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EP043-꿈
“…….”
몸이 둥실, 떠다니는 기분.
사방이 안개로 자욱하다.
주변에서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꿈인가?”
이게 말로만 듣던 그 자각몽인가 뭔가 하는 그건가.
근데 꿈이라고 해도 뭐가 보여야지….
주변이 온통 뿌옇기만 하고, 위아래를 구분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데.
“저기, 저쪽에… 뭐지?”
저쪽에 뭐가 보이는 것 같다.
안개 속에서 사람처럼 보이는 실루엣이 흐릿하게 일렁이고 있다.
어떻게 가지, 고민을 해보기도 전에 몸이 둥실 떠오르면서 실루엣이 있는 쪽으로 서서히 가까워진다.
“…….”
여전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안개 속에서 조금씩 인형에 가까워지던 중.
어느 정도 가까워졌지만, 실루엣은 여전히 검은색으로 번져 있어 사람보다는 그림자에 가깝게 보인다.
“…….”
똑-
물방울이 떨어져 바닥에 부딪히며 터지는 소리.
자세히 보니 실루엣에서 검은색 액체가 흘러내리는 것 같다.
“저….”
“…….”
충분히 가까워졌다는 생각에 그림자에게 말을 걸어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애초에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새까맣고, 칙칙하고… 사람이 아니라 석상인가 싶은 생각이 들 때 즈음.
“…어?”
붉은 빛이 그림자의 얼굴 쪽에서 피어난다.
빛은 방금까지 아래로 뚝, 뚝 흘러내리던 물에 스며든다.
물이 흘러내리는 궤적이 비로소 선명해진다.
“…….”
눈물.
붉은… 눈물.
“뭐… 뭐야?”
붉은 눈물을 담아내려 눈을 덮은 손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결국 범람한 액체가 주르륵- 흘러내린다.
나였다.
새까맣게 그을은 내가 소리없이 울고 있었다.
***
“…이런 개꿈은 또 처음이네.”
꿈의 마무리까지 완벽하게 말아먹은, 뒤숭숭하기 그지없는 개꿈.
만약 꿈을 돈 주고 사는 시대가 온다면 이런 꿈은 유통기한이 끝날 때까지 팔리지 않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현대인. 귀신, 꿈, 사주, 기타 등등, 영적인 영역에 있는 것들은 거의 믿지 않는 현대인이다.
아, 참. 히어로는 진짜니까 믿는다.
“어라? 오빠! 좋은 아침!”
“…은지야.”
“오늘은 일찍 일어났네?”
내 혼잣말을 듣고 방문을 슬며시 열어본 은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표정이 퍽 귀엽다.
요즘에는 내가 일을 하지 않다 보니 평소보다 늦게 일어나는 일이 잦은데… 오늘은 조금 일찍 일어난 것 같다.
“조금만 기다려! 아침 다 됐어.”
“으, 음… 천천히 해.”
이상한 개꿈을 꿔서 그런지 머리가 조금 지끈거린다.
그래도 기름지면서 고소한 냄새가 열린 방문 사이로 들어와 식욕을 자극해준 덕분에 기분이 살짝 들뜬다.
출근을 하는 은지가 아침밥을 만들고 백수인 내가 늦잠을 자는 이 상황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관성이라는 게 생각보다 크더라.
거의 몇 년 동안 은지가 아침을 만들어왔고, 여전히 은지는 나보다 일찍 일어나서 아침을 만들어준다.
“오빠! 나와, 먹자!”
“지금 갈게.”
앞치마를 입은 은지의 모습은 몇 번을 봐도 사랑스럽다.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된다면 이 모습을 매일 볼 수 있는 걸까?
아니, 지금도 매일 보고 있으니까 큰 차이는 없나….
그래도 결혼은 하고 싶긴 해.
“오늘은 출근해서 특별하게 할 일 있어?”
“음… 아니! 평소랑 똑같지 뭐.”
식탁에 앉아서 식사를 시작한다.
사실, 우리가 같이 동거를 하게 된 계기가 바로 아침 식사다.
예전의 나는 아침을 거의 매일 거르곤 했다.
그런 내가 걱정이 된다며 도시락을 싸주던 은지는 어느 날, 갑자기.
‘오빠, 우리 그냥 같이 살까? 내가 맨날 아침 해줄게.’
‘…아침 해주겠다고 같이 살자는 거야?’
‘웅. 맨날 도시락 싸는 것보다 그게 더 좋을 것 같지 않아?’
그렇게 동거가 시작됐다.
현실적인 문제들은 뒤로 미뤄둔 채, 그냥 나에게 매일 아침을 먹여주고 싶다는 이유로.
너무 단순하다고? 그게 낭만이고, 그게 좋은 거야.
“맞아. 어제 부탁한 건… 할 수 있겠어?”
“그, 그럼~ 문제없어! 사진 한 장만 찍어서 보내고, 사흘 동안 조금씩… 쌔게?”
“응. 어제 매튜 씨한테는 연락을 못했으니까, 은지 네가 말해줄래?”
“웅!”
조금은 다행이다.
의기소침한 모습에서 다시 이렇게 밝은 모습으로 돌아와준 네가.
그럼 이제 걱정해야 할 사진이랑 망상은….
사흘 중에 첫날인데, 그럭저럭 버틸 수 있겠지?
***
“네, 네?”
“정리하자면… 불필요한 신체 접촉을 줄일 필요가 있겠습니다.”
“왜… 왜요?”
“…헤이즈. 원래 그게 당연한 겁니다.”
“아, 아… 그, 그건 맞지만, 오빠가….”
어… 어어, 이건 예, 예상 못했는데?
나 오빠한테 문제없다고 큰소리 뻥뻥 치고 나왔는데, 지부장님이 이렇게 나와버리면….
“혹시 오늘 승윤 씨가 부탁한 일이 있습니까?”
“네… 네에.”
“…그 부탁이라는 게 어떤 내용입니까.”
그래도 오빠가 자세하게 설명해준 덕분에 매튜 씨에게 사정을 말하는 데에 어려움은 없었다.
의사 선생님이 자리를 비운 동안, 하루에 사진 한 장.
조건은 내 살에… 손이 닿고 있어야 하고.
“의사가 그걸… 지시했다고 하셨습니까?”
“네… 자기가 돌아오는 날까지, 오늘부터 사흘 동안요.”
“…….”
뭔가 고민하고 계시는데.
의사 선생님을 의심하는 건가? 그, 그런 거라면 좋겠다!
이 참에 그냥 잘라버려요, 지부장님…!
“…하아.”
“어, 어떻게 하실 거예요…?”
“…….”
“…….”
“직접적인 행위가 필요하지 않으니… 협조하겠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대체자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에? 대… 대체자요?”
“네. 제가 직접 심사할 예정이니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어… 그, 그….”
대체자? 그럼 이제 매튜 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랑 하, 한다고?
…괜찮은 건가? 나, 좀 무… 무섭기도 하고, 왠지 긴장되는데.
오빠는? 이따가 오빠한테 말해주면 오빠는 뭐라고 할까…?
“지난 관계를 통해 이젠 알고 계시겠지만, 제… 성향이 조금 불안정한 관계로.”
“…아.”
“이 역할을 맡기엔 위험성이 높다고 판단됩니다.”
“.......”
“지금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앞으로의 일은 장담할 수 없으니… 말씀드린 것처럼 대체자를 찾아보겠습니다.”
성향… 지난번에 호, 호텔… 그거 때문인가?
…따지고 보면 그 날에 해버린 것도 나 때문인데.
내가… 뭔가 계속 일을 망치고 있는 것 같아.
“우선, 오전의 순찰 임무는 예정대로 헤이즈에게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에, 에… 아, 알겠습니다아….”
“촬영은… 오후 훈련에 맞춰 진행하도록 하죠. 그럼.”
매튜 씨에게 인사를 하고 사무실에서 돌아서 나왔지만, 마음이 조금… 이상하다.
물론 나는 아직도 매튜 씨와 하는 것보다 오빠랑 하는 게 훨씬, 훠어어어얼씬 좋다.
그런데 매튜 씨와 하는 거랑, 새로운 사람이랑 하는 거라면… 다, 당연히 매튜 씨랑 하는 게 편한 거 아니야…?
게다가 오빠도 알고 있는 사람이고, 협회 지부장에 전직 히어로라는 신원도 확실한 남자잖아.
“여기 서서 뭐해? 은지.”
“꺄아아악!! 어, 언니이! 뒤에서 갑자기 말 걸지 말아주세요…! 저, 저 심장 약한 거 아시잖아요….”
“복도에 가만히 서있는 사람이 잘못한 거지.”
“마, 맞아요. 언니…! 지부장님이 이제 저랑 오빠, 도와주는 거 그만하겠대요.”
“…지부장님이?”
“네! 다른 사람, 지부장님이 직접 뽑아서 데려온다고 하시는데… 저 어떡해요?”
“뭘 어떡해. 그냥 하면 되는 거지.”
그, 그게 말처럼 쉽게 되냐구요…!
평범하게 말 몇 마디 나누는 것도 아니고, 야… 야한 짓을 잔뜩 해야 하는데!
“혹시 지부장님이랑 하는 게 좋아졌어?”
“서, 서, 설마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언니!!”
“난 좋은데.”
“…….”
“농담.”
“…퓨후우.”
일단 이건… 나 혼자서 생각할 문제가 아닌 듯해.
오늘은 첫날이니까 사진도 크게 걱정할 필요 없을 것 같구.
문자로 할 얘기도 아닌 것 같고… 이따가 집에 가서 오빠한테 말해보자.
“내가 지부장님한테 말해볼까?”
“네? 뭐, 뭘요?”
“계속 너랑 해달라고.”
“어어, 에. 아니… 그, 그건 제가 결정할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그래? 그럼 승윤 씨한테 전화해서 물어볼까?”
“제, 제가! 제가 오빠랑 말해볼 테니까, 언니이….”
이 언니는 너, 너무 직설적이라니까.
“아무튼 순찰 잘 하고 와.”
“네에에에….”
“표정 피고. 울상으로 순찰하다가 카메라에 찍히면 뉴스 탄다?”
“…으, 윽.”
더스트 언니는 내 어깨를 두드려준 다음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이제… 순찰을 하러 가야 하는데.
발걸음을 떼는 게 쉽지 않다.
“…후우.”
아, 아니야! 벌써부터 괜한 걱정하지 말자.
일단은 순찰에 집중하고, 오빠가 부탁한 사진부터 신경을 쓰자.
…근데, 말처럼 쉽게 집중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
“으으우… 어, 어떡하지? 막, 막 무서운 사람이 뽑히면, 나….”
한숨만 폭폭 내쉬어봤자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계단을 타고 협회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가서… 약간 무거워진 마음과 함께 순찰 임무를 시작할 뿐이다.
<오빠! 이거, 오늘 사진. 그리고 이따가 집 가서 말해줄 거 있어!
막 심각한 이야기는 아니니까 괜히 걱정하지 말구! 이따 봐!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