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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EP009-실수


“음… 챙길 것들은 다 챙겼고, 다른 짐들은 미리 다 보냈고….” 이사를 간다. 이전에 더스트 씨가 주고 갔던 서류에서 봤던 히어로 안전가옥으로. 은지에게 얘기를 꺼냈더니 적극적으로 동의하기도 했고, 매튜 씨의 권유도 있었다. “막상 떠나려고 하니까 조금 아쉽긴 하네.” 원래 살던 집은 히어로 협회에서 관리해준다고 해서 거의 몸만 가도 되는 수준이긴 하다. 그래도 사는 곳이 바뀐다는 건 마냥 가벼운 일이 아니니까. “그 빌런이 잡히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는 건가…?” 우리의 일상을 망가트린 빌런, 마스터마인드. A급이라고 했지? 은지는 S급이니까 은지가 더 쌘 거네, 그럼. 빨리 잡혀버리기나 하라지. “…….” 마지막으로 집 안을 슥 둘러본다. 은지와 나의 짐은 미리 협회에서 가져갔지만, 여전히 소소한 물건들이 조금 남아있다. 5년이나 은지와 함께 살았던 이 집. 언젠가 걱정할 거리가 전부 사라지면, 다시 은지와 함께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다. 함께. *** 은지는 오늘도 훈련에 참가하기 위해 협회에 갔다. 저녁에는 새 집으로 돌아오기로 했으니 지금은 우선 나 혼자 안전가옥으로 가면 되는데…. “여기… 맞나?” 우리가 원래 살던 집도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이건… 겉으로 대충 봐도 억소리가 나올 것처럼 으리으리한 아파트다. 누추한 내가 이런 곳에 발을 들여도 되는 건가? “…주소는 맞는데.” “승윤 씨.” 낯익은 있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거구의 사내가 아파트 단지 입구에 서있다. 스쳐가는 행인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정도의 존재감을 내비치는 남자, 매튜 씨다. “매튜 씨? 지부장님이 여긴 어쩐 일로….” “안전가옥을 마지막으로 점검했습니다. 제가 직접.” 지부장이나 되는 사람이 엄청… 적극적이네. 와도 비서인 더스트 씨가 오는 게 보통 아닌가. 그런 내 속마음이 매튜 씨에게 들리기라도 했는지, 매튜 씨가 말을 덧붙인다. “S급 히어로는 지부장의 직속에 가까운 전력입니다. 관리를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 “아… 그렇긴 하네요.” “가시죠.” 에스코트까지? 조, 조금 부담스럽지만 거절할 수가 없네. …그리고 며칠 전에 은지랑 그런 일을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꽤 신경이 쓰여. 일단은… 가자. 새로운 집으로. “최근 상태는 어떠십니까?” “상태… 매튜 씨가 도와주신 이후로는 조금 괜찮아지긴 했습니다만….” “호전되지는 않았다는 뜻인가요.” “…네.” 결코 호전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내 상태는 아슬아슬하다. 계기. 사소한 계기 하나만 있어도 망상이 마구 일어날 것만 같다. 그래서 최근에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너무 급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 느긋하게 여유를 부릴수록 은지가 당신… 어쩌면 또 다른 남자에게 안기는 일만 늘어날 텐데. 하지만 맞는 말이다. 조급한 마음은 더 괴로운 망상을 불러올 뿐이다. “이곳에는 다른 히어로들도 거주하고 있습니다. 협회와 거리도 가깝고요.” “다른 히어로요?” “네. 이를테면….” 그때, 우리가 기다리고 있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그리고 안에 있던 한 남자가 내리려고 하다가 우리와 정면으로 마주친다. 덩치도 크고, 피부가 거뭇한… 꼭 은지가 보냈던 운동하는 사진 속 남자와 닮은…? “미라지.” “오, 지부장님?” “승윤 씨, 이쪽은 서울 지부 소속 B급 히어로, 미라지입니다.” “어… 처음 뵙겠습니다.” 어색하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지만, 상대가 가만히 있는다. “승윤 씨. 미라지는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하하!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선글라스는 패션이 아니었구나.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성격이 꽤 좋아 보이네. 내 무례도 아무렇지 않게 넘기고. “미라지, 승윤 씨는 새로 각성한 S급 히어로 윤지 양의 연인이다.” “아, 은지 양에게 얘기를 조금 들었어요.” “앞으로 네 옆집에서 머무를 예정이니 알고 있도록.” “넵.” 옆집? 바로 옆집에 사는 거구나. 그나저나 맹인이었다니, 저런 사람을 망상에 써먹은 나는…. …때아닌 자괴감이 몰려온다. “승윤 씨. 저는 미라지와 협회로 돌아가보겠습니다. 그럼.” “네… 여러모로 감사합니다, 지부장님.” “나중에 또 봐요, 승윤 씨!” “어… 네, 네.” 넉살이 좋네. 맹인에, 히어로… 굉장히 어려운 조합이다. 밤에 은지가 돌아오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물어볼까? 이웃에 대해서 알아두면 좋잖아. *** 훈련을 마친 은지가 새로운 집으로 돌아왔다. 새로운 집에 대해서는 은지도 나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반응이었다. 집 안에도 값비싼 가구들이 가득했기에, 무슨 호텔에 온 것만 같은 그런 느낌. 그리고 나는 아까 마주쳤던 새로운 이웃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 미라지 씨? 지난번에 운동 도와줬다는 그 분이야.” “그러니까. 눈이… 안보인다고 하던데.” “맞아. 몇 년 전에 S급 빌런이랑 싸우다가 다쳤대.” …생각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었잖아? 고작 은지랑 같이 체육관에 있었다는 이유로 그런 망상을 해버린 내가 다 죄송해지는데. “성격도 좋고, 협회 사람들도 다들 좋아하더라고.” “잠깐 만났는데도 확실히 사람이 좋아 보이더라.” “그치? 오빠도 금방 친해질 수 있을 거야. 내가 미라지 씨한테 오빠 얘기도 좀 했거든.” “내 얘기? 무슨 얘기?” 이상한 얘기를 한 건 아니겠지? 설마. 은지가 그럴 리가 없지. “그럼~ 우리 오빠가 나 지켜주려다가 빌런한테 잡혀서, 그때 각성했다고!” “…아아.” “엄~청 좋은 사람이라고, 내가 나중에 소개시켜주겠다고 했어.” “…….” …좋지 않은데. 미라지 씨가 좋지 않다는 뜻은 아니고… 다른 쪽으로. 갑자기 화제를 돌리고 싶어졌다. “오늘은… 뭐했어? 협회에서.” “오늘은 트레이닝이랑 특성 훈련… 맞다! 오늘 운동할 때 찍은 사진 보여줄까?” “사진?” “오늘은 더스트 씨랑 같이 운동했거든.” 은지가 휴대폰을 꺼낸다. 그리고 나에게 내민 화면에는 이전에 봤던 운동복 차림의 은지, 그리고 더스트 씨가 있었다. 방금 막 운동을 끝내고 찍은 사진인지 두 사람 모두 숨이 가빠 보인다. “…….” “오빠, 혹시 이상한 생각하는 거 아니지…?” “어… 어?” “더스트 씨한테 실례라구!” “아니, 아… 아니야. 무슨 말이야?” 맹세할 수 있다. 나는 절대로 두 사람의 가슴을 비교하지 않았다. …지난번에 봤던 슈트 차림보다 이 차림이 조금 더 작게 보인다는 생각은 하긴 했다. 하지만 그건 일시적인 감상일 뿐. 그 뒤로는 계속 은지만 보고 있었다. “그래도 더스트 씨, 무뚝뚝하지만 나름 친절한 사람 같….” 말을 하던 은지가 갤러리의 이미지를 옆으로 넘긴 건 분명 무의식적인 행동이었을 거다. 별 생각 없이 그냥, 무심코 한 행동. 하지만 옆으로 넘기자 나온 사진은, 내가 며칠 전에 보았던… 하지만 조금 다른. 은지와, 사용이 끝난 두 개의 콘돔이 찍힌 사진이었다. “…….” “…이, 이거! 이거 지, 지웠는데, 왜….” “이거 혹시, 지난번에….” “지, 지난번에 그거 맞아! 이걸 먼저 찍었는데… 너무 야, 야하게 나온 것 같아서 다시 찍었거든….” 은지가 말한 것처럼, 이 사진은 조금… 분위기가 미묘하다. 손바닥 위에 올린 두 개의 묵직한 콘돔과 그걸 내려다보고 있는, 반쯤 감긴 은지의 눈. 저걸 보면서 은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걸까? 손바닥에 와닿는 묵직함과 식지 않은 열기를 함께 느끼면서 말이다. “지… 진짜로! 여기, 사진 찍은 날짜 보, 보이지? 오빠….” “…괜찮아. 당연히 믿으니까.” “다른 생각한 거… 아니야? 그, 그러니까, 망상….” 은지도 많이 당황한 것 같다. 당연히 나는 은지를 믿는다. 매튜 씨도 믿는다. 하지만 망상은 믿음으로 잠재울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만약… 은지가 나의 부탁으로 매튜 씨와 만남을 가진 이후로, 몰래 매튜 씨를 만났다면? 만난 거라면, 이런 의심이 아니다. 만났다면, 이건 일어나지 않은 가능성이다. 그려진다. 나에게 말하지 않고 다시 매튜 씨를 만나러 간 은지가. “…….” “오빠… 괘, 괜찮아…?” 망상 속 만남의 원인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나와 매튜 씨 사이의 차이에서 오는 새로운 기대감. 한심한 부탁을 하며 기뻐하는 나에 대한 실망감. 아니면 그저… 한 명의 여자로써 우월한 남성에게 이끌리는 본능. “후… 하아. 자, 잠시만….” “…….” 그려진다. 두 번째 만남부터는 조금 적극적으로 변하기 시작한 은지가. “나, 무… 물 좀, 은지야.” “물? 자,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부끄럼보다 기대와 떨림이 앞서기 시작한 은지가. 서로를 마주보는 자세를 선택해서, 길다란 자지가 자신의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하는… 은지가. 끝까지 들어온 자지에 자신의 배가 볼록하게 부푸는 것을 보며 속절없이 가버릴 수밖에 없겠지. 자신이 가버리는 표정까지 전부, 내가 아닌 다른 남자에게 보여주면서도 계속… 가버릴 거다. 가버리고, 또 가버리고. 그러다가 사정의 순간에는 또 다시 나와 매튜 씨 사이의 차이를 체감할 거고. 그렇게 두 번의 섹스를 끝내고 나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범하게 귀가하는 모습까지…. “무, 물! 오빠, 물!” “…….” 눈을 뜰 수가 없다. 망상에서 시선을 돌리기가 어렵다. 은지가 손에 쥐여준 컵을 그대로, 내 얼굴이 있는 쪽으로 휙- 휘두른다. 촤아아악-! “…하아, 하.” “오, 오빠….” 은지의 잘못이 아니다. 나는… 은지를 믿는다. 우리는 겨우 실수로 지우지 않은 사진 한 장에 신뢰가 깨어질 정도의 사이가 아니다. 그렇기에 부탁한다. 망상이 더 심해지기 전에, 조금 이른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은지야.” “으응…?” “이번에는… 지난번 부탁에 한 가지를 더하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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