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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정수정 - 재회


“진태유 씨, 오늘 인턴 오니까 사수 좀 맡아주세요. 부탁해요.” 출근하자마자 팀장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아직 새내기 티도 못 뺀 내가 사수라니, 어이가 없다. “제가요? 사수요?” “이런건 막내가 하라고 있는 거잖아요. 니가 안하면, B레벨인 내가 하나요? 너도 이제 정직원이잖아요.” 별 수 있나. 그렇게 오늘도 시작됐다. 점심 무렵, 회의실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인턴으로 온 나현입니다!” 목소리부터 밝았다. 하늘색 머리띠에, 풍성한 갈색 퍼머머리. 귓불엔 하트 귀걸이가 깡깡 흔들리고, 흰 블라우스 아래 살짝 짧은 체크무늬 치마가 눈길을 끌었다. 풋풋한 인상인데, 묘하게 시선이 갔다. “멘토분이 진태유 선배님이라고 들었어요!” 나를 보며 웃는 얼굴. 그리고, “오빠! 잘 부탁드려요!” "오빠?" "네, 저 19살이에요. 올해 딱 성인, 오빠 맞죠?" "그러네요." "우리나라에서, 성인 미혼은 딱 1년, 제가 그 꽃다운 나이랍니다." 그래, 딱 꽃다운 나이에, 꽃 같은 얼굴이긴 하다. ㅡㅡㅡㅡㅡ “오빠, 이거 어떻게 해요?” 나현이 또 내 책상 앞으로 달려왔다. 그녀가 고개를 기울일 때마다 하트 귀걸이가 반짝였다. “그건... 이렇게 클릭하고, 여기서 이렇게 연결하면 돼.” 난 최대한 사무적으로 말했다. 진짜다. 최대한. 근데, 왜 자꾸 내 옆에 앉을 때마다 이리 가까운 건데? “아~ 이렇게요? 오빠 천재다! 완전 멋져요!” 그녀는 웃으며 내 쪽으로 더 바짝 붙었다. 나현의 머리 냄새가 코 끝에 스친다. 기분 탓인가? 가슴이 팔꿈치에 스쳤다? “...그렇게까지 붙을 필요는 없는데.” “앗, 죄송~ 전 집중하면 가까이 보게 돼서~” 웃는 얼굴이 너무 해맑다. ‘오빠’ 소리에 반응하는 내가 이상한 걸까? “오빠, 점심 누구랑 먹어요?” “오빠, 기획실은 어딨어요?” "오빠, 이 복사기 어떻게 써요?" "오빠?..." “오빠~ 퇴근이에요?”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던 나현이 해맑게 웃었다. 그리고 익숙한 듯 자연스러운 친밀감. “응.” “집이 어디세요?” “…삼성동 근처.” “헐~ 저 라움시티 살아요! 완전 바로 옆이다!” 슬쩍 팔짱을 끼며 바짝 다가오더니, “차 있으시죠? 저 태워주세요~!” 나한테 페로몬이라도 풍기나? 이렇게 팔짱을 끼고 비비면, 없는 차라도 살 수 밖에 없겠다. 조수석 문을 열어주자 그녀가 빠르게 올라탔다. 안전벨트를 매며 차 안을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갑자기 물었다. “오빠 무슨 레벨이에요?” “…C.” “에— 진짜요? 20살에 C요?” 입을 틀어막고 웃더니, “오빠 정력 짱인가봐요.” “…아니, 뭐…” “아내분은요?” “둘” “헐, 능력자네~ 오빠 최연소 A레벨 가겠어요.” 나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신호가 바뀌고 차는 조용히 움직였다. 도착하자 그녀가 벨트를 풀고 문을 반쯤 연 채 몸을 돌렸다. “오늘 태워주셔서 감사해요, 오빠.” 그리고 한 박자 쉬고, 장난기 가득한 미소로 말했다. “진짜 놀러갈래요. 오빠 집도 궁금하고~ 다음엔 꼭 집에 불러줘요.” 문이 닫히고, 나는 천천히 출발했다. …얘 뭐지? ㅡㅡㅡㅡ 저녁을 먹고 서아린의 허벅지에 누워 있었다. 아린이 내 귀를 파주고 있었고 시아는 내 발톱을 깎고 있다. 야, 이거 대통령도 안부럽다. TV에서는 대통령이 나와 국민과의 대담을 하는 토크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다. “출산헌법 덕에 뭐가 좋아졌는지, 자유롭게 말씀해 보시죠.” 윤규상 대통령이 폼을 잡으며 말했다. 단정한 슈트, 묘하게 튀는 넥타이 색깔. 말투는 정제되어 있지만, 표정은 지어낸 냄새가 났다. 첫 번째 마이크는 50대 남성에게 돌아갔다. “성매매가 없어졌습니다. 굳이 돈 주고 할 이유가 없어요. 한 달마다 여자가 바뀌니까. 요즘은 성매매 업소가 없죠. 단속을 안하는대도요.. 저는 윤대통령님, 출산헌법 대 찬성입니다.” 사람들이 웃었다. 사회자도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는 젊은 남자. “성병도 거의 사라졌어요. 의무검사랑 매칭 시스템 덕분이겠죠. 이젠 병 걸릴 걱정 없이 해도 되니까, 뭐… 아주 좋죠.” 또 웃음이 터졌다. 카메라는 대통령을 비췄다. 눈빛은 진지했지만, 웃음을 참는 듯한 느낌이 스쳤다. 세 번째는 의외로 30대 여성. “피임약, 콘돔 이런 거 이제 안 써요. 물가 오른 시대에 생활비 절약도 꽤 돼요.” 거실 소파에서 TV를 보던 아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게 진짜로 좋아진 걸까?” “좋아진 사람도 있겠지.” “합계출산율은 0.9명. 33개월 연속 상승. 공정한 출산, 모두의 책임. 강력한 대한민국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국민여러분, 정부를 응원해 주십시오.” 윤규상이 말끝을 힘줘 마무리했다. “비리 사건들로 지지율이 바닥 찍으니 국민과 대담을 다 하는군. 짜고 치는 고스톱, 다 보이지만...” TV를 껐다. “저 사람, 방송 끝나면 또 술마시러 갈 거다.” “랑이, 정치에 관심 많아요?” 시아가 다가오더니 슬쩍 내 허벅지를 문질렀다. “아니. 내 아내들과 놀아주는 것도 벅차.” “히히. 그럼 우리한테만 집중해요.” 정시아. 웃고 있지만 손은 내 자지 위에서 놀고 있었다. ㅡㅡㅡㅡㅡ 며칠 동안 나현은 내 메신저를 점령했다. 「오빠~ 이 파일 어디에 올려야 해요?」 「오빠, 점심 드셨어요? 저는 지금 편의점 샐러드요ㅠㅠ」 「오빠, 첫사랑 얘기 해주세요…」 재택 근무인지 재택 잡담인지를 사흘간이나 했다. 처음엔 단순히 신입 인턴의 적응기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대화는 점점 신변잡기로 넘어갔다. 회사 이야기보다 개인사를 더 묻는 느낌. “오빠, 고마워서 뭘 좀 샀어요.” “이따 오빠 집에 들려서 주고 가도 되죠?” 문자 창 아래, 하트 이모티콘이 깜빡였다. 짜증이 간혹 났지만 오빠 오빠 거리는 통에 그냥 무장해제 당했다. ㅡㅡㅡㅡㅡ 띵동- 진짜 왔다. “씨… 지금 왜 와.” 현관벨 소리에 나는 화들짝 일어났다. 시아는 내 무릎에 걸터앉아 물을 퍼붓고 있었고, 아린은 뒤에서 내 등을 밀착한 채 문질러주고 있었다. 아내 둘에게 목욕 당하던 중이었다. “기다려, 둘 다 잠깐만…” 허겁지겁 수건을 두르고 나가 현관문을 열자,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든 나현이 방긋 웃고 있었다. “오빠~!?” "응. 씻고 있느라 늦었어..." "꺅~ 멋있어요" 나현이 수건을 두른 내 몸을 스캔했다. 양손에 쇼핑백을 들고 선 나현. 눈웃음 잔뜩 담은 얼굴, 그녀의 피부 빛을 반사해서, 하트 귀걸이가 반짝거렸다. “오빠한테 고마워서 이것저것 좀 샀어요~ 케잌이랑...” 나는 쇼핑백을 받아들며,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인사치레로 "잠깐 들어와서 같이 먹을래?" 라고 했는데 나현은 이미 신발을 벗고 거실에 들어와 있었다. “와. 언니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이리와서 같이 드세요. 인사도 드릴 겸~” 시아랑 아린은 허겁지겁 욕실에서 나와, 목욕가운만 걸친 채 거실에 앉아 있었다. “헉… 진짜 예쁘세요… 두 분 다… 아내분들이신 거죠?” 나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했다. 식탁엔 어느새 케이크, 에이드, 브라우니가 차려졌다. 그때였다. 시아가 조심스럽게 과일을 집다 말고, 살짝 배를 매만졌다. 본인은 모르게 하는 습관 같은 동작. 나현의 시선이 스쳤다. “아… 혹시… 아기가…?” 말을 다 끝내지 않았는데, 아린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 깜놀이. 한 달 됐어요.” “어머, 깜놀이요? 진짜 귀엽다~ 왠지 건강하게 잘 자랄 것 같아요.” 나현은 손을 모으고, 시아의 배 쪽을 한 번 더 흘끗 봤다. “오빠 완전 능력자시다… 두 분 다 미인이시고, 아기도 생기고… 저까지 있었으면 어땠을까요? 아하하~ 농담이에요!” 시아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나현은, 아무렇지 않게 “아기 태어나면 저도 선물 사올께요. 꼭 보여주세요~” 라는 말까지 곁들였다. 두 아내에게서 묘하게 경계심이 흐르는데, 나현은 눈치도 못 챈 척,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떠들고 있다. 내 인생에 왠 여자들인지... ㅡㅡㅡㅡㅡ 다음날 아침.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동네 공원을 돌던 중이었다. 습관처럼 이어폰을 귀에 꽂고 걷고 있었는데— 툭. 누군가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고의인지 실수인지도 모를 애매한 감촉. “뭐야…” 고개를 돌리자, 낯선 남자의 뒷모습. 긴 후드에 모자를 눌러쓴 채, 빠르게 멀어지는 뒷모습. 내 손엔 작은 종잇조각이 하나 쥐어져 있었다. 반사적으로 펴본 메모. 익숙한 글씨체. 심장이 알 수 없이 움찔했다. 정수정 오늘 20시 /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함석로 520 정수정? 이게 진짜든, 아니든— 그 이름은 내 몸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 해가 질 무렵. 나는 차를 몰아 강원도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서울을 빠져나와 고속도로를 지나고, 좁은 국도와 산길로 접어들 무렵— 핸들 위로는 내 손에 땀이 배어 있었다. ‘…설마 진짜?’ 어느 순간부터 “그녀”라는 존재가 현실에선 완전히 사라졌었다. 망상인지, 그리움인지.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연락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 이 글씨는 분명 그녀의 것이었다. 도착한 곳은 깊은 산속, 비탈진 오르막 끝에 홀로 서 있는 낡은 주택 한 채. 주변엔 가로등도 없고, 도로도 끊긴 듯한 끝자락. 밤이 되자 정적이 더 짙게 깔렸다. 시동을 끄고, 문을 닫자— 집 안에서 미세한 인기척이 들렸다. ‘…….’ 나는 한 걸음, 또 한 걸음 집 앞 계단을 밟았다. 손은 이미 초인종에 닿아 있었다. “씨발놈. 잘살았어?” 검은 셔츠에 흙묻은 청바지. 여전히 아름답고, 여전히 눈부셨다. 나는 한 발도 떼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누나.” 목에서 겨우 나온 말 한마디에, 가슴 속 뭔가가 뚝 끊어지듯 터졌다. 눈물이 미친놈처럼 쏟아졌다. 어금니를 깨물어도 멈춰지지 않았다. “병신처럼 쳐울긴. 울 거면 자지 떼고 울어. 기집애도 아니고.” 수정도 울고 있었다. 흘러내리는 눈물은 닦지도 않고, 그녀는 몸을 돌려 안쪽으로 걸어갔다. 좁고 차가운 방이었다. 벽지엔 곰팡이. 나는 방을 둘러보다 조심스레 물었다. “여기… 누나 집이야?” “씨발, 지금 그게 중요해? 잠깐 빌린거야.” 말투는 똑같았다. 그때 그대로. 독하고, 투박하고, 서툴게 애틋했다. “뭐해? 자지 까. 나 시간 없어.” 수정은 단번에 옷을 벗었다. 속옷도, 머뭇거림도 없었다. 난 짐승처럼 달려들며 허겁지겁 바지를 벗었다. 몸이 먼저 반응하고, 마음은 이미 무너진 지 오래였다. 내 인생에 가장 씨발스럽게 사랑스러운 정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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