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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미궁 4


25화. 미궁 4 나는 천천히 앞장섰다. 등 뒤에서는 세레나의 기척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따라붙고 있었다. 조금만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면 곧바로 찌르겠다는 듯한 거리였다. 볼프람은 그 뒤에서 여유롭게 걸어오고 있었다. ​ 세레나와의 거리가 조금 벌어진 틈을 타 몇 번이고 미래시를 사용해봤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녀의 몸에서 일렁이는 보라색 마력이 문제였다. 희미하게 흔들리는 그 마력은 세레나가 모종의 능력을 사용하고 있다는 증거처럼 보였다. ​ “길을 헷갈리진 않겠지?” “그 정도로 멀리 온 건 아니야.” “하. 그건 다행이군. 괜히 미궁 안에서 길을 잃었다는 핑계로 수작을 부리면 곤란하니까.”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엘레노아는 아직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루크레치아 혼자라면 세레나까지 상대할 수는 있겠지만, 볼프람이 끼어들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무엇보다 볼프람에게 지금의 엘레노아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녀석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뻔했으니까. ​ ‘일단 도착하기 전에 소리를 내야 하나?’ ​ 하지만 괜히 부자연스럽게 행동했다간 세레나가 먼저 반응할 것이다. 목덜미를 향하던 단검은 이제 등 뒤를 겨누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안전한 건 아니었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 쉬고 있던 길목 근처에 도착했다. 작은 물소리가 들려왔다. ​ 졸졸. ​ 벽면을 타고 흐르던 물줄기 소리였다. ​ “거의 다 왔다.” ​ 나는 일부러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 “루크레치아.” ​ 대답은 없었다. ​ “루크레치아. 나야.” ​ 역시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설마 또 다른 마물이 나타난 건가 아니면 루크레치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그 짧은 순간 온갖 불길한 상상이 머릿속을 스쳤다. ​ “대답이 없군.” ​ 볼프람이 뒤에서 비웃듯 말했다. ​ “정말 네놈의 동료들이 여기 있는 게 맞나?” “조용히 해.” ​ 나는 낮게 대답하며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모퉁이를 지나 우리가 쉬던 공간이 눈앞에 드러났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배낭더미. 흐르는 물줄기. 바닥에 남아 있는 체액 자국. 그리고 엘레노아에게 덮어두었던 겉옷 일부. 하지만 루크레치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엘레노아의 모습도. ​ “하.” ​ 볼프람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 “역시 거짓말이었나?” ​ 그 순간이었다. ​ 쩌저저적. ​ 머리 위에서 아주 작은 균열음이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 천장에 거대한 얼음기둥이 매달려 있었다. 미궁의 어두운 천장과 거의 하나가 된 채, 푸른빛을 희미하게 머금은 얼음기둥. 그리고 그 얼음기둥 아래쪽에 누군가가 몸을 숨기고 있었다. ​ 루크레치아. ​ 그녀는 천장에 매달린 얼음기둥을 발판처럼 삼아, 거의 거꾸로 몸을 낮춘 채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푸른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 “……!” ​ 볼프람이 무언가를 알아차리고 고개를 들려는 순간. 루크레치아가 떨어졌다. 마치 얼음 조각이 미끄러져 내리는 것처럼, 그녀의 몸이 볼프람의 등 뒤로 내려앉았다. ​ 착. ​ 발이 바닥에 닿는 소리와 동시에 실버 팽이 움직였다. 은빛 대검의 검끝이 볼프람의 목덜미에 닿았다. ​ “움직이지 마.” ​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볼프람의 몸이 굳었다. 세레나 역시 즉시 움직였다. 그녀는 한 걸음 물러나는 내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따라붙었다. 차갑게 번뜩이는 단검이 다시 내 목덜미를 향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며 거리를 벌리려 했지만, 세레나의 움직임은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 착. ​ 순식간에 내 옆으로 파고든 그녀의 단검 끝이 내 목 옆에 닿았다. ​ “움직이지 마.” ​ 낮은 목소리였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등 뒤에서는 루크레치아가 볼프람의 목에 실버 팽을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내 앞에서는 세레나가 내 목을 노리고 있었다. 틸렌에서처럼 또다시 서로의 목숨을 쥔 채 멈춰 선 꼴이 되어버렸다. ​ “카엘을 놔줘.” “…….” ​ 세레나의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 “볼프람님께 겨눈 검을 먼저 내려.” “내가 먼저 움직이면 이 남자의 목이 날아간다” “내가 먼저 움직이면 카엘의 목이 잘린다.” ​ 순간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루크레치아의 실버 팽은 볼프람의 목덜미에 닿아 있었고, 세레나의 단검은 내 피부에 닿아 있었다. 조금만 힘이 들어가도 피가 날 거리였다. ​ “하…….” ​ 볼프람은 잠시 굳어 있다가 낮게 웃었다. ​ “이거 참. 틸렌이랑 똑같군.” ​ 그의 목소리에는 여유가 섞여 있었지만, 표정은 그리 편해 보이지 않았다. 목에 닿은 실버 팽 때문이겠지. 아무리 허세를 부려도 루크레치아의 검이 조금만 움직이면 그의 목은 그대로 떨어질 것이다. ​ “역시 네놈들은 대화라는 걸 모르는 모양이야.” “대화?” ​ 나는 세레나의 단검을 의식한 채 낮게 말했다. ​ “네가 먼저 사람을 칼로 위협해놓고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평민이 미궁 안에서 숨어 있다가 나타났으니 확인한 것뿐이다.” “확인치고는 내 목에 칼을 들이댔지.” “기어오르는 평민을 다루는 데에는 그 정도가 적당하지.” ​ 나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지금 감정적으로 반응하면 상황이 더 나빠진다. 루크레치아 역시 그걸 알고 있는지, 볼프람을 당장 베어버릴 듯한 눈빛을 하고도 검을 움직이지는 않았다. ​ “카엘.” ​ 루크레치아가 나를 보지 않은 채 말했다. ​ “괜찮나요?” “응. 아직은.” “세레나라고 했나?” ​ 루크레치아의 시선이 세레나에게 향했다. ​ “그 단검을 조금이라도 더 밀어 넣는 순간, 볼프람의 목도 같이 떨어질거다.” ​ 세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단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 “그쪽도 마찬가지.” ​ 세레나가 낮게 말했다. ​ “볼프람님에게 조금이라도 상처를 입히면, 이 사람의 목을 벤다.” ​ 서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실버 팽의 검끝이 볼프람의 목에 닿아 있고, 세레나의 단검은 내 목덜미에 닿아 있다. 엘레노아가 잠들어 있는 휴식처 바로 앞에서 또다시 살얼음판 같은 대치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때 볼프람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 “좋다. 그럼 이렇게 하지.” ​ 그는 목에 닿은 대검을 의식하며 천천히 말했다. ​ “서로 무기를 내린다. 그리고 네놈들이 말한 휴식처를 확인한다.” “네가 그 말을 지킬 거라고 어떻게 믿지?” ​ 내가 묻자 볼프람이 코웃음을 쳤다. ​ “그건 내가 할 말이다. 네놈들이 먼저 거짓말을 했는지 아닌지 확인해야겠다고 했을 텐데.” “엘레노아는 지금 제대로 움직이지 못해.” ​ 루크레치아의 목소리가 더 차가워졌다. ​ “그녀에게 무례하게 굴면 여기서 끝나지 않을거다.” ​ 볼프람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그는 그제야 뭔가를 눈치챈 듯 비릿하게 웃으려 했다. 하지만 실버 팽이 아주 조금 더 목에 파고들자, 그 웃음은 곧바로 사라졌다. ​ “말조심해.” ​ 루크레치아가 낮게 경고했다. ​ “이번에는 틸렌처럼 넘어가지 않을 거니까.” “……좋아.” ​ 볼프람은 순순히 동의했다. 루크레치아는 세레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 “동시에 무기를 거둔다.” “그 말을 내가 어떻게 믿지?” ​ 볼프람이 비웃듯 말했다. 그러나 목덜미에 닿은 실버 팽 때문인지 목소리에는 평소 같은 여유가 없었다. ​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야.” ​ 루크레치아는 차갑게 대답했다. ​ “세레나가 먼저 단검을 거두면 나도 검을 내릴게. 대신 동시에 서로 뒤로 물러나.” “세레나.” ​ 볼프람이 짧게 불렀다. 세레나는 잠시 내 목에 닿은 단검을 거두지 않은 채 루크레치아를 바라봤다. ​ “셋에.” ​ 세레나가 짧게 말했다. ​ “하나.” ​ 나는 숨을 삼켰다. ​ “둘.” ​ 세레나의 손끝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 “셋.” ​ 동시에 두 사람이 무기를 거뒀다. 세레나의 단검이 내 목에서 떨어졌고, 루크레치아의 실버 팽 역시 볼프람의 목덜미에서 물러났다. 나는 곧장 뒤로 물러나 세레나와 거리를 벌렸다. 볼프람 역시 불쾌한 얼굴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다행히 아무도 다시 무기를 휘두르지는 않았다. ​ “하.” ​ 볼프람은 목덜미를 손으로 쓸며 낮게 웃었다. ​ “정말 살벌한 환대군. 휴식처라더니 함정에 더 가까운 것 같은데.” “네가 먼저 카엘한테 칼을 겨눴잖아.” ​ 루크레치아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 “흥. 더 따지고 싶지만 이정도로 끝내주지” ​ 그녀는 더 이상 볼프람을 보지 않고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루크레치아는 천장에 만들어둔 얼음 받침대를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 쩌저저적. ​ 푸른 얼음이 낮은 소리를 내며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그 위에는 엘레노아가 누워 있었다. 내가 덮어준 겉옷을 몸에 감싼 채였지만, 완전히 가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흘러내린 겉옷 사이로 하얀 어깨가 드러나 있었다. 엘레노아는 아직 잠든 듯 눈을 감은 채 가늘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 “하아…….” ​ 조금 들뜬 듯한 숨소리. 그 소리가 공동 안에 작게 울렸다. 나는 서둘러 그녀의 겉옷을 다시 여며주었다. 그 순간 볼프람의 시선이 느껴졌다. ​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눈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는 너무도 분명했다. 놈의 시선은 엘레노아를 천천히 훑고 있었다. ​ “…….” ​ 나는 본능적으로 엘레노아 앞을 가로막았다. 볼프람은 그제야 시선을 거두더니 코웃음을 쳤다. ​ “흥.” ​ 이번에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아마 지금 여기서 한마디라도 더 했다간 루크레치아의 검이 정말로 목을 베어버릴 거라는 걸 아는 모양이었다. ​ “세레나.” “네, 볼프람님.” ​ 세레나는 짧게 대답하고 그를 따랐다. 볼프람은 우리에게서 조금 떨어진 안쪽 구석으로 걸어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 세레나는 그보다 조금 앞쪽에 선 채 주변을 경계했다. 휴식을 취하겠다는 태도였지만, 완전히 긴장을 푼 모습은 아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 나는 엘레노아 곁에 앉아 그녀의 겉옷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다시 정리해주었다. 그때 루크레치아가 조용히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볼프람 쪽을 한 번 바라본 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카엘.” “응.” “엘레노아 상태가 아까보다 더 안 좋아졌어요. 그리고 단순히 잠에 든 게 아닌 것 같아요.” ​ 나는 숨을 삼켰다. ​ “더 안 좋아졌다고?” ​ 루크레치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 “몸에 힘이 없는 건 그대로인데, 감각 쪽이 더 예민해진 것 같아요. 숨도 아까보다 거칠고, 열도 조금 올랐어요. 잠에서 깨어나지도 않고요.” ​ 나는 엘레노아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확실히 그녀의 뺨은 아까보다 더 붉었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미간은 희미하게 찌푸려져 있었고, 손끝은 겉옷자락을 약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 “체액이 아직 몸에 남아 있는 건가?” “그럴 가능성이 높아요.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뒤늦게 더 퍼지는 걸 수도 있어요.” ​ 루크레치아의 표정이 굳었다. ​ “기다리면 엘레노아의 말대로 상태가 호전될 수도 있지만 지금 상태로 보면 오히려 악화될 가능성이 더 높아요.” “그럼 틸렌으로 돌아가야겠어.” “일단은……. 조금만 더 엘레노아가 괜찮아지는지 지켜보고 움직이는게 좋겠어요.” “젠장…! 하필이면…….” ​ 나는 이를 악물었다. 멀리서 볼프람과 세레나의 기척이 느껴졌다. 움직이지 못하는 엘레노아 그리고 같은 공간 안에 들어온 볼프람. 상황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 볼프람과 세레나는 한동안 구석진 곳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두 사람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 “어디 가는 거지?” ​ 내가 묻자 볼프람은 코웃음을 쳤다. ​ “네놈들에게 일일이 보고해야 하나?” ​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세레나를 데리고 통로 안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한동안 바라봤다. 혹시라도 우리를 뒤에서 치기 위해 움직이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지만, 미궁 안에서 다른 기사들이 어떻게 움직이든 막을 명분은 없었다. ​ 루크레치아 역시 같은 생각인지, 조용히 실버 팽의 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주시했다. 그리고 한참 뒤에 볼프람과 세레나가 다시 휴식처로 돌아왔다. 둘의 옷은 조금 전보다 더 흐트러져 있었다. 볼프람의 소매 끝은 찢겨 있었고, 세레나의 제복에도 얕은 흠집과 먼지가 묻어 있었다. ​ 제법 전투를 치르고 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볼프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구석진 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세레나 역시 말없이 그의 곁으로 갔다. ​ 나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엘레노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엘레노아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 “루크레치아. 엘레노아 상태는 어때?” ​ 내가 묻자 루크레치아가 엘레노아의 이마에 손을 올린 채 대답했다. ​ “아까보다는 나아요. 아직 깨어나지는 못했지만, 호흡은 조금 안정됐어요.” “다행이네.” ​ 나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긴장이 조금 풀리자 그제야 몸이 무거워졌다. 지금 당장 성급히 움직여야할 이유는 사라졌다. ​ “하아암….” ​ 하품이 나온다. 이 휴식처에서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엘레노아가 습격 당한 이후로 체감상 하루가 훌쩍 지난 것 같았다. 피로가 밀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루크레치아의 눈도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 “루크레치아. 먼저 자.” “카엘은요?” “내가 먼저 불침번 설게. 너도 많이 피곤하잖아.” ​ 루크레치아는 잠시 나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무리하지 마세요.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있으면 바로 깨워요.” “알았어.” ​ 루크레치아는 엘레노아 가까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처음에는 검을 끌어안은 채 벽에 기대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완전히 깊게 잠든 건 아니었다. 나는 그 모습을 확인한 뒤, 휴식처 입구 근처에 앉아 검을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작은 물줄기 소리만이 공동 안을 채웠다. ​ 졸졸. ​ 가끔 멀리서 알 수 없는 마물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긴 했지만, 가까이 다가오는 기척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 “응…….” ​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엘레노아가 깨어난 줄 알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엘레노아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 소리가 난 곳은 반대편이었다. 볼프람과 세레나가 자리 잡은 구석. 그쪽에서 낮은 숨소리와 함께 억눌린 듯한 신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 “…….” ​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고개를 돌리자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볼프람은 벽에 기대앉은 채 세레나의 허리를 끌어안고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 그리고 세레나와 혀를 섞으며 질척이는 소리를 냈다. 동시에 놈의 두터운 두 손이 세레나의 엉덩이를 쥐어짜듯 주물렀다. ​ “……하.” ​ 나는 작게 숨을 삼켰다. 미궁 한복판. 언제 마물이 나타날지도 모르는 휴식처. 그런 장소에서조차 저러고 있다니. 어이가 없었다. ​ 나는 시선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볼프람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나를 향했다. 놈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마치 일부러 보란 듯이. 그리고 세레나의 허리를 더 강하게 끌어당겼다. ​ “…….” ​ 어느덧 그의 손이 세레나의 상의 안으로 쑥 들어갔다. 살짝 들린 상의 자락 아래로 등이 드러났다. 멀리서 봐도 탄탄한 느낌의 등은 새하얗고 부드러운 피부로 보였다. 도대체 저정도 되는 미인이 저 볼프람을 ‘볼프람님’ 이라고 부르고 따르는 이유가 무엇일까. ​ 아무리 생각해봐도 뾰족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고민하는 사이 어느새 볼프람은 세레나의 상의를 벗기기 시작했다. 제대로 보이지 않으나 드러난 새하얀 어깨와 걸쳐진 상의는 그녀가 완전히 상체를 볼프람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걸 의미했다. ​ 어느새 볼프람의 머리가 세레나의 상체 너머로 사라졌다. ​ “아흐읏…. 볼프람님….” ​ 쮸웁! 쮸읍! 무언가 강하게 빠는 소리와 함께 세레나의 신음소리가 커졌다. ​ “후후…. 세레나. 언제 빨아도 좋군.” ​ 살짝 고개를 든 볼프람의 입가엔 침이 번들거렸다. 놈은 나를 한번 흘깃 쳐다보곤 비웃으며 다시 세레나의 품으로 들어갔다. ​ 세레나는 그런 볼프람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 물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신음을 흘렸다. ​ “하윽! 좋아요옷…!” “…….” ​ 나는 바지춤이 꿈틀거리는 걸 느꼈다. 심연의 사도와 접촉하면서 생겨버림 두개의 성도착증중 하나인 ‘관음증’이 내 몸을 흥분에 빠트렸다…, 라고 믿고 싶었다. ​ 어찌됐건 나는 잔뜩 커져버린 자지때문에 불편한 자세를 뒤척이며 고개를 돌렸다. 이런 미궁에서 성욕에 미쳐서 저런 짓을 하는 꼴이 어이가 없었다. ​ “하아…. 하아….” ​ 고개를 돌려 잘자고 있는 루크레치아를 바라봤다. 경계심 가득하던 그녀의 자세도 이제 깊은 잠에 빠져들었는지 더 흐트러져 있었다. ​ 그리고 엘레노아도……. 엇…? ​ “하앗…. 하아….” ​ 나는 방금전까지만 해도 이 소리가 세레나의 신음인 줄 알았다. 그러나 왜 앞이 아니라 뒤에서 난다는 걸 깨닫지 못했을까. ​ “엘레노아…?” “…….” ​ 언제 정신이 든건지, 엘레노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들뜬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눈은 내가 아닌 다른곳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 츄읍! ​ “하읏…. 하앙!” “세레나. 오늘따라 감도가 좋군” “아니에요…. 볼프람님…. 하앙!” ​ 그녀의 눈은 볼프람과 세레나의 행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어느새 내가 덮어준 옷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그녀의 눈부신 상체가 차가운 미궁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 그녀의 한 손은 드러난 자신의 가슴 끝에서 잔뜩 부풀어오른 유두를 어루만지고 있고 다른 한손은 등뒤로 돌려 자신의 음부 부근을 옷 위로 매만졌다. 그녀의 짧은 하의 틈 사이로 투명한 액이 주르륵 흘러나왔고 입에선 들뜬 숨이 가득찼다. ​ “하아…….” “하읏! 하앙! 볼프람님!” ​ 양옆에서 동시에 들리는 신음이 내 귀를 괴롭혔다. 어느새 볼프람은 세레나의 하의를 벗긴 채 굵직한 손가락으로 그녀의 음부를 들낙거리고 있었다. ​ 그럴때마다 울컥하며 쏟아지는 애액은 세레나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알려주는 듯 했다. ​ 그리고 엘레노아도 어느새 자신의 하의속에 손을 집어넣은 채 꼼지락거렸다. 무얼 하는지는 들려오는 소리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 찌걱…. 찌걱…. ​ “하아…. 볼프람님….” ​ 세레나의 신음에 다시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볼프람이 자신의 자지를 꺼내 그녀의 음부 끝에 맞췄다. 멀리서 봐도 볼프람의 자지는 크고 특히 귀두 부분이 굉장히 두꺼웠다. 평범한 형태와 비교하자면 윗부분은 둥글고 넓게 부풀어 있었고, 아래쪽으로 갈수록 비교적 가늘어지는 형태였다. ​ 세레나의 날렵한 몸과 비교하면 상당히 대비되어 보였다. ​ 즈즛…! ​ 귀두가 억지로 그녀의 음부를 벌리며 들어가려고 한다. ​ “아아……. 아파요…. 볼프람님” “세레나. 언제나 좁구나.” “아흣…. 볼프람님….” ​ 츄읍! 츄읍! ​ 두 사람은 거칠게 키스하며 몸을 껴안았다. 그러면서 볼프람은 천천히 그녀의 허리를 잡고 아래로 내렸다. 세레나의 다리가 달달 떨리며 음부로 볼프람의 자지가 점점 파고든다. ​ “하아…. 하아….” ​ 그리고 엘레노아의 거친 숨소리도 더 커져만 간다. 그녀의 손은 더 격렬해지고 두 눈은 못박힌 듯 두사람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 말려야했다. ​ 저 둘이든 엘레노아든, 어느쪽이든 말려야만 했다. 하지만……. ​ 나는 그저 스스로 자위하는 엘레노아의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만 보고 있었다. 분명히 나는 그녀의 연인인데……. 지금이라도 다가가 그녀가 원하는만큼 만져주고 애무하고 더 나아간다면 당장 볼프람처럼 그녀의 음부에 삽입해서 그녀를 만족시켜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저 가만히 지켜봤다. 마치 세 사람 사이에 껴들 수 없는 제 3자처럼……. 그리고……. ​ 푸욱! ​ “하아앙!” ​ 세레나의 음부가 뿌리 끝까지 볼프람의 자지를 삼켜버렸다. 여전히 저쪽도 멈출 생각은 없어보였다. 그리고 볼프람이 세레나와 키스하면서 어느새 이쪽, 정확히는 혼자 자위하는 엘레노아를 뚫어져라 쳐다보는게 느껴졌다. ​ 살짝 키스하는 혀를 뗀 볼프람이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멀었지만 그가 뭐라고 하는지 읽어버렸다. ​ ‘젖소년’ ​ 그 순간 내 자지가 빳빳하게 솟구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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