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EP022-의사
불행인지, 다행인지.
은지에게 매튜 씨와 관계를 맺고 와달라는 부탁을 한 건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망상이 시작되는 순간의 장면들이 불쑥 머릿속에 튀어나오는 일은 있어도, 그걸 참고 누르는 데에 성공하고 있다.
“음… 청소는 했고, 빨래도 끝났고….”
오늘도 은지는 히어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아침 일찍 출근을 했다.
나는 물론 거의 온종일 집에만 있는다.
최근 마스터마인드의 동향이 파악되지 않는다며 매튜 씨가 직접 연락을 해서 주의를 주었기에… 괜히 까불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책이나 영화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틈틈이 비는 시간이 생긴다.
그럴 때에는 은지가 나오는 뉴스나 동영상을 찾아보고 있다.
점점 참가하는 임무가 늘어나고 있는 은지의 실적이 쌓이는 걸 기록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하지만 댓글은… 거의 보지 않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헤이즈 볼때마다 느끼는 건데 진짜 가슴 존나 크네’
‘뿌아아아아아앙ㅋㅋㅋㅋㅋ’
‘제발 한 번만 주무르게 해다오….’
“…….”
…이런 댓글들이 거의 절반이 넘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또 남는 시간에는 조만간 있을 은지와의 기념일에 줄 선물도 고민하고 있다.
2000일. 은지가 기념일을 챙기는 편은 아니긴 해도, 그냥 넘기기엔 아쉬운 숫자다.
“선물… 근데 어지간한 선물들은 거의 다 줘봐서 이젠 고르는 것도 어렵네.”
게다가 이젠 S급 히어로가 된 은지의 벌이가 상상 이상으로 굉장하기에, 값비싼 선물보다는 의미가 있는 게 좋을 거다.
마땅한 후보가 생각나지 않아서 고민만 하고 있던 그때, 휴대폰이 울리면서 전화가 왔음을 알려준다.
“…매튜 씨?”
매튜 씨와 대화를 하는 게 어색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역시 거짓말이다.
그야 은지가 말해준 것들 이상의 일들을 했을 지도 모르는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기에.
두 사람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당장 오늘이라도 두 사람이 호텔에 가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여보세요?”
‘승윤 씨. 전달드릴 사항이 있어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통화 괜찮으십니까?’
“네, 당연하죠. 말씀하세요.”
오히려 이 사람의 사정을 알게 되니 조금은 도와주고 싶기도 하고….
물론 내 코가 석자다. 누굴 도와주겠다며 오지랖을 부릴 처지가 아니다.
‘협회의 치료 센터에서 승윤 씨를 전담하던 담당의가 테러에 휘말려 가벼운 사고를 당했습니다.’
“사고요?”
‘예. 큰 부상은 아니지만 정상적인 근무가 불가능하기에, 다른 대체자를 찾긴 했으나….’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신원은 확실합니다. 최근 몇 달의 기록에 공백이 있지만 분야에서는 손꼽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 음… 괜찮은 거 아닌가요?”
‘진료와 치료 과정에서 수상한 점이 느껴진다면 즉시 저에게, 혹은 헤이즈에게 말씀하셔야 합니다.’
갑작스럽게 구한 대체자라서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다는 뜻이구나.
근데 사실, 치료는 은지와 매튜 씨에게 부탁하는 식으로 진행을 늦추고 있으니까… 뭔가 크게 부탁할 부분은 없을 것 같은데.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오후에 진료를 한 번 받아보고 말씀드릴게요.”
‘확인했습니다.’
“그럼….”
‘아, 지금 옆에 헤이즈가 있는데… 잠시 통화하시겠습니까?’
은지가?
아니, 엄청나게 이상할 일은 아니긴 한데….
“어… 네.”
‘…오빠! 뭐하고 있었어?’
평소처럼 밝은, 웃음기가 느껴지는 은지의 목소리다.
…거친 움직임에 뒤따라오는 가쁜 기색은 전혀 없다. 조금도.
“그냥 청소하고, 이제 치료 센터 가보려고. 은지 너는?”
‘나는 방금 지부장님이 말씀하신 테러 현장 왔어. 같이. 마스터마인드가 한 거라는 말이 많아서.’
“그래?”
…후.
참아본다. 멋대로 튀어나온 망상이 시작되려는 것을.
순간, 아주 잠깐이지만 인파 속에서 매튜 씨가 은지의 엉덩이를 움켜쥐고 주무르는 순간이 떠오르긴 했지만….
슈트 위로 커다란 손이 우악스럽게 엉덩이를 붙잡아 말캉한 살덩이를 멋대로 일그러트리는 장면은, 비교적 참을 만 하다.
한참을 주물러대던 손을 떼어내도 끝나는 게 아닌, 오히려 반대쪽 엉덩이까지 확실하게 붙잡아버리겠지.
순간 속 은지는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허리를 살짝 뒤로 빼내며 그 손아귀에 살집을 살짝 밀어넣는다.
그게 전부였다. 말도 안되는 망상을 억누르는 건 이제 이렇게… 혼자서도 해낼 수 있다.
‘아, 우리 이제 가볼게! 이따가 연락할게, 오빠?’
“응. 수고해. 몸 조심하고.”
전화 끝.
지금처럼… 충동적으로 불쑥 망상이 튀어나오는 경우는 있어도 의지로 억누를 수 있는 정도다.
전부 은지와 매튜 씨의 덕분이다.
…그러니 효과가 떨어질 때 즈음에는 또다시 부탁을 할 수밖에 없겠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아내거나.
“…진료나 받으러 가자.”
***
사람의 첫인상은 무척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늘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 말을 신중하게 선택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나처럼 신경을 쓰는 건 아닌 모양이다.
“마조?”
“…네?”
“진료 기록에 망상 – 피학이라는 부정형 특성이 적혀 있길래.”
“어… 네.”
“마조 맞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대뜸 마조히스트라고 부르는 이 의사, 대체 뭘까.
매튜 씨가 실력은 분명 뛰어나다고 했으니까, 일단은 좀만 참아봐야 하나…?
“음… 딱히 당장 처방해야 할 약은 없고.”
“…….”
“아, 정신 오염을 늦추는 방법을 본인이 찾았다고 하던데요?”
“맞아요.”
“뭔데요? 말해봐요.”
“구, 굳이 말해야 하나요? 이전 의사 선생님은 효과만 있으면 된다고 했어요.”
“잘못된 방법인지 아닌지 확인해야 하니까요.”
…맞는 말이긴 한데, 이걸 말을 해야 해?
이 의사…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 기분이야.
“…….”
“말 하기 싫으면 됐어요. 어차피 마조히스트가 방법을 찾아봤자 뻔하지.”
“…예?”
“뭐… 여자친구한테 밟아달라, 욕해달라, 그런 방법 아닌가?”
“저, 전혀 아닌데요?”
그것보다 심하다면 더 심한 방법인데.
그리고 저런 망상을 아예 하지 않은 것도 아니긴 해….
“음… 망상 계열이면 직접적인 고통보다 상상으로 괴로움을 증폭시키는 성향이 생기긴 했겠네.”
“…….”
“맞죠?”
“…네.”
“최악은 아니긴 한데, 흐음....”
실력은 분명 있어 보여. 매튜 씨가 말한 것처럼.
근데 좀… 인간적인 면모가 없어 보인다고 해야 하나.
“다음에 여자친구 한 번 데리고 와요.”
“…왜요?”
“망상을 늦추는 방법을 조금 바꿔보려고.”
“바빠요. 여자친구.”
“어차피 여기 협회에서 일하는 거 아는데. 잠깐 들리는 것도 못할 정도로 바쁘나?”
“…….”
“아, 혹시… 다른 남자랑 떡치고 다니느라 바쁜 건 아닌가?”
“…네?”
조금 방심하고 있던 것 같다.
의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테러 현장에 있을 은지와 매튜 씨의 모습의 한 순간이 그려진다.
인파로부터 조금 떨어진 골목에서, 애써 허리의 높이를 맞추려 까치발을 든 은지와-
“어땠어요? 방금 자극. 망상에 반응 있었어요?”
“…….”
순간 이 사람, 미친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의사는 아주 평온하고 덤덤한 표정으로 손에 올린 펜을 빙글, 빙글 돌리며 말을 이어간다.
“흠… 생각보다 컨트롤을 잘 하네. 근데 계속 참는 건 오히려 악영향이 될 수도 있으니까 다음에는….”
“허어… 아, 아니, 방금….”
“이거, 다음 진료까지 해당 사항 체크해서 가져오시고. 다음엔 여자친구랑 같이 오시고.”
제법 두께가 있는 종이 뭉치를 나에게 떠넘긴다.
흘깃 살펴보니 질문과 나에게 맞는 답변을 체크하는 설문지다.
“그럼 잘 가요.”
“끄… 끝이요?”
“왜요? 방금 같은 말을 더 듣고 싶은 거라면….”
“예? 그게 무, 무슨…!”
“아니면 말고.”
그 말을 끝으로 손을 휙휙 흔들고는 고개를 책상 위 모니터로 돌려버린다.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서있다가 겨우 걸음을 돌려서 진료실을 빠져나온다.
문 앞에 걸린 명패에 적힌 이름… 레나 이바노프.
이 의사, 이상한 사람이다. 그것도 아주 많이.
***
“신기한 사람이네. 뭐! 세상엔 이런저런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래도 분명… 실력은 있어 보이더라.”
“그래?”
“그래서 좀 더 짜증나.”
은지가 살짝 웃는다.
내 얘기를 들은 은지는 다음에 같이 치료 센터에 가봐야겠다는 말에도 흔쾌히 수락을 해줬다.
날이 갈수록 은지는 바빠지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시간을 쓰게 만들어서 미안할 따름이다.
“근데… 은지야.”
“웅?”
“뭐 가지고 싶은 거 없어?”
“엥? 갑자기?”
“곧 2000일인데. 요새 데이트도 잘 못하잖아, 우리.”
은지는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다는 듯 커다란 눈을 깜빡이더니, 한 박자 늦게 화들짝 놀란다.
“마, 맞다! 벌써 그렇게 됐네…?”
“하하… 그래서, 뭐 없어?”
“으음… 선물? 그, 그럼….”
잠시 고민을 하는 은지.
처음에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살짝 희미한 홍조가 뺨에 번지면서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연다.
“하… 하나, 있는 것 같은데.”
“뭔데?”
“소, 속옷… 오빠가 골라주는 걸로.”
“속옷? 어… 근데 슈트 입으면 속옷 못입잖아.”
“그러니까! 반대로 오빠랑 있을 때는 입을 수 있잖아.”
하긴. 은지가 슈트를 입고 활동할 때라면 오히려 내가 같이 있기가 어렵지.
속옷… 내 취향이라고 할 건 없지만, 그래도 은지에게 어울릴 만한 걸로 골라볼까.
은지는 피부가 새하얀 편이니까 검은 색이 어울릴 것 같긴 한데….
검은색… 검은색 속옷을 입은 은지.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남자는….
“오빠는? 오빠는 없어?”
“…어?”
“선물!”
“나는… 생각나면 말 해줄게.”
“꼭 말해줘야 해! 알겠지?”
“그럼.”
한 순간 다시 망상이 튀어나왔지만… 이번에도 짧은 장면을 보는 것으로 끝낼 수 있었다.
그래도 은지랑 얘기를 나누다보니 벌써 커피 한 잔을 다 마셔간다.
문득 아까 의사에게서 받았던 설문지 묶음을 테이블에 놓아둔 게 눈에 띄어서 내 앞으로 가져온다.
“뭐야, 그건?”
“의사가 다음 진료까지 체크해서 가져오라던데.”
“나도! 나도 같이 볼래.”
내 앞에서 옆으로 자리를 옮긴 은지와 함께 설문지의 첫 문항을 읽어본다.
‘나는 여자친구(혹은 남자친구)에게 성적인 조롱을 당하는 상상을 하며 자위 행위를 한 적이 있다 [ Y / N ]’
“…….”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했지?”
“그… 그, 그렇네….”
당연히 N에 체크.
…이거, 다른 문항들은 혼자 있을 때 체크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