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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미궁 2


23화. 미궁 2 미궁에 들어가기 전, 우리는 틸렌에서 필요한 물자를 최대한 준비해야만 했다. 미궁은 일반적인 동굴과 달랐다. 깊숙이 들어갈수록 안전하게 쉴 수 있는 장소는 거의 없었고, 한 번 탐사를 시작하면 며칠 동안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흔했다. 그렇기에 식량과 식수는 기본이었다. 장기간 보관이 가능한 육포와 건빵, 말린 과일, 그리고 약초까지 꼼꼼히 챙겨야 했다. 특히 미궁 내부는 방향 감각을 잃기 쉬웠기에 지도 제작용 양피지, 횃불과 비상용 밧줄도 필수품이었다. ​ “이것도 사야 해!” ​ 엘레노아는 어느새 노점상 앞에서 각종 간식을 한 아름 들고 있었다. ​ “그건 비상식량이 아니라 그냥 먹고 싶은 거잖아.” “비상상황에 기분이 좋아질 수 있으면 비상식량 맞아.” “그런 논리는 처음 들어보는데.” ​ 루크레치아는 한숨을 쉬면서도 결국 그녀가 고른 물건 몇 개를 함께 챙겼다. 반면 나는 무기 점검에 집중했다. 미궁 안에서는 작은 실수 하나가 목숨을 앗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준비를 마친 우리는 틸렌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 틸렌 기사단 지부에서 얘기했던 것과 달리 미궁으로 가는 동안 다른 제국 기사들을 만나진 않았다. ​ “우리가 처음일지도 몰라.” ​ 엘레노아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 “저기가 미궁인가…….” ​ 의뢰서에 적혀 있는 위치를 따라 황무지를 가로질러 작은 협곡 안으로 들어가자 곧 목적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절로 감탄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협곡 절벽 한가운데, 거대한 입구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동굴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 입구 안쪽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입을 벌리고 먹잇감을 기다리는 것처럼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 “으으…. 꼭 괴물 입속 같아.” ​ 엘레노아가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 “동감이야.” ​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 “준비됐지?” ​ 두 사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우리는 미궁의 어둠 속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 안은 밖에서 바라본 것처럼 지극히 어두웠다. 주변을 밝히고 있는 건 엘레노아가 들고 있는 횃불 하나가 전부였다. 미리 정해둔 역할대로 육체 강화에 특화된 나와 루크레치아가 앞뒤에서 경계를 맡고, 엘레노아가 중앙에서 광원을 유지했다. ​ “생각보다 어둡네.” ​ 엘레노아가 횃불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 보통 동굴이나 지하 공간을 탐사할 때 가장 위험한 건 어둠 그 자체가 아니었다. 오히려 빛이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빛이 닿지 않는 그림자 구역은 더욱 어둡게 보이고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 숨어 있는 적을 발견하기 어려워진다. 특히 자연 동굴이라면 울퉁불퉁한 바위와복잡한 지형이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치명적인 사각지대가 되곤 했다. ​ 하지만 미궁은 달랐다. 벽과 바닥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반듯했고 복도 역시 일정한 폭을 유지하고 있었다. 덕분에 예상치 못한 그림자가 생기는 경우는 비교적 적었다. 물론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 “모퉁이다.” ​ 내 말에 엘레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미리 준비해 둔 여분의 횃불 하나를 꺼내 모퉁이 너머로 던졌다. ​ 데구르르. ​ 횃불이 바닥을 구르며 저편을 밝혔다. 잠시 기다렸지만 별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 “이상 없음.” “가자.” ​ 우리는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횃불의 불꽃이 흔들릴 때마다 거대한 미궁의 복도에도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 너머에 무엇이 숨어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 “정지.” ​ 루크레치아가 손을 들어 올리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리는 즉시 걸음을 멈췄다. 동시에 언제라도 마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 자세를 낮추고 경계를 강화했다. ​ 잠시 후…. ​ 쿵…! 쿵…! ​ 지축을 울리는 묵직한 소리가 복도 저편에서 들려왔다. 마치 거대한 공성추가 바닥을 내리찍는 듯한 소리였다. 곧 어둠 속에서 붉은 안광 두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천장 가까운 높이에 떠 있는 그것은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 “큰 개체야. 조심해.” ​ 루크레치아가 대검을 고쳐 쥐며 말했다. ​ 쿵! 쿵! 쿵! ​ 우리의 기척을 눈치챈 듯 발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나는 즉시 여분의 횃불 하나를 꺼내 복도 저편으로 힘껏 던졌다. 횃불은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 데구르르. ​ 바닥을 구르던 불빛은 곧 거대한 발 아래에서 멈췄다. 그리고 이글거리는 불꽃이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존재의 모습을 드러냈다. ​ “미노타우르스……!” ​ 놈은 복도 전체를 가득 채울 정도의 거대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검붉은 털로 뒤덮인 육체는 바위처럼 단단해 보였고 부풀어 오른 근육은 마치 쇠뭉치를 이어 붙여 만든 것 같았다. 머리는 황소, 몸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이마에서는 거대한 뿔 두 개가 앞으로 휘어져 있었고 그 끝은 창날처럼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입에서는 짐승의 숨결이 거칠게 새어 나왔다. ​ 후욱! 후욱! ​ 놈이 숨을 내쉴 때마다 뜨거운 김이 허공에 흩어졌다. 특히 눈에 띄는 건 오른손에 들린 무기였다. 통나무를 그대로 뽑아온 듯한 거대한 곤봉은 한 번만 휘둘러도 사람 몇 명쯤은 그대로 으깨버릴 것 같았다. ​ 무엇보다 압도적인 건 그 존재감이었다. 마치 미궁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복도 한가운데를 가득 메운 채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 “쿠어어어어어어어어!” ​ 미노타우르스가 복도를 뒤흔드는 포효를 내지르며 우리를 향해 돌진해 왔다. ​ “엘레노아!” ​ 그 압도적인 질량이 그대로 우리를 짓뭉개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움직인 건 엘레노아였다. ​ “막을게!” ​ 그녀의 몸에서 갈색 마력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순식간에 응축된 마력은 우리와 미노타우르스 사이에 거대한 벽이 되어 솟아올랐다. 투명한 갈색의 마력 장벽이었다. 미노타우르스는 눈앞에 나타난 장벽을 보자마자 머리를 깊게 숙였다. 거대한 뿔을 앞으로 겨눈 채 전속력으로 들이받는다. ​ 쾅! ​ 미궁 전체가 흔들릴 정도의 충격이 터져 나왔다. 장벽이 크게 출렁였고 천장에서 먼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하지만 엘레노아가 만들어낸 마력 장벽에는 금 하나 생기지 않았다. ​ “쿠어어어!” ​ 미노타우르스는 분노한 듯 포효하며 다시 한번 장벽을 들이받았다. ​ 쾅! 쾅! ​ 놈은 미친 듯이 철퇴를 휘두르고 뿔로 들이받으며 발광했지만 장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기세가 완전히 꺾인 순간이었다. ​ “지금!” ​ 엘레노아의 외침과 동시에 나와 루크레치아가 동시에 움직였다. 루크레치아의 손에서 푸른 한기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 쩌저저적! ​ 미노타우르스의 오른쪽 다리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놈이 다리를 빼내려고 몸부림쳤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놈을 향해 달려들며 미래시를 발동했다. 순간 수십 개의 잔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 철퇴에 머리가 으깨지는 미래. 뿔에 꿰뚫리는 미래. 벽에 처박혀 온몸의 뼈가 부러지는 미래. ​ 그리고 그 수많은 죽음 속에서 살아남는 단 하나의 길을 찾아냈다. ​ 부우우웅! ​ 거대한 철퇴가 내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나는 몸을 낮춘 채 놈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 쾅! ​ 철퇴가 미궁의 바닥을 후려치자 폭음과 함께 돌바닥이 산산조각 났다. 그 순간 나는 검을 휘둘렀다. ​ 서걱! ​ 미노타우르스의 오른쪽 뿔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 “쿠워어어어!” ​ 놈이 비명을 내지르는 사이 루크레치아가 다시 손을 뻗었다. 로엔하임 가문의 가보인 실버 팽이 그녀의 염동력에 이끌려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푸른 냉기가 검신을 감싸고 있었다. ​ 콰직! ​ 실버 팽은 얼어붙은 오른쪽 다리를 정면으로 베어냈다. 이미 얼음으로 약해져 있던 무릎 관절은 대검의 일격을 버티지 못했다. 잘려 나간 다리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거대한 몸이 균형을 잃는다. ​ 쿵! ​ 미노타우르스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미궁 전체가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루크레치아가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공중에 떠 있던 실버 팽이 그녀의 손으로 되돌아갔다. 푸른 냉기가 검신을 감싸고, 루크레치아는 추락하는 기세를 그대로 실어 검을 내리쳤다. ​ 서걱! ​ 은빛 검광이 어둠을 가르며 지나갔다. 순간 미노타우르스의 포효가 멈췄다. ​ “…….” ​ 놈의 붉은 안광이 흔들린다. 목에 얇은 붉은 선 하나가 생겼다. ​ 쿠드득. ​ 거대한 머리가 천천히 몸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 쿵! ​ 잘려 나간 머리가 바닥에 떨어지며 미궁이 흔들렸다. 뒤이어 목을 잃은 거구 역시 중심을 잃고 앞으로 쓰러졌다. ​ 쿠우우웅! ​ 마치 작은 건물이 무너진 것 같은 굉음이 울려 퍼졌다. 잘려 나간 목에서는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뜨거운 피가 바닥을 따라 흘러내렸다. 잠시 동안 거대한 몸이 경련하듯 꿈틀거렸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미노타우르스의 붉은 안광은 완전히 빛을 잃었고, 미궁을 뒤흔들던 거대한 생명력 역시 빠르게 사라져 갔다. ​ “끝났네.” ​ 엘레노아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쓰러진 미노타우르스를 바라봤다. 미노타우르스는 홉고블린보다 훨씬 상위에 위치한 지휘관 개체 중 하나였다. 홉고블린이 약한 마물들을 규합해 수를 늘리는 유형이라면, 미노타우르스는 힘으로 주변 마물들을 굴복시키는 유형에 가까웠다. ​ 오크나 트롤 같은 강력한 마물조차 그 힘에 복종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수백 마리에 달하는 마물 무리를 이끌고 다니기도 했다. 실제로 미노타우르스가 이끄는 무리는 하나의 군대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 “초입부터 미노타우르스라니…….” ​ 엘레노아가 잘려나간 머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 “확실히 이상하네요.” ​ 루크레치아 역시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히려 조금 이상했다. 미노타우르스 정도 되는 지휘관 개체라면 이미 틸렌 주변에서 목격담이 쏟아졌어야 했다. ​ “어쩌면 아직 지상으로 나가지 않았던 걸지도 몰라.” “응?” “우리가 운이 나빴던 거지.” ​ 나는 잘려나간 미노타우르스를 가리켰다. ​ “저 녀석도 결국 지휘관 개체야. 최근 미궁에서 지휘관 개체들이 계속 올라온다고 했잖아. 어쩌면 저 녀석도 이제 막 밖으로 나가려다가 우연히 우리랑 마주친 걸 수도 있어.” ​ 그 말에 두 사람도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 “그렇다면 더더욱 근원지를 찾아야겠네.” ​ 엘레노아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는 전리품을 챙긴 뒤 다시 안쪽으로 향했다. 이후에도 전투는 몇 차례 더 이어졌다. 다행히 지휘관 개체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지만 마물의 숫자는 확실히 많았다. ​ “잠깐….” ​ 한참을 걷던 루크레치아가 손을 들어 우리를 멈춰 세웠다. ​ “왜?” “물소리가 들려요.” ​ 귀를 기울이자 나 역시 희미하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졸졸 ​ 아주 작은 물줄기가 흐르는 소리였다. 소리를 따라 이동하자 복도 한쪽에서 갈라져 나온 좁은 길목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안쪽에는 생각보다 넓은 공간이 있었다. 천장에서는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고, 벽면을 따라 손바닥 두세 개 정도 폭의 작은 물줄기가 흘러가고 있었다. ​ “오.” ​ 엘레노아가 감탄했다. 지금까지 지나온 좁고 답답한 복도와 달리 이곳은 제법 넓었다. 무엇보다 통로에서 살짝 벗어난 위치라 다른 마물들에게 발견될 가능성도 상대적으로 낮아 보였다. 나는 주위를 한 번 더 살펴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 “여기서 잠깐 쉬어가자.” “찬성!” ​ 엘레노아가 곧바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루크레치아 역시 벽 쪽을 확인하며 경계에 적합한 위치를 살폈다. 몇 시간째 계속해서 전투와 탐색을 반복한 만큼 잠시 숨을 돌릴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작은 물줄기 옆에 자리를 잡고 미궁 안에서의 첫 휴식을 준비했다. 몇 시간 동안 계속해서 미궁을 탐색하고 전투까지 이어진 탓에 몸에는 생각보다 피로가 쌓여 있었다. 엘레노아는 가방에서 말린 과일을 꺼내 입에 넣더니 길게 숨을 내쉬었다. ​ “후우…. 역시 잠깐이라도 쉬니까 살 것 같아.” “너무 오래 쉬진 말자. 여기도 완전히 안전한 곳은 아니니까.” “알고 있어. 알고 있어.” ​ 엘레노아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물줄기 옆에 쪼그려 앉아 손끝으로 흐르는 물을 톡톡 건드렸다. 졸졸 흐르는 작은 물줄기는 생각보다 맑았다. 벽면 틈에서 흘러나와 바닥의 홈을 따라 아래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 “이 물…. 마셔도 되려나?” “일단은 우리가 가져온 물로 해결하자. 혹시 모르니까….” “응. 카엘군.” ​ 엘레노아는 가죽 수통을 꺼내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한동안 전투가 계속된 탓에 꽤 갈증이 났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물을 다 마신 뒤, 잠시 내 눈치를 보듯 주위를 둘러봤다. ​ “카엘군. 잠시만…. 여기 앞에만 갔다올게” “어디 가게?” “그…… 잠깐 볼일 좀.” ​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순간 무슨 의미인지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궁에 들어온 뒤로 꽤 시간이 지났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 “멀리 가지 마.” “응. 바로 저쪽까지만 갔다 올게.” ​ 엘레노아는 횃불 하나를 들고 물줄기가 흘러가는 방향과는 반대편, 통로에서 살짝 꺾여 들어간 샛길 쪽으로 걸어갔다. 나와 루크레치아는 일부러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발소리가 조금씩 멀어졌다. ​ 철벅. 철벅. ​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렸다. 엘레노아가 흐르는 물을 밟는 소리인가? 하지만 그런 소리라고 하기엔 굉장히 둔탁했다. 순간 경계심이 솟구쳤다. ​ “……루크레치아.” “저도 들었어요.” ​ 루크레치아가 조용히 실버 팽의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 “엘레노아!” ​ 나는 엘레노아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갔다. 혹시 볼일 중이라 민망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 “엘레노아!” ​ 내 목소리가 좁은 통로 안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엘레노아! 괜찮아?” ​ 평소의 엘레노아라면 능글맞은 대답을 하며 나를 당황하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들리는 건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와 내 발소리뿐이었다. ​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나는 걸음을 더 빠르게 했다. 몇 걸음만 더 들어가면 엘레노아가 향했던 작은 공간이 나올 터였다. ​ “…….” ​ 나는 반사적으로 검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모퉁이를 돌자 바닥에 떨어진 횃불이 보였다. 엘레노아가 들고 갔던 횃불이었다. 횃불은 벽 한쪽에 부딪힌 채 꺼지기 직전까지 불꽃을 흔들고 있었다. 흐릿한 불빛이 통로 안쪽을 비췄다. ​ “엘레노아?” ​ 나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곳에 엘레노아가 있었다. 정확히는 엘레노아의 몸 일부가 보였다. ​ 그녀의 상체는 이미 정체불명의 거대한 살덩어리 속으로 빨려 들어간 뒤였다. 벽면의 어둠 속에서 벌어진 거대한 입. 축축하게 번들거리는 살덩어리가 몇 겹으로 벌어져 있었고, 그 안쪽에서 수십 개의 검붉은 촉수가 꿈틀거리며 엘레노아의 몸을 붙잡고 있었다. ​ “……엘레노아.” ​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내가 소리쳤는데도 대답이 없었던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대답할 수 없는 상태였다. 상체가 완전히 마물의 입 안쪽으로 삼켜진 채, 남은 몸마저 조금씩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 “이런……!” ​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검을 뽑아 들고 곧장 앞으로 달려들었다. ​ “루크레치아!” ​ 내 외침이 미궁 안에 울려 퍼졌다. 동시에 마물의 촉수 몇 개가 나를 향해 뻗어왔다. 나는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 서걱! ​ 가장 가까운 촉수가 잘려 나가며 검붉은 체액이 바닥에 튀었다. ​ “카엘!” “루크레치아! 엘레노아를 구해야 해!” ​ 나는 다급히 외치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동시에 두꺼운 촉수들이 허공을 가르며 쏘아졌다. ​ 서걱! ​ 검을 한 번 휘두르자 날아들던 촉수들이 허공에서 잘려 나갔다. 하지만 바닥에 떨어진 촉수들이 꿈틀거리더니, 끈적한 체액을 흘리며 다시 서로 달라붙기 시작했다. ​ “뭐야……!” ​ 잘려 나간 촉수들이 살아 있는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엉겨 붙었다. 처음보다 더 굵고 질긴 형태였다. ​ 부우웅! ​ 나는 몸을 비틀어 촉수의 공격을 피했다. 촉수가 스치고 지나간 벽면이 그대로 움푹 파였다. 맞았다간 뼈째로 으스러질 위력이었다. ​ “잘라도 다시 붙어! 젠장!” ​ 나는 이를 악물고 다시 앞으로 파고들었다. 엘레노아의 몸은 아직 완전히 삼켜지지 않았다. 하지만 마물의 입 안쪽에서 뻗어 나온 촉수들이 그녀를 더욱 깊숙이 끌어당기고 있었다. ​ 시간이 없었다. 나는 미래시를 발동했다. 수십 개의 잔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 촉수에 다리가 붙잡히는 미래. 허리가 꺾이는 미래. 검을 놓치는 미래. 그리고 마물의 입속으로 함께 끌려 들어가는 미래. 나는 가장 얇은 틈을 찾아 몸을 던졌다. ​ 서걱! 서걱! ​ 쉴 새 없이 검을 휘두르며 엘레노아를 휘감은 촉수들을 잘라냈다. 하지만 잘려 나간 촉수들이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다시 꿈틀거리며 엘레노아를 향해 기어갔다. 끝이 없었다. ​ “루크레치아!” “알고 있어요.” ​ 그 순간, 등 뒤에서 차가운 한기가 밀려왔다. 루크레치아가 손을 뻗자 푸른 마력이 복도 전체로 퍼져 나갔다. ​ 쩌저저적! ​ 바닥에 떨어져 꿈틀거리던 촉수들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서로 달라붙으려던 살덩어리들도 얼음에 갇힌 채 움직임을 멈췄다. 마물이 처음으로 거칠게 몸을 뒤틀었다. ​ 쿠르르르륵! ​ 입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거대한 구강 안쪽에서 기괴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 “효과 있어!” ​ 엘레노아를 끌어당기던 촉수들의 움직임이 확연히 느려졌다. ​ “카엘, 지금이에요!” ​ 루크레치아의 외침과 동시에 나는 다시 땅을 박찼다. 이번에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얼어붙은 촉수들은 더 이상 서로 달라붙지 못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얼어붙은 촉수들이 산산조각 나며 바닥에 흩어졌다. 나는 이를 악물고 마물의 입가까지 파고들었다. 엘레노아의 몸을 붙잡은 마지막 촉수들이 보였다. ​ “조금만 버텨!” ​ 나는 검을 고쳐 쥐었다. 그리고 루크레치아의 냉기가 닿아 굳어버린 촉수들을 향해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 쿠르륵! ​ 마물이 괴성을 지르며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댔다. 그럴 때마다 아직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엘레노아의 몸이 허공에서 크게 흔들렸다. ​ “젠장……!” ​ 나는 이를 악물었다. 저대로 더 시간이 끌리면 위험했다. 마물의 안쪽에서 뿜어져 나오는 끈적한 체액이 엘레노아의 옷을 녹이고 있었다. 이미 제복 곳곳이 녹아내려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 “카엘!” ​ 루크레치아가 곧장 손을 뻗었다. 푸른 냉기가 폭발하듯 퍼져 나가며 촉수와 벌어진 입가를 뒤덮었다. ​ 쩌저저적! ​ 마물의 움직임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몸부림치던 촉수들이 허공에서 멈추고, 엘레노아를 붙잡고 있던 살덩어리의 움직임도 눈에 띄게 느려졌다. 그 찰나를 놓칠 수는 없었다. 나는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 “하아아!” ​ 나는 검을 양손으로 움켜쥐고 그대로 찔러 넣었다. ​ 푹! ​ 검날이 질척한 살덩어리를 꿰뚫었다. 손끝으로 끔찍한 감촉이 전해졌다. ​ 쿠르르르르륵! ​ 마물이 미궁 전체를 울리는 괴성을 터뜨렸다. 동시에 상처 난 부위에서 검붉은 체액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 “큭!” ​ 나는 얼굴을 팔로 가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마물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 철퍽! ​ 엘레노아의 몸이 끈적한 체액과 함께 밖으로 밀려 나왔다. ​ “엘레노아!” ​ 마물은 더 이상 우리와 싸울 생각이 없는 듯했다. 푸른 냉기에 반쯤 얼어붙은 몸을 억지로 비틀더니, 벽면의 좁은 틈 사이로 빠르게 몸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 “……!” ​ 루크레치아가 실버 팽을 날렸지만 놈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검날이 벽면을 긁고 지나갔을 때, 마물은 이미 검붉은 체액 자국만 남긴 채 어둠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 “……젠장.” ​ 나는 이를 악물고 검을 내렸다. 하지만 지금은 도망친 마물을 쫓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다급히 바닥에 쓰러진 엘레노아를 향해 달려갔다. ​ “엘레노아. 정신 차려.” “…….” ​ 엘레노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물의 체액 때문인지 그녀의 상의는 대부분 녹아내려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 간신히 남은 하의만 몸을 가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황급히 시선을 돌린 뒤 겉옷을 벗어 그녀의 몸 위에 덮어주었다. ​ “괜찮아. 이제 빠져나왔어.” ​ 내 말이 들리는지 들리지 않는지, 엘레노아는 한동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가늘게 떨리는 숨만이 그녀가 아직 의식을 붙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루크레치아도 곧장 다가와 엘레노아의 상태를 확인했다. ​ “상처는요?” “큰 외상은 없어 보여. 하지만 충격이 큰 것 같아.” ​ 나는 엘레노아를 조금 더 단단히 안아 들었다. 일단 그녀가 정신 차릴 때까지 미궁 탐사는 중단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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