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EP008-순환
조금 솔직해지자면, 나는 이 방법이 내 망상을 잠재워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여자친구에게 이런 부탁을 한다는 죄책감과 나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다.
그 빌런이 나에게 남긴 특성이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을 두근거리는 흥분으로 바꿔줌에도 불구하고, 나는….
두려웠고, 죄스러웠다.
“하아… 하, 아….”
하지만 이제는 알겠다.
이 방법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완벽하게 망상을 짓누른다.
그런 불확실한 가능성 따위가 일으키는 괴로움과 비교도 할 수 없는 고통.
내 연인이 다른 남자에게 따먹히면서, 나와 할 때에는 느끼지 못한 쾌감을 얻고,
나에게 들려주지 않았던 소리를 내면서, 무력하게 절정을 반복하기만 했다는 고백.
“이… 이제 됐지? 엄청 부, 부끄럽다, 이거….”
“그럼 계속… 말해줘.”
“…….”
은지가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내 귀에도 들어온다.
살짝 고개를 들고, 시선은 나에게서 약간 비스듬하게 둔 채로 은지의 말이 다시 이어진다.
“매튜 씨는 그대로 잠깐 가만히… 기다렸어. 움직이지 않아도 내가 계속 가버리니까.”
“…….”
“그러다가 겨우 내가 진정하고, 숨을 고르고나서 다시 매튜 씨가 움직이는데….”
은지의 말이 조금씩 멎는 빈도가 잦아지고 있다.
부끄러움 때문인지, 아니면 말을 하다보니까 방금 전의 기억이 다시 몸에 되살아나서 그런 건지.
“오빠랑 할 때도 드, 들어오는 거… 잘 느껴지거든?”
“…….”
“근데 매튜 씨는, 들어온다는 것보다 그냥… 안쪽을 쿵, 쿵 묵직하게 두드리는 느낌이야.”
“…….”
“엄청… 능숙해. 부드럽고 느린데, 진짜… 진짜 기분 좋아서, 하는 내내 못 참고 가버린 것 같아….”
말을 하다가 말고 슬쩍, 내 눈치를 살핀다.
그렇다는 것은 여기에 거짓말이 섞여있다는 뜻이겠지만… 지금까지의 이야기 중에서 내가 눈치채지 못한 거짓말도 있을까?
그 모호함이 오싹하다. 짜릿하다.
“그렇게 느리게, 매튜 씨가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쿵, 쿵… 자지가 안쪽을 두드리다가… 10분 정도 됐나?”
“…….”
“아무 말도 안하던 매튜 씨가 죄송하다고, 오랜만에 하는 거라서 조금 이르게 사정할 것 같다고 말하는 거야.”
“…….”
“나는 그때 이미 거의 스무 번은 가버린 것 같은데.”
“그, 그래서…?”
“내가 알겠다고 하니까… 허리를 아래로 꾸우우욱- 누르면서 내리더라?”
매튜 씨의 허리에 눌려 은지의 엉덩이살이 찌그러지는 모습도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사정은… 어땠을까. 그런 부분까지 나와는 전혀 달랐을 지, 궁금해진다.
“아까 내가 마, 말했잖아…? 안쪽이 꽉, 채워지는 느낌이라고… 근데 그렇게 눌러 내리고, 사정하기 직전에는….”
“…….”
“안에서 막, 막 꿈틀거려, 자지가… 콘돔이 있는데도 그게 엄청 잘… 느껴져.”
“…….”
“그리고 매튜 씨가 사정하니까, 내 안에서 콘돔이 빵빵하게 부푸는 것까지 완전 선명하게… 느꼈어.”
“내가 사정할 때랑… 달랐어?”
“…응.”
그렇게 대답할 거라고 예상을 한 건 맞다.
하지만 그게 거짓말인지, 아니면 사실인지…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다.
“안에서 부푼 자지가, 펌프질을 하는 것처럼 꿈틀거릴 때마다 콘돔이 조금씩 부풀거든…?”
“그... 그래서?”
“오빠보다 사정도, 엄청… 길다? 끝날 때까지 내 안에 박혀서 막… 엄청 많이 싸면서도 허리를 눌러대는데….”
“…….”
“나… 진짜 하나도 움직일 수가 없었어. 그냥 그대로, 밑에 눌려서… 사정하는 걸 느끼면서, 나도 조금… 갔어.”
나보다 더 길고, 더 많은 양의 사정을 느끼면서 은지는 절정했다.
콘돔이라는 고무막은 나와 매튜 씨 사이의 차이를 덮기엔 너무 얇았던 것이다.
“그, 그렇게 끝!”
“…어?”
“오빠 부탁대로 두 번 하긴 했는데… 두 번째로 할 때에도 그, 그냥 똑같았어.”
“아….”
“그야 오빠랑 할 때에는 오빠가 항상 리드해줬고… 매튜 씨도 필요 이상으로 움직이지 않으니까.”
무슨 말인지 이해는 할 수 있지만… 조금 아쉽다.
…아니다. 이미 과분한 부탁을 들어준 은지랑 매튜 씨인데. 아쉽긴 뭐가 아쉬워.
은지가 부끄러운 걸 참고 이렇게 말해준 거에 고마워 해야지.
“그럼 그건?”
“웅?”
“내가 부탁한 거… 하나 더 있었잖아.”
“아… 그, 그거….”
매튜 씨에게도 부탁을 했던 얘기다.
행위가 끝난 다음에, 최소한의 확인을 위해서 사진을 한 장 찍어 달라는 것.
행위가 이루어졌음을, 그리고 콘돔을 사용했음을 증명하는 그런 사진 말이다.
“매튜 씨가 찍어주긴 했는데… 바로 지, 지울 거니까! 오빠 보고 나면 바로.”
“그래… 그렇게 해도 돼.”
“…자.”
은지가 휴대폰을 살짝 내민다.
화면에는 사진 한 장이 비쳐지고 있다.
침대에 앉아있는, 상당히 지쳐 보이고 안색도 붉은 은지의 사진.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로 방금 막 두 번의 섹스를 끝냈음을 암시하는 콘돔 한 쌍을 들고 있다.
“봐… 봤지? 이제 지울 거야!”
“…….”
얼얼한 패배감이 가슴 속을 콕콕 찌르는 기분이다.
은지의 이야기는 지어낸 것이 아니라 사실이었음을 못박는 사진 한 장.
망상 속이 아니라 현실에서 느끼는 괴로움은… 너무나도 달콤했다.
“하아….”
“이제… 만족했어? 조금 괜찮아진 것 같아, 오빠…?”
“…엄청 만족했어.”
“…다행이네.”
다행이라고 하기에는 우리의 상황이 조금 복잡하다.
그래.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말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망상이나 사정을 하지 않았음에도 만족할 수 있을 정도로 쾌감을 얻어 놓고도, 나는.
…벌써 다음을 기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그럼 슈트 입어보자! 나 그거 엄청 기대했단 말이야.”
“그럴까?”
“…오빠한테 제일 먼저 보여주고 싶었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은지가 거실로 나가더니 부산스럽게 옷을 갈아입는 소리가 들린다.
오늘 있었던 일은 뒤로 하고 빨리 우리 둘만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은지의 심정, 이해할 수 있다.
발기한 자지는 건드리지도 않았지만 지금 뭘 더 해봤자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그냥 바지를 올린다.
“오빠! 거기 있지?”
“그럼.”
“나… 나 들어간다?”
방문 뒤에서 얼굴을 쏙 내민 은지가 불쑥, 튀어나온다.
검은색과 흰색이 주를 이루고 분홍색으로 포인트를 낸 은지의 히어로 슈트.
은지는 정말로 히어로가 됐구나.
반면 나는….
“어때? 응? 어때?”
“…어울려.”
“정말? 히히….”
“예쁘다. 정말로.”
“그, 근데 이거 너무 딱 맞는 것 같지 않아? 사람들 앞에 이러고 나간다고 생각하니까….”
몸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포즈를 잡아보는 은지.
그러더니 다시 내 옆으로 와서 앉고는, 손을 잡으며 말한다.
“오빠. 나… 열심히 할 거야.”
“응원할게. 계속.”
“…열심히 해서, 꼭 그 빌런을 잡을 거야.”
이름이 뭐였더라. 마… 마, 몰라. 그게 중요한가?
그 빌런을 잡는다고 해서 내 특성이 사라지게 된다는 얘기는 없었지만 그것 역시 아무래도 좋다.
이런 여자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운이 좋은 사람이다.
***
며칠이 흐르는 사이에 제법 많은 일들이 있었다.
기초 체력 트레이닝을 끝낸 은지는 이제 본격적으로 특성을 사용하는 훈련에도 참가하기 시작했다.
맞다, 아직은 더스트 씨의 보조를 받고 있긴 하지만 시범 임무에도 투입이 되었고.
처음으로 임무를 끝내고 돌아온 은지가 방방 뛰면서 자신의 활약을 자랑하는 모습은 퍽 귀여웠다.
“그때 내가 탁- 뛰어나가서, 건물 옥상에서 점프를 했다니까?”
“그래, 그래.”
“그리고 오빠, 그 자세 알지? 히어로들이 착지할 때 그 자세!”
“알고 말고.”
“그대로 도로에 착지하니까 사람들이 막 쳐다보면서 웅성거리고….”
은지는 아직 공식적으로 데뷔를 하지 않은 수습 히어로다.
이전에 매튜 씨의 전화에서 며칠 안으로 코드 네임이 발급되고 정식 히어로로 승격된다는 말이 있었지만….
수습이니 정식이니, 그런 것보다 우리 둘에게 더 중요한 건 따로 있다.
“…오빠는?”
“나?”
“요즘은 그거… 이상한 생각, 들지 않아?”
“난… 아직까지는 괜찮아.”
“그래?”
…사실 며칠 동안에는 괜찮았지만, 지금은 조금 아슬아슬한 상태다.
내가 참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다시 망상이 아른거릴 것만 같다.
은지가 나에게 해준 노력은 작지 않다는 걸 알아도….
연인을 나보다 강한 남성에게 빌려준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아득한 괴로움은, 중독적이다.
“그런 생각 들면 말 해야 해? 억지로 참지 말고.”
“…말 하면?”
“웅?”
“말 하면… 지난번처럼 또 하고 올 거야?”
나는 버티고 있다.
차라리 은지가 하기 싫다고 대답을 하면 좋겠다.
그러면 나 혼자 괴로워하는 것으로 끝이 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 그럼! 나는… 괜찮아.”
“…….”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웃으면서 대답하는 은지.
이렇게 소중한 사람일수록 빼앗겼을 때의 괴로움은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그래. 빼앗긴다면.
정말로 빼앗기는… 것처럼. 그런 거짓말을 부탁한다면 어떨까.
은지의 말에서 마음이 약간, 아주 약간이라도 기울어버렸다는 느낌이 나도록 말이다.
“…하아아.”
겨우 멈춰냈던 망상이 다시 시작될 것만 같다.
하지만 망상에는 계기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그 계기가 가능한 늦게 찾아오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