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악마는 빌런일까?
온몸에서 비명을 지르는 통에 더 이상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직 여관 창으로 햇빛이 들지 않는 것을 보니 시각은 아마 새벽즈음이 되지 않았을까.
삭신이 쑤시는 것도 모자라 사지가 묶인 채 잠들어서 꼼짝을 할 수도 없었다.
마치 자기 소유권을 주장하기라도 하듯 나를 감싸 안고 색색 숨을 뱉는 얼굴을 보니...
아기들이 깨어 있을 때에는 빼액 빼액 울어서 악마가 따로 없다고 하다가도
잘 때는 그 순수한 모습에 사랑스럽다고들 하지 않던가.
그만큼 잘 때에는 이뻐보인다는 말이 있는데.
면상을 갈기고 싶다.
당장 이 묶인 팔을 풀고 나와 저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묘하게 미소를 짓고 자고 있는 저 면상에 스트레이트를 꽂고 보디블로를 존나게 갈기고 싶다.
“씨발년 존나 잘자네.”
강간범이 뭐 저렇게 편히 자는지. 아주 푹 골아떨어진 그녀에게서 벗어나려 몸을 들썩여 내 팔을 두른 손부터 치워 낸다.
그나마 꽉 붙들고 자고 있지 않아서 탈출은 쉬웠다.
팔을 들고 위쪽으로 공간을 만들어 지렁이가 기어가듯 스르륵 굴러 나가니 반대로 자고 있었는지 침대 아래쪽으로 빠져나와 침대 바닥에 풀썩 떨어진다.
그녀의 품에서 금방 빠져나온 내 꼴은 아주 엉망이었다.
허리 아래로는 애액에 절여지듯 잔뜩 젖어 있는 바지와 속옷, 그 찝찝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셔츠는 어떠한가.
자기 흥분했다고 지 멋대로 잡아 뜯어 찢어 버리지 않았는가.
이런 과격한 섹스, 솔직히 좋아한다.
여자가 남자에게 미쳐서 잔뜩 달려드는 상황, 누구나 꿈꾸고 탐내는 상황이 아닐까.
하지만 역시 강간당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건 내가 살살 꼬드긴 것도 아니고 정말할 마음이 없었던 것을 강제로 취한 것이 아니던가.
너도 즐겼잖아. 같은 말을 듣는다면. 솔직히 쾌감은 있었지만 기분은 좋지 않았다.
“씨발 그때 도망쳤어야 했는데.”
셔츠는 다 뜯어져서 팔에 걸쳐만 있을 뿐 가슴이 훤히 드러난다.
누군가 이 꼴을 본다면 솔직히 또 강간을 당할까 봐 겁이 났지만 지금이 아니면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어쩔 수 없어. 지금이 아니면 답이 없잖아.”
반라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여관을 나온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카운터를 지키고 있는 여관주인은 카운터 안쪽에 들어가 누워 자고 있어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 여관을 두 번이나 들어왔을 때 나를 바라보던 눈빛이 심상치 않았던 아줌마였지...
여관을 나오니 아무리 여름이 다가오고 있는 봄이라 해도 새벽에는 서늘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약한척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찬공기를 맞으니 자연스레 으슬으슬 떨려오는 몸. 양팔로 내 몸을 최대한 감싸 안고서 파르르 떨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긴다.
‘왜 누가 자꾸 날 보고 있는 것 같지?’
셔츠가 없어 반라의 모습이라 그런지 자꾸만 주변에서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 걷는 내내 주변을 둘러본다.
기분 탓일까. 확실히 이 새벽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 눈으로 보아도 아무도 없는 것을 보니 누군가 본다면 큰일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만들어 낸 가상의 인기척이 아니었을까.
‘만약 이 모습을 누가 본다면...’
상상만 해도 오싹해지는 순간.
빨리 어디든 들어가야겠어.
여기서부터 세실라의 집까지는 거리가 꽤 되었다.
목욕탕까지의 거리도 마찬가지.
이 모습을 보고도 나를 보호해 줄 사람이 있을까?
‘아, 있네.’
아마도 이 모습을 보고도 나를 강간하지 않을... 아니, 어쩌면 화간이 될 수 있지만 나를 보호해 줄 사람이라면 한 명 있지 않은가.
사람이 아니라 악마였지.
여관과 욕탕의 중간쯤 되는 곳이니 그렇게 멀지도 않았다.
삼십 분 정도 빠른 걸음으로 걸으니 금방 그녀의 집에 도착했다.
달이 슬슬 거의 다 저물어가고 있긴 한데, 일어나 있을까?
‘몰라, 일단 자고 있더라도 깨워야지.’
끼익-
“무슨 일... 어머, 몰골이 왜 이래요?”
문을 두들기려고 주먹을 들자, 타이밍 좋게 그녀가 먼저 문을 열어 나를 맞이해주었다. 아마 조금만 문을 여는 것이 늦었다면 실수로 그녀의 얼굴에 노크를 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완벽한 타이밍.
그녀는 순식간에 나의 모습을 발끝부터 얼굴까지 천천히 훑어보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일단 들어와요.”
“고마워. 미안한데 샤워부터 해도 될까?”
“네, 누가 보기 전에 얼른 들어와요.”
휴일에 몇 번 들렀다고 제법 익숙해진 그녀의 집.
찬 물로 샤워하고 나니 안 그래도 찬 바람을 맞으며 걸어와서 그런지 온몸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샤워를 마치고 옷을 입으려 했지만 어느새 내 옷을 빨아두었는지 축축하게 젖은 옷이 방 천장에 걸려 있었다.
이러면 나는 뭐를 입으라고?
“다 씻었어요?”
다정하게 나를 부르는 그녀의 손에는 흰색 원피스가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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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이 있었군요. 힘드셨겠네요.”
“그래, 고생했지... 그러니까 나 좀 쉬게 해 줄래?”
“왜요? 지금 쉬고 있잖아요.”
“아니, 좀 편하게 눕고 싶은데.”
“그래요? 지금 내가 불편하다는 소리예요?”
“무슨 말인지 알잖아.”
“모르겠는데요.”
그녀가 건네준 흰 원피스 한 장. 그래도 방 자체가 따듯해서 춥지는 않았지만 따듯한 이유는 다른 이유가 더 컸다.
내 등 뒤에 앉아서 양팔로 어깨를 감싸 나를 품 안에 가득 끌어안고선 아까부터 머리 위에 얼굴을 부비고 있는 것이 영 불편해서 편히 쉴 수가 없었다.
반쯤 몸을 그녀에게 기대어 눕고 있었지만 누군가의 몸에 눕는 것은 어색할뿐 더러 마치 그녀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것 같아서 그녀의 가슴팍에 마음 놓고 푹 기대어 있을 수도 없었다.
“이상하다. 원래 남자들은 이렇게 다정하게 대해주면 녹아내린다고 했는데.”
“뭘 녹아. 그보다 빨리 놓아달라니까.”
“싫어요. 미안 하지만 나 조금 화나기도 했는걸요.”
“화가 나다니. 왜?”
“그걸 몰라서 물어요?”
“알면 물어보겠어?”
화라니. 어디서 화가 날 포인트가 있었지?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모르겠다. 내가 그사이에 뭘 한 것도 아닌데.
“하여튼 남자는 여자 마음을 정말 모르네요.”
“거기서 여자 마음이 왜 나와?”
“저도 악마지만 여자니까요?”
그래, 맞는 말이지. 그래도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는데.
한참을 말없이 고민하고 있자 그녀는 작게 한숨을 푹 내쉬며 나를 꼬옥 더 끌어안는다.
“내가 하나하나 다 설명해 줘야 하다니. 내 입으로 말하기 얼마나 민망한 줄 알아요?”
“음... 미안?”
“됐어요. 말 안 하면 평생 모를 테니까. 저는 그냥 말하고 살래요.”
“그래서, 뭐에 화가 났는데?”
“그 여자는 왜 따라갔어요? 그렇게 난폭한 여자를. 누가 봐도 당신 따먹으려고 부른 거잖아요. 네? 그리고 옷은 왜 저렇게 야하게 입고 나갔어요? 따먹어달라고 아주 광고를 하셨네요.”
“저게 그렇게 야한 옷은 아니잖아? 그냥, 어제 일할 때 입은 옷 그대로 입고 나간 건데.”
“야하다구요. 야해요. 당신은 뭘 입어도 야해요. 그래서 따먹고 싶어지는 걸 내가 매일 참고 있는 건데.”
“그건 내 잘못이 아니잖아.”
“그리고 제일 화가 나는건... 나한테 화가 나는거예요. 당신이 그렇게 될 때까지 그 난폭한 여자한테서 당신을 구하지 못했다는 거요.”
“그건, 네가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일이잖아.”
“그래요, 몰랐으니까 어쩔 수 없죠. 근데 그게 싫은거예요.”
꼭 자기 애인이 어디 나가서 당하고 왔다는 말에 분노하는 모습이지 않은가.
솔직히, 조금 많이 감동했다. 그녀가 어느새 나를 이렇게 생각해주고 있었다는 게.
언제나 내 편이 되어 줄 사람이 한 명 생겼다는 것에 든든한 마음이 들기도 했고.
무엇보다 솔직히 서큐버스인 그녀에게 가면 또 따먹힐거로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따먹기는 고사하고 먼저 나를 걱정해주는 모습이 감동이었다.
“고마워, 그렇게 걱정해주고 화내주어서.”
팔을 뒤로 넘겨 그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준다.
막 자다가 일어난 건지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평소처럼 윤기 나던 것도 아니었지만 나를 걱정해준 고마운 마음에 대한 보답이라도 하듯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니 그녀의 몸이 살짝 움찔거렸다.
‘귀엽네. 이런 다정한 모습에 약한 건가?’
“당신, 제가 말 했죠?”
“뭐를?”
“당신은 뭘 입어도 야하다고.”
“그랬지?”
“그렇게 야한 모습으로 이런 다정한 손길하면 여자는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여자가 어떻게 되냐고?
“그걸 내가... 흡!”
그녀는 나의 다정한 손길에 발정이라도 했는지, 어느새 머리 위에 뿔이 돋아난 채로 어깨 위를 감싸던 손이 천천히 내려와 원피스자락을 들춰내어 내 자지를 한 손으로 크게 잡고선 내 목덜미를 입술로 물어 오물거렸다.
“따먹고 싶어지는 법이예요. 이건 당신 잘못이예요. 알아요? 당신이 따먹어달라고 유혹한 거니까.”
방금 생각했던 것들 전부 철회.
역시 이 년도 여자였다.
“얌전히 따먹혀주실래요? 벌써 이렇게 흥분하셨는데.”
어느새 그녀의 손아귀에 들어간 자지는 몇 번을 사정했는데도 단단하게 솟아 발기한 자지가 손안에서 껄떡거리고 있었다.
“즐겁게 해드릴게요.”
악마 같은 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