티 좋은 피규어를 보는 듯하다.
사탕을 귀엽게 빨고 있는 모습을 잠시 감상하는 사이, 그녀를 향해 훤칠하게 생긴 금발의 남성이 두꺼운 책 서너개를 들고 다가왔다.
[지윤 씨. 여기 부탁한 마법서. 근데 지윤 씨는 나한테 항상 부탁만 하네? 이제 내 부탁도 한 번쯤 들어 주지 않겠어?]
[무슨 부탁?]
신지윤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머리위에 갈고리를 생성했다.
[내가 아버지와 함께 연구 중인 시그니쳐 스펠이 있는데, 이거 아마 학계에 발표된다면 엄청난 반향을 일으킬 예정이거든. 궁금하지 않아?]
[궁금해….]
금발의 남성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간다.
[아버지 몰래 연구 자료 보여 줄 테니까, 시간 괜찮으면 우리 집에 같이 가지 않을래?]
[그게 부탁?]
[음~ 이건 부탁은 아니고, 부탁은 가서 말해줄게.]
'당연히 거절하겠지?'
신지윤이 평소엔 맹한구석이 있어도, 저런 속이 빤히 보이는 음흉함은 귀신 같이 걸러 피할 줄 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갈래….]
거기까지 들은 기억이 난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도로를 전력으로 질주하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