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미궁 3
24화. 미궁 3
엘레노아가 촉수 마물에게 습격당한 뒤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태양이 비추지 않는 미궁 내에선 시간 흐름을 알 수 없었으니까.
다만 체감상 그리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적어도 반나절 정도 걸린 것 같았다.
다행히 엘레노아의 몸에는 큰 상처는 없어 보였다.
독에 중독된 흔적, 괴사나 변형이 일어난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기괴한 마물에게 습격당한 피해자들이 끔찍하게 망가진 모습을 몇 번 본 적이 있었기에, 그 사실만으로도 가슴을 쓸어내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약간 상기된 얼굴과 살짝 거친 숨소리는 어딘가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기에 정확히 판단하기엔 어려웠다.
턱
“카엘.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루크레치아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부드럽게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은 나를 위로해주고 있었다.
“응…. 하지만 내가 방심했어. 혼자 가게 했으면 안됐는데….”
“으음……. 카엘군?”
“엘레노아!”
엘레노아가 눈을 떴다.
그녀는 아직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는지 눈이 반쯤 풀린 채 나를 올려다봤다.
“괜찮아?”
“으응…. 아!”
멍하니 대답하던 그녀는 곧 눈을 크게 부릅뜨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하지만 아직 몸에 힘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앗……!”
엘레노아의 몸이 휘청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내가 덮어두었던 겉옷이 어깨에서 미끄러져 내려갔다.
풀썩.
겉옷이 바닥에 떨어졌다.
엘레노아는 그제야 자신의 상태를 깨달은 듯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봤다.
“꺄악!”
그녀의 비명이 미궁 안에 울려 퍼졌다.
“엘레노아. 카엘한테 매일 밤 만져달라고 해놓고 이젠 부끄러워?”
“그! 그거랑 조금 다르잖아요!”
루크레치아의 지적에 엘레노아는 얼굴을 붉히며 내 겉옷을 잡아 끌어 자신의 가슴을 가렸다.
“엘레노아. 어떻게 된 건지 기억나?”
“아니…. 잘 모르겠어. 순간적으로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긴 했는데…….”
엘레노아는 기억을 더듬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다음은 기억이 안 나. 뭔가 뒤에서 확 덮쳐오는 느낌이 들었고, 몸이 붕 뜬 것 같았는데…… 그 뒤로는 그대로 의식이 끊겼어.”
엘레노아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정말 순식간이었어. 소리를 지를 틈도 없었고, 마력을 끌어올릴 시간도 없었어. 눈 깜빡할 사이에 당했어.”
“어쩌면 초입에 만났던 미노타우르스보다 그런 마물을 더 경계해야겠어. 특히 놈이 벽 틈 사이로 들어 간 걸 보면 통로에 있는 마물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의 기습도 조심해야 해. 그보다 엘레노아. 몸을 일으킬 순 있겠어?”
“으응? 한번 해볼게….”
엘레노아는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팔만 달달 떨릴뿐, 제대로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 마물의 체액에 뭔가 독 같은 게 있는건가?”
“하아….”
엘레노아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뭔가…. 힘이 안들어가……. 그리고…….”
“그리고?”
“하앗…. 어딘가 흥분이 되는거 같아.”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루크레치아는 엘레노아의 이마에 손을 올려 열을 확인하더니, 내가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조심스럽게 겉옷을 들춰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카엘. 아무래도 일종의 최음제 같은 것 같아요.”
“최음제?”
“네. 단순한 마비독은 아니에요. 몸의 힘을 빼앗는 동시에 감각을 과하게 예민하게 만드는 종류예요.”
“그럼 엘레노아는…….”
“지금 당장 생명에 지장이 있는 정도는 아니에요. 다만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고, 감각도 평소보다 훨씬 예민해져 있을 거예요.”
엘레노아는 그 말을 듣고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다행히 체액이 피부 안쪽까지 깊게 침투한 건 아니라서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가라앉겠지만, 당분간은 제대로 움직이기 힘들 거예요.”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아마 번식 때문일 거예요.”
루크레치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물은 스스로 번식하지 못하니까요. 특히 저런 종류라면 다른 종족의 여성을 산 채로 끌고 가서 번식에 이용하려 했을 가능성이…….”
“루, 루크레치아…….”
그녀는 내가 덮어준 겉옷을 양손으로 꼭 붙잡은 채 몸을 움츠렸다.
“그, 그런 걸 왜 그렇게 침착하게 설명하는 거예요…….”
목소리는 작게 떨리고 있었다.
아직 몸에 힘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은 탓인지, 아니면 방금 들은 설명 때문인지 엘레노아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루크레치아는 그런 엘레노아를 바라보다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상황 파악이 먼저야. 부끄러워 하는 건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아.”
“그, 그게 더 부끄럽게 들리거든요…….”
엘레노아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겉옷을 끌어안았다.
“그런 건가…….”
마물이 엘레노아를 삼키려 했던 건 몸의 힘을 빼앗고, 의식을 흐리게 만들고, 저항할 수 없는 상태로 둥지까지 운반하기 위해서였다.
그 뒤에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는…….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끔찍한 상상이 떠올랐지만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고 잊어버렸다.
“조금만 늦었어도…….”
나는 품에 안긴 엘레노아를 내려다봤다.
그녀는 아직도 몸에 힘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는지 내 품 안에서 가늘게 숨을 고르고 있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실수했으면 엘레노아는 그 마물의 둥지까지 끌려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때는 지금처럼 쉽게 구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빌어먹을……. 일단 여기서 더 깊이 들어가는 건 무리겠네.”
“네. 엘레노아가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쉬어야 해요.”
엘레노아는 아직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미안해, 카엘 군…….”
“네가 미안해할 일이 아니야.”
나는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오히려 우리가 방심했어. 여기가 안전하다고 생각한 게 실수였지.”
루크레치아 역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쉬어가기 좋다고 생각했던 곳이 처음부터 마물이 먹잇감을 끌어들이기 위해 만들어낸 함정이었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차라리 다시 틸렌으로 돌아갈까?”
엘레노아는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조금만 더 버텨보자.”
엘레노아는 아직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곧 힘이 돌아올지도 모르잖아. 지금 나 때문에 바로 돌아가는 건 오히려 더 위험할 수도 있어.”
“위험하다고?”
“응. 카엘군. 지금의 나는 솔직히 짐덩이나 마찬가지야.”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이 상태로 돌아가다가 두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운 마물과 맞닥뜨리면 어쩔 거야? 나까지 챙겨야 하니까 제대로 싸우기도 힘들잖아.”
그 말에 나는 쉽게 반박하지 못했다.
엘레노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녀가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미궁을 되돌아가는 건 생각보다 위험한 일이었다.
“그리고 방금 그 마물 말이야.”
엘레노아는 우리가 괴물을 쫓아낸 벽 틈 쪽을 바라봤다.
“아마 이 근처를 자기 구역으로 삼고 있던 놈일 거야. 물줄기도 있고, 통로에서 살짝 벗어난 공간도 있으니까 먹잇감을 기다리기 딱 좋잖아.”
“그건…… 그렇지.”
“그런 마물들은 보통 자기 구역을 쉽게 떠나지 않아. 그리고 우리가 방금 그놈을 쫓아냈으니까, 적어도 당장은 다른 마물이 함부로 들어오진 않을 거야.”
엘레노아는 힘겹게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어갔다.
“마물끼리도 영역이 있잖아. 강한 놈이 자리 잡은 곳에는 약한 놈들이 잘 안 들어와. 그러니까 오히려 지금은 여기가 제일 안전할 수도 있어.”
루크레치아도 잠시 생각하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는 있어요. 적어도 이 주변에 있던 마물들은 방금 그 개체를 피해 다녔을 가능성이 높아요. 놈이 도망친 직후라면 당분간 이 구역은 비어 있겠죠.”
나는 아직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말이 틀렸다고 할 수도 없었다.
지금 엘레노아를 억지로 데리고 움직이는 것보다, 그녀의 힘이 돌아올 때까지 이곳에서 경계를 세우고 버티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알겠어. 대신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바로 움직인다.”
“응. 고마워, 카엘 군.”
엘레노아는 미안한 듯 웃으며 겉옷을 조금 더 끌어안았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신이 없을 텐데 그녀의 똑똑한 머리는 여전히 우리 파티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해주고 있었다.
“그럼 일단…….”
나는 우리가 가져온 짐들을 담아둔 배낭들을 한 곳에 모아 몸을 기댈 수 있는 받침대로 만들어주었다.
“엘레노아. 일단 여기에 편하게 기대서 누워 쉬고 있어.”
“고마워. 카엘군.”
배낭더미에 몸을 기댄 엘레노아는 곧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아무래도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동안 우리는 잠든 엘레노아 근처에서 머물며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그녀가 틸렌에서 잔뜩 사둔 간식들 때문에 심심하진 않았다.
쿵!
“……! 루크레치아?”
“카엘. 여기서 멀어요.”
루크레치아와 나는 벌떡 일어나 주위를 경계했다.
쿵! 쿵! 콰앙!
“이건…….”
루크레치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누군가 싸우고 있는 것 같아요. 아마도 다른 제국 기사일 확률이 높을 거에요.”
“어떻게 하지?”
“카엘의 결정을 따를게요.”
나는 잠든 엘레노아를 바라봤다.
아직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한 그녀를 두고 움직이는 건 위험했다.
하지만 저 소리가 정말 다른 제국 기사들의 전투라면,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우리가 여기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이에 그들이 전멸한다면, 우리 역시 곧 같은 위험과 맞닥뜨릴 가능성이 높았다.
“내가 보고 올게.”
“혼자요?”
루크레치아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노아를 혼자 둘 순 없어. 넌 여기 남아서 엘레노아를 지켜줘.”
“카엘.”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돌아올게. 싸우러 가는 게 아니라 확인만 하는 거야.”
루크레치아는 잠시 나를 바라봤다.
결국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하지 마세요.”
“알아.”
“그리고 정말 위험하면 돕겠다는 생각도 하지 말고 바로 돌아와요. 엘레노아가 움직이지 못하는 이상, 지금 우리는 평소처럼 싸울 수 없으니까요.”
“응.”
나는 검을 고쳐 쥐고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다행인지 가는 동안 따로 마주치는 마물은 없었다.
굉음은 점점 가까워졌다.
쿵! 콰앙!
미궁의 벽과 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진동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마력을 끌어올려 투시 능력을 사용했다.
순간 시야가 벽 너머로 번져나갔다.
“미노타우르스……?”
정확히 보이진 않았다.
벽이 여러 겹 겹쳐 있는 탓에 형태가 뭉개져 보였고, 움직임 역시 흐릿했다.
하지만 저 압도적인 체구와 뿔의 형태만큼은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미노타우르스였다.
그 미노타우르스를 상대로 누군가가 싸우고 있었다.
미노타우르스의 거대한 몸이 벽을 들이받을 때마다 굉음이 울려 퍼졌다.
‘다른 제국 기사인가?’
아직 확신할 수는 없었다.
상대의 수가 몇 명인지도, 지금 우세한 쪽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조금 더 가까이 가야 했다.
나는 투시를 거두고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다.
발소리를 최대한 죽인 채 모퉁이를 돌아, 굉음이 들려오는 방향으로 조금씩 접근했다.
쿵!
그 순간, 차갑고 날카로운 감촉이 목덜미에 닿았다.
“움직이지 마.”
낮게 가라앉은 여성의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려왔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목 뒤에 닿은 것은 단검이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피부가 갈라질 만큼 날카로운 칼날이 내 목덜미를 정확히 누르고 있었다.
“손. 천천히 검에서 떼.”
등 뒤의 목소리는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였다.
나는 천천히 검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목덜미에 닿은 칼날이 살짝 파고들었다.
나는 이를 악문 채 허리춤의 검으로 손을 가져가려 했다.
그 순간 미래시를 발동했다.
수십 개의 잔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내가 몸을 숙여 칼날을 피하는 미래.
팔꿈치로 뒤의 여자를 밀쳐내는 미래.
검을 뽑아 반격하는 미래.
옆으로 굴러 거리를 벌리는 미래.
하지만 그 모든 미래의 끝은 같았다.
목덜미가 갈라지거나, 손목이 베이거나, 등 뒤에서 날아든 단검에 허벅지가 꿰뚫렸다.
여자는 이미 내가 도망칠 수 있는 모든 방향을 막아두고 있었다.
피할 곳이 없다.
나는 짧게 숨을 삼켰다.
억지로 움직였다간 목이 먼저 날아간다.
나는 검 손잡이에서 천천히 손을 뗐다.
“검도 바닥에 내려놔.”
“…….”
“천천히. 괜한 짓 하지 말고.”
나는 이를 악문 채 허리춤의 검을 뽑아 바닥에 떨어뜨렸다.
챙그랑.
검이 미궁의 돌바닥에 부딪히며 차가운 소리를 냈다.
“앞으로 걸어.”
“어디로?”
“네가 몰래 훔쳐보던 곳.”
나는 말없이 앞으로 걸었다.
목 뒤의 단검은 여전히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면 그대로 목을 그을 생각인지, 등 뒤의 여자는 내 숨소리 하나까지 놓치지 않겠다는 듯 바짝 붙어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미래시를 사용해봤지만 여전히 도망치거나 역으로 제압할 수 있는 선택지는 없었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넓은 공동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방금 전까지 들려오던 굉음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미노타우르스.
거대한 몸을 가진 마물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놈의 목은 반쯤 부서져 있었고, 가슴에는 깊은 상처가 여러 개 나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볼프람 폰 로엔덤.
그는 쓰러진 미노타우르스의 어깨 위에 한쪽 발을 올린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게 누구신가 했더니….”
볼프람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틸렌에서 본 평민이군.”
나는 순간 얼굴을 찌푸렸다.
“볼프람.”
“여전히 건방지군.”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세레나. 그놈 제대로 붙잡고 있어라. 괜히 날뛰면 목줄을 끊어도 좋다.”
“네.”
등 뒤의 여자가 짧게 대답했다.
그제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내 목덜미에 단검을 겨누고 있는 여자는 틸렌에서 봤던 보라색 머리의 제국 기사, 세레나였다.
“혹시 모를 추가 기습에 대비해서 세레나에게 주위를 경계하라고 했는데, 아주 재미있는 걸 물어왔군.”
볼프람은 미노타우르스의 시체에서 내려오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설마 틸렌에서처럼 또 뒤에서 날 기습하려고 숨어 있던 건가?”
“기습?”
나는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틸렌에서의 일이 어떻게 기습이지?”
볼프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
“먼저 엘레노아를 모욕한 건 너였다. 그녀가 화를 낸 건 그 뒤였고. 애초에 네가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면 싸움이 벌어질 이유도 없었어.”
“하…!”
볼프람은 기가 막히다는 듯 웃었다.
“그래서? 내 말 한마디에 이성을 잃고 마력을 휘두른 게 정당방위라도 된다는 건가?”
“정당방위라고 말한 적은 없어. 하지만 그걸 몰래 기습한 것처럼 말하는 건 웃기다는 거다.”
나는 목덜미에 닿은 단검을 의식하며 최대한 목소리를 낮췄다.
“서로 얼굴을 보고 있었고, 네가 먼저 선을 넘었다. 그걸 뒤에서 몰래 찌른 것처럼 말하지 마.”
볼프람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조금 사라졌다.
하지만 곧 그는 다시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평민답게 말은 잘하는군.”
“…….”
“하지만 귀족 사회에서는 말 한마디에 칼을 뽑는 쪽이 더 천박한 법이다. 특히 한때 공왕가였다는 여자가 길거리 한복판에서 마력을 휘둘렀다면 더더욱.”
나는 이를 악물었다.
녀석은 일부러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엘레노아가 참지 못하고 달려들기를 바라는 것처럼.
“아무튼 그날의 일은 끝난 이야기다. 지금 내가 여기 온 건 전투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야.”
“끝났는지는 네놈이 정하는 게 아니지.”
볼프람은 미노타우르스의 시체에서 천천히 내려오며 나를 내려다봤다.
“내 입장에서는 틸렌에서 나를 공격한 놈들의 일행이, 이번에도 내가 싸우는 장소 근처에 숨어 있던 셈이다. 그러니 의심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
“자, 다시 묻겠다.”
볼프람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다른 둘은 어디 있지?”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엘레노아가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둘 다 쉬고 있다.”
“쉬고 있다?”
볼프람이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이 미궁 안에서?”
“전투가 계속 이어졌으니까. 잠깐 숨을 돌릴 장소를 찾았을 뿐이야.”
“하…!”
볼프람은 코웃음을 쳤다.
“미궁에서 휴식할 장소라. 참 편리한 말이군. 내가 알기론 이곳은 침대와 차가 준비된 여관이 아닌데.”
“그런 뜻이 아니야.”
나는 최대한 감정을 눌러 담으며 말했다.
“우리가 있던 곳에 마물이 하나 있었다. 벽 틈에 숨어 기습하는 촉수 형태의 마물이었지. 방금 전에 그놈을 쫓아냈다.”
볼프람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그래서?”
“거대한 마물은 보통 자기 구역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그 정도는 제국 기사인 너도 알고 있겠지.”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방금 네가 쓰러뜨린 미노타우르스도 마찬가지야. 그런 놈이 자리를 잡은 구역 근처에는 어중간한 마물들이 함부로 접근하지 못한다. 잡아먹히거나 쫓겨날 테니까.”
볼프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가 있던 곳도 비슷했어. 그 촉수 마물이 차지하고 있던 사냥터였고, 우리는 그놈을 쫓아냈다. 그러니 적어도 당장은 그 주변에 다른 마물들이 몰려들 가능성이 낮다는 거다.”
“그러니까 네 말은…….”
볼프람이 비릿하게 웃었다.
“네놈들이 미궁 안에서 마물의 구역을 빼앗아 휴식처로 삼고 있다는 건가?”
“비슷해.”
“참 대단하군. 평민 주제에 미궁 생태까지 꿰고 있다니.”
비아냥거리는 말투였지만,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괜히 말싸움을 이어가 봐야 좋을 게 없었다.
“그 말을 내가 어떻게 믿지?”
볼프람이 한 걸음 다가왔다.
“정말 그런 장소가 있는지, 아니면 네놈이 우리를 함정으로 끌고 가려는 건지 알 수 없지 않나?”
“믿든 말든 네 자유다. 하지만 내가 여기 온 건 전투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고, 네가 걱정하는 기습 같은 건 없었다.”
“그렇다면 안내해라.”
“뭐?”
“네놈이 말한 그 안전한 휴식처 말이다.”
볼프람은 미노타우르스의 시체를 발끝으로 툭 찼다.
“나도 방금 미노타우르스를 처리했다. 세레나도 피로가 쌓였고, 나 역시 잠시 쉴 장소가 필요하다.”
그는 비릿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우리도 같은 의뢰를 받은 제국 기사다. 굳이 협력까지 하지는 않더라도, 미궁 안에서 확보한 휴식처 정도는 공유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나는 얼굴을 굳혔다.
정말로 우리가 안전한 공간을 확보했고, 다른 기사들이 휴식을 요청했다면 거절하기엔 어려웠다.
하지만 상대가 볼프람이라는 게 문제였다.
“거긴 우리 파티가 먼저 확보한 곳이야.”
“그래서?”
볼프람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미궁 안에 자리세라도 낼 생각인가? 아니면 정말 뭔가 숨기고 있는 건가?”
“…….”
“네 말이 사실이면 우리도 잠시 쉬면 된다. 거짓이면 네놈이 우리를 속였다는 뜻이 되겠지.”
그의 시선이 내 목덜미 뒤쪽에 선 세레나에게 향했다.
“세레나. 이 평민이 이상한 길로 안내하면 바로 베어라.”
“네.”
등 뒤에서 짧은 대답이 들려왔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엘레노아와 루크레치아가 있는 곳으로 이 둘을 데려가는 건 위험했다.
하지만 여기서 거부하면 놈은 내 말을 거짓말로 몰아붙일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 내게는 검도 없었다.
“……알겠다.”
나는 낮게 대답했다.
“안내하지.”
볼프람은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래. 그럼 가보자고. 네놈들이 차지했다는 그 안전한 휴식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