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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외전 1.


외전 1. 최초의 기억은 지루함이다.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었을 때부터, 주위를 둘러보면 차고 넘치는 것들로 가득했다. 화려한 저택. 뭐든지 해 주고 싶어 안달 난 사용인들. 눈길과 손에 닿는 것들 중 귀하지 않은 것들이 없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무료할까. 이유는 단순했다. 저택의 중심에 있는 여자, 내 어머니 때문이다. 어머니는 이 세상의 모든 귀한 것을 주어도 한 번도 웃지 않았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따금씩 창밖을 바라보거나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곤 했는데, 발레를 꿈꿨기 때문인지 유독 하얗고 가느다란 발목엔 늘 검붉은 자국이 나 있었다. 그건 꼭 동그랗고 단단한 고리를 걸어 둔 것 같기도 했고, 누군가가 꽉 붙잡은 흔적 같기도 했는데 어쨌든 어머니가 스스로를 포기하는 순간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어머니를 계속 지켜보고 있노라면, 사용인들은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며 내 주위를 서성거렸다. 도련님. 그러지 말고 저쪽으로 갈까요? 동화책을 읽어 드릴게요. 저랑 같이 놀아요. 도련님. 이쪽으로 오세요. 도련님. 어서……. 어린 나이였지만 그 목소리에 어찌할 수 없는 감정이 스며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래서 조용히 어머니를 뒤로한 채 그들을 따라가면, 기다렸다는 듯 같은 말을 반복했다. 어머니의 마음이 심한 감기에 걸렸노라고. 그래서 나를 제대로 돌볼 수가 없노라고. 그러면서도 그들은 구태여 “이런 상황이지만, 사모님께선 도련님을 정말 사랑하신다.”라는 말을 덧붙이곤 했다. 그러나 이제 와 돌이켜 보면 그들은 나에게 그 말만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내가 ‘사랑’을 멍한 표정, 포기한 듯 아래로 늘어뜨린 손, 혼자서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발이라 여기게 만들었으니. 어쨌든 나는 나를 위한, 그러나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은 위로를 토대로 어머니를 지켜보았다. 시체처럼 축 늘어져 있던 어머니는 해가 기울어 갈 때쯤이면 돌연 자리를 고쳐 앉았다. 그러곤 한쪽으로 밀어 두었던 성경을 가져와 어느 부분을 펼쳤다. 사용인 하나가 곱게 빗긴, 그러나 정작 본인은 신경도 쓰지 않았던 머리를 매만진다. 그러다 고운 손을 모으고선 기도를 한다. “제발…….” 그건 그녀의 입에서 들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또렷한 음성 중 하나였다. “제발 그 악마를 제게서 몰아내 주세요. 제발…….” 간절한 애원은 해가 넘어갈수록 심각해졌다. 가지런히 모았던 손은 절박하리만치 움켜쥔 채였고,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음성은 정확한 단어를 추측하기 힘들어질 정도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어머니는 작은 마을에서 교회를 운영하던 목사의 딸이었다. 신실한 데다 상냥한. 꿈을 향한 실력과 재능은 넘쳐나나 단 한 가지, 돈이 없는. 아직 채 피어나지 못한 꽃봉오리. 진부하나 그런 문장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사람이었다고. 그런 어머니가 자신의 신에게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몇 번이고 부러져, 이제는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다리까지 덜덜 떨면서. 그때까지만 해도 난 어머니를 가만히 지켜만 봤을 뿐이었다. 그 전날 밤, 나와 놀아 주겠답시고 사용인이 친절히 읽어 주었던 동화가 생각났던 까닭이었다. 자식을 위해 기꺼이 목숨도 바친 환상 속 모성만을 강조한 흔하디 흔한 동화였다. 그러니 그녀가 돌연 움직임을 멈춘 채 나를 바라본 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 나는 평소의 그녀를 따라 하듯, 조용히 그녀만을 응시하고 있었을 뿐이니. “아…….” 그럼에도 어머니는 험한 것, 봐서는 안 될 것이라도 본 사람처럼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그녀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아……, 악마야.” 간신히 단어를 배운 사람처럼 힘겹게, 그러나 토해 내듯 단어를 내뱉었다. “악마, 악마의 새끼가 날 보고 있어. 악마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그녀는 말 그대로 미친 사람처럼 물건을 내던지기 시작했다. “저리 가! 죽어 버려! 너 같은 악마 따위는……! 아아악!” 그때가 되어서야 사용인들은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어머니는 미친 듯이 발버둥 쳤지만 주사 자국이 빼곡한 가느다란 팔로는 여러 사람의 힘을 이겨 낼 순 없었으리라. “죽여야 돼.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어. 그래야……!” 그럼에도 오랜만에 찾아온 어머니의 정신은 무척이나 끈질겼다.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사용인들이 내 귀를 막아 주었음에도 똑똑히 들릴 정도였다. 귀를 막는 이들의 악력이 꽤나 억셌지만 쳐 내지 않았다. 어머니의 발악이 듣기 싫어서가 아니었다. 그리 오래가지 않을 걸 알았으니까. 예상대로 얼마 안 가 귀를 틀어막은 손이 툭 떨어진다. 시선을 들면 어김없이 그 손은 누군가를 향해 가지런히 모아져 있다. 조아린 듯한 머리도 누구를 향한 것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나의 아버지였다. “아…… 아아…….” 그리고 어머니의 인생을 망친 악마. 제 자식을 악마라고 칭하는 것을 분명 들었을 텐데. 아버지의 시선은 오직 어머니에게 꽂혀 있을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이런 일이 익숙한 듯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는데, 그건 어머니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핀에 꽂힌 나비 표본처럼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며 숨 쉬는 것이 전부인 양. “애 데리고 나가.” 아버지는 이 모든 아수라장을 가벼운 말 한마디로 정리했다. 사용인들의 손에 이끌려 나가기 전, 나는 가만히 고개를 돌렸다. 문이 닫히기 전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어느새 침대 위로 밀려 쓰러진 어머니의 발목이 아버지의 커다란 손에 붙잡혀 있는 장면이었다. “도련님.” 그런 내 신경을 어떻게든 돌려 보고자 했는지, 사용인 하나가 나와 눈을 맞췄다. “어디 가셨나 했더니, 또 사모님께 가셨군요.” “보고 싶었으니까.” 그 말에 사용인들의 얼굴에 난감함이 스쳤다. 실제로 그 말은 사실이었다. 나는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동화 속 이상적인 ‘어머니’와 다른 내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나를 악마의 새끼라고 칭하는 어머니의 발악을 지켜볼 때마다 새삼스럽게 깨닫는 것이다. 아. 내 어머니는 아직 살아 있구나. 아마 그때부터였다고 생각한다. 내가 다른 이들처럼 ‘평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은. 그러나 이유야 어쨌든 자식이 어미를 찾는 데 다른 이유는 필요하지 않았다. 결국 물음을 내뱉은 그들은 다른 말로 이 상황을 모면하고자 했다. “저희가 한 말 기억하시죠, 도련님? 이사님은 사모님을 정말 사랑하세요. 사모님도…… 그렇고요.” “언젠가, 언젠가는 도련님도 알게 되실 거예요.” 언젠가.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그날을 기다리라고 했다. 언제 올지는 그들도 모르는 듯했으나, 나는 기약 없이 그날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면 이 지루함도 조금은 괜찮아질 것 같았으니. *** 그러나 애석하게도 내가 여덟 살이 될 때까지도 그 지루함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의 상태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기 때문이었다. 정신뿐만이 아니었다. 절뚝일지언정 걸을 수 있던 어머니는 이제 휠체어가 없으면 이동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날은 겨울치고 햇볕이 따사로운 날이었다. 이번 겨울은 유독 추울 거란 기상 캐스터의 말이 거짓으로 밝혀진 날, 어머니는 거짓말처럼 입을 열었다. “축하를 해 주고 싶어.” 감정 따윈 느껴지지 않는 무감한 목소리였다. “축하라니. 누구를요?” “아이…….”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반사적으로 대답하던 어머니는 곧 말을 멈추었다. 두 눈을 느리게 깜빡이다, 입안에 맴도는 껄끄러운 것을 내뱉듯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해수 말이야.” 딸을 원했다고 들었다. 자신과 제 집안을 무너뜨린 악마와 같은 성별이 아니라, 자신과 성별이 같은 여자아이를. 그러면 원치 않은 임신이어도 어찌어찌 정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아서. 해수란 이름은 그런 간절한 마음으로 지었다. 그러나 의사의 보고로 이미 태아가 아들임을 알고 있었던 아버지는 끝까지 어머니에게 성별을 알리지 않았다. 그러니, 어머니가 아이를 안아 듦과 동시에 출산의 고통보다 더 큰 절망을 가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일까. 고이 아껴 놨던 이름을 물려주었음에도, 어머니는 아들의 이름을 잠시 기억 저편으로 치워 버린 듯했다. 어쨌든 날이 갈수록 나빠지던 상태가 기적적으로 좋아졌다는 것이 더 중요했던 사용인들은 그런 사소한 것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해수의 생일을 축하해 주고 싶어. 그동안 못 해 줬으니까.” 정신을 놓고 있는 게 일상이었던 사모님이 처음으로 아들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사용인들은 이 경사스러운 소식을 즉시 아버지에게 전달했으나, 그는 쉬이 그러겠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어머니의 상태가 좋아졌다는 것보다 아내의 달라진 태도를 의아하게 여기는 것처럼. 그럼에도 아버지는 그러겠노라 말했다. 사모님께서 차도가 보인다.  그 사소한 말이 아내의 날개를 기어코 꺾어 버린 사내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굳게 닫혀 있던 저택의 문이 열린 건 그 이후였다. 올해 들어 가장 추운 날이라는 예보에도 불구하고,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은 앞다퉈 권씨 저택으로 향했다. “네가 해수구나! 반가워. 세상에, 권 이사님을 쏙 닮았네!” 오랜 친구라도 본 것처럼 내 손을 붙잡았고, 내 의사 따윈 고려하지 않은 선물을 자랑이라도 하듯 손에 들려 주었다. 나는 그것에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어머니를 찾았다. 평소보다 깔끔한 원피스를 입은 채,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곱게 빗어 내린 어머니는 평소보다 더 아름다웠다. 나는 그런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순진한 생각이지만, 어쩌면 사용인들의 말대로 어머니가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어서였다. 자신의 말 하나로 열린 성대한 파티임에도 그녀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시끄럽게 뒤섞이는 말소리들. 추운 날씨를 참아 가면서 연주를 해야 하는 현악단 연주가들의 소리 사이로, 어머니의 허망한 중얼거림이 스며들었다. “그때 이사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럼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아니야. 그냥 그 대회에 참여하지 않았더라면. 아니, 내가 발레를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그날 아버지를 대신해 예배에 나가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아버지가, 가족들이. 아니, 아니야. 그냥, 그냥 내가……. 이유를 찾지 못한 물음은 점점 과거를 되짚어 올라갔다. 나는 문득 그녀가 죽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어머니.” 그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재촉 없이, 내 스스로 어머니를 부른 것은. 내 부름에 우뚝 멈춘 어머니가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해수구나.” “…….” “내, 내 아이.” 더듬거리며 힘겹게 단어를 내뱉은 어머니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기괴하게 비틀리다, 이내 힘겹게 웃어 보인다. “……해수야, 미안해.” 입은 활짝 웃되, 눈물을 흘리는 얼굴로. 더는 못 참겠어. 그 말의 의미를 깨닫기도 전이었다.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휠체어를 탄 사람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기립이었다. 아버지가 배치한 인력들이 미처 손을 쓰지 못한 건 그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힘차게 밖으로 달려 나갔다. 비틀비틀, 금방 꺾일 것 같으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이내 바람을 만끽하듯, 도로에 멈춰 선 그녀가 눈을 감았다. 찰나, 그녀의 입이 움직였다. 아아……. 후련한 중얼거림이 입김과 함께 새어 나왔다. 그와 동시에 차가 어머니를 쳤다. 하늘을 향해 꺾이는 고개. 흩날리는 탐스러운 검은 머리카락까지도 아름다웠던 어머니. 그것이 어머니에 대한 나의 마지막 기억이다. *** 탁. 탁. 탁. 장례식장은 연일 사람들로 가득했다. 권성의 유일한 후계자가 나이 차이, 신분 차이를 극복하면서까지 억지로 맺은 사랑이었다. 권성은 공식적인 발표를 내지 않고, 사고라는 단어로 말을 아꼈다. 그러나 그날 많은 사람이 그 장면을 목격했다. 그의 어린 아내가 스스로 차에 뛰어드는 것을. 그럼에도 소리 높여 수군거리지 못한 것은 상주랍시고 앉아 있는 나 때문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엄지를 손안에 말아 쥔 채 탁탁 튕기기를 반복했다. 힘없이 튕겨져 나간 무언가의 형상을 따라 하듯. 때마침 누군가의 부름에 내 옆에 있던 사용인 하나가 자리를 비웠다. 그러기 무섭게 사용인들이 다가왔다. “도련님, 마음이 너무 아프시죠. 어떡해…….”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이사님께서 도련님 곁을 지켜 주실 거예요.” “우리 도련님, 불쌍해서 어떡하나.” 하나같이 그런 말들이 터져 나왔다. 정말 내가 안쓰러워서 내뱉는 말인지, 혹은 이 비극을 그들 또한 내심 흥미롭게 즐기고 있는지는 알 겨를이 없었다. 내가 어머니의 죽음을 예상하지 못했듯, 나 또한 그들의 마음을 알 수 없었으니.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었다. 탁. 나는 기계적으로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그와 동시에 사용인들의 말도 함께 멈췄다. “도련님, 왜 그러세요? 뭐 필요한 거라도 있으시다면.” “아-.” 느리고 기다린 중얼거림이었다. 나 스스로 생각해도 짜증이 섞인, 오랜 지루함이 섞인 것 같기도 한 음성. “귀찮아.” 전부 귀찮았다. 그들은 사랑이란 말을 주문처럼 되뇌며 어머니가 달라지리라 내게 말했다. 그러나 오랜 기다림의 정답지인 어머니는 더 이상 대답을 알려 줄 수 없었으니, 그 귀찮은 음성들을 더 들을 이유는 없었다. 안쓰러움과 슬픔으로 뒤덮였던 얼굴은 순식간에 충격으로 바뀌었다. 그들 뒤엔 막 자리로 돌아오던 아버지도 함께였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가만히 고개를 돌려 영정 사진 속 어머니만 바라보았다. 자유를 찾아 날아간 어머니를. *** 그날 이후, 권씨 저택에 근무하던 사용인들은 일제히 정리되고 새로운 얼굴들이 들어왔다. 그중엔 억울하게 잘린 자들도 있었고, 무서워서 여기 있지 못하겠다며 제 발로 뛰쳐나간 자들도 있었다. 알 바는 아니었지만. 장례식이 끝나고, 얼마 가지 않아 단정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내가 그날 이후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음은 들여다볼 수 있었으나 어머니의 발목이 얼추 나았다는 것까진 알아차리지 못한 의사들이 나를 진찰하고 내린 진단은 이러했다. 트라우마로 인한 실어증. 그저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고 싶지 않았던 것인데. 사고 덕분에 나의 침묵엔 그럴듯한 병명이 붙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나를 어떻게든 치료해 보고자 했다. 아버지라면 당연한 행동이었으나, 나는 진짜 이유를 알았다. 내가 어머니를 닮았으니까. 아내를 붙잡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미련이 어리석은 방향으로 발현된 것이다. ‘미술과 심리 치료의 상관관계’라는, 해외에서 돈을 주고 만든 논문을 제 것이라 주장하는 여자, 천희영과 재혼까지 감행할 만큼. 그러나 애석하게도 천희영의 계획대로 되지는 못했다. “안녕하세요, 도련님. 오늘부터 도련님을 맡게 되었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 “도, 도련님……?” 많은 것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답게, 그저 쳐다보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간혹 집요한 아이가 있기는 했으나, 그땐 주변의 물건을 이용하면 되었다. 이를테면 뾰족한 가위나 천희영이 자주 쓰는 작업용 망치 같은 것들. 그러면 부모님의 사명을 등에 업은 아이들마저도 울면서 자리를 뛰쳐나갔다. 이토록 쉽고 지루한 일에 죄책감이 들 리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 침묵이 영원하리라 믿었다. 정유월을 만나기 전까지는. *** “저, 정유월입니다.” 숨을 내쉬는 것조차, 눈동자를 어디에 둘지조차 망설이는 아이였다. 나는 ‘수준이 비슷한’ 아이들은 전부 못 하겠다며 나가떨어졌다던, 그래서 이젠 방법이 없다며 소리를 지르던 천희영을 떠올렸다. 찾다 못해 이런 아이까지 데려온 건가. 그렇다면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며칠 전, 잠깐 문을 열어 놓은 사이 날아가 버렸다가 길고양이에게 목덜미를 물려 죽은 새를 묻었다. 그 새 또한 천희영이 내 동심을 깨워 주겠답시고 데려온 것이었다. 딱히 큰 애정 따윈 없었으나,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있었다. 왜 다들 그렇게 자유를 갈망하는 거지? 죽을 게 뻔한데, 뭐 하러 그리 어리석은 짓을 한단 말인가. 그것이 궁금할 때마다 나는 새의 무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대답할 어머니도, 새도 목이 꺾여 죽었다. 그래서 나는 그 의문이 생각날 때마다 가위를 들었다. 자르고 자르며 이유를 생각했다. 왜지. 왜였을까. 그러니 저 애는 아주 최악의 타이밍에 날 찾아온 것이다. 바닥엔 내가 잘라 낸 물음들이 시꺼먼 눈을 번뜩이고 있었으니까. “아아…….” 예상대로 아이는 작은 신음과 함께 그대로 기절했다. 퍽 안쓰러운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이젠 찾아오지 않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 애는 계속 찾아왔다. 내가 무서워 죽을 것 같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아마 저 작은 등을 누군가 강제로 밀어 넣었을 것이다. 네 두려움 따윈 관심 없으니 어떻게든 권해수의 입을 열게 만들라고. 그 배경이 뻔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성거리는 여자애를 그냥 무시했다. “……싫어.” 그러니 그 말에 발목이 붙들린 것은 내 의지가 아니었다. 자신보다 키가 큰 여자아이였다. 아니, 키뿐만이 아니라 윤선아가 가진 모든 것이 그 애보다 월등했다. “지, 집안 어른들이 혼낼 거야.” 그럼에도 정유월은 지지 않았다. 바들바들 떨면서도 꿋꿋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안 봐도 알아. ……해, 해수가 더 예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나는 그게 내 입에서 나온 소리라는 것을,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모습은 숨겼으나 소리는, 올라간 입꼬리는 나 자신도 부정할 수 없었다. 이름이, 그러니까 정유월이었던가. 분명 여러 번 마주한 것 같은데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지금 창밖으로 손을 뻗어 이쪽을 보게 할까 싶기도 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어차피 직접 찾아올 테니까. 그러나 정유월은 오지 않았다. 굳게 닫힌 문을 보며, 내가 첫 번째로 한 생각은 ‘이제야 관둔 것인가.’였고 두 번째로는……. ‘아직 얼굴을 보지 못했는데.’ 하는 아쉬움이었다. 굳이 열지 않아도 되는 창고 문을 연 것은 그 때문이었다. 가까이서 얼굴을 보려고. “어…….” 그런데 어째서일까. 나를 본 순간 울기 시작한 정유월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던 것은. 운 건 자신이면서, 정유월은 자신조차 우는 이유를 찾지 못한 듯 허둥거렸다. 그러다 히끅, 숨넘어가는 소리에 제풀에 놀라 몸을 움찔 떨었다. 그 누구도 나를 보며 울지 않았다. 애써 웃거나, 안타깝게 쳐다보거나. 혹은 소름 끼쳐 하거나. 그도 아니라면 어머니처럼 고장 난 표정을 짓거나. 한데 정유월은 울었다. 분명 황급히 눈물을 감추긴 했으나, 그 헐떡이는 숨은, 추위로 빨개진 뺨을 적시던 눈물은 진짜였다. 그래서 나는 끈질기게 내 방을 찾아오는 정유월을 거부하지 않았다. 저 애가 우는 순간을 다시 한번 보고 싶어서. 그러나 정유월은 울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원하는 것들과 다른 표정들을 보여 주었다. 그림 실력을 부끄러워하면서도, 집중할 땐 입술을 삐쭉 내민 채 몰두한다. 진지한 내용의 책을 읽을 땐 미간을 찌푸리고, 이따금씩 간식으로 나온 과자를 먹을 땐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 않는다. “부, 부엉이를 그렸어요. 저기 벽에 걸린 새요…….” “아픈 건 싫잖아요. 저도, 도련님도 아, 아팠으니까…….” 그러면서 종알거리는 말은 또 어찌나 많은지. 눈길 한 번에 흠칫 떨면서도 연신 짹짹거리는 모습은 하얀 뱁새가 생각날 정도였다. 다른 이였다면 듣기 싫었을 터였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꽤나 흥미가 일어서,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 주었다. 며칠 동안 계속. “말씀드린 그대로예요. 확실하진 않지만 내일부터는 여기 안 올 거예요.” 그러니 정유월은 그 말을 해서는 안 되었다. 정유월이, 여길 떠난다. 나를 떠난다. 손을 뻗은 것은 본능이었다. 나는 정유월의 목을 잡고 싶었다. 자유를 찾아 떠난 어머니와 새처럼 되지 않도록. “도, 도련님.” 그럼에도 끝까지 행하지 않았던 건, 나를 보는 정유월의 눈빛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미 정유월은 겁을 먹은 후였다. 나는 쌩하니 나가 버린 아이를 붙잡지 않았다. 억지로 붙잡는 순간 어떻게 되는지를 알고 있었으니까. 그 대신 방금 전, 정유월의 목을 스쳤던 내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어떡할까. 내가 저지른 짓에 다른 생각을 이어 본 적은 없었다. 그냥 하고 싶어서 했고, 결과 따윈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정유월이, 새장 속에 넣고 싶었던 새가 겁을 먹고 도망쳐 버렸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오게 만들어야 한다. 생각을 마친 나는 곧장 천희영을 찾았다. 권성의 사모님이 되고 싶다면서, 내가 윤선아에게 저지른 짓을 이제야 들은 천희영은 본성을 숨길 생각조차 못 한 채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정유월.” 천희영이 믿기 힘든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천희영을 조용히 만들기 위해, 그리고 나만의 새로 키우고 싶은 정유월을 다시 되돌려 놓기 위해 다시금 목소리를 내었다. “유월이도, 불렀으면 좋겠어요. 그 파티에.” 그러니까 꼭 불러 주세요. 꼭. 반드시. *** 퍼붓는 눈발 사이, 입김이 하늘로 퍼지고 있었다. 오래 서 있었던 것도 아닌데 코끝이 차가웠다. 그날도 계절은 같았으니, 어머니도 나와 같은 추위를 느꼈을 터였다. 그럼에도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그보다 더 큰 열망 때문이리라. 이것만 지나면 그토록 원하던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열망. 이제야 어머니를 조금 이해할 수 있는 상황 속에서, 예상대로 나를 찾아오는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타이밍 좋게 다가오는 거대한 트럭 또한. 왼쪽이면 좋을 것 같은데. 아니, 솔직히 장담할 순 없었다. 신체 하나로 끝날 리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나를 향해 달려오는 정유월을 향해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잘 기억해 주었으면 했다. 네가 떠나고자 한 뒤 내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도련님……!” 물론 네가 나를 끌어안으리라고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지만. 실로 오랜만에 놀라움이라는 감정을 느꼈다고 생각한다. 옅은 갈색 눈동자 속에 내가 담겼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는, 충만한 기쁨이 차오른다. 자신은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나를 위해 자신을 내던진다. 나만을 바라본다. 그 순간, 거대한 깨달음이 나를 스쳤다. 아. 이거였구나. 이래서, 아버지가 어머니를. 그와 동시에 차가 우리 두 사람을 치었다. 권씨 집안의 저주가 기어코 나에게도 들러붙은 날이었다. *** 신은 내 소원을 들어준 듯했다. 죽음까지 예상한 것치곤 왼쪽 다리만 못 쓰게 되었을 뿐, 다른 곳은 멀쩡했다. 정유월 또한 멀쩡했으니. 다리 하나만 잃은 것은 퍽 너그러운 신의 안배라 생각할 수 있었다. 게다가 다리를 핑계로, 혹은 말을 핑계로 정유월과 함께 있을 수 있었으니, 손해 볼 것은 없었다. “어머, 진짜 다리병신 다 됐네. 수술로도 소용이 없다면서?” 그 때문에 그룹 행사라는, 고리타분한 자리에서 어떻게든 나를 비꼬기 위해 내뱉는 말 따위는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다리 하나를 내어 주고, 정유월이라는 새를 내 안에 가둘 수 있다면 얼마든지 던질 수 있었으니. “해수야…….” 그러나 정유월은 아니었다. 자신은 멀쩡하고 권해수만 망가졌다는 사실은 정유월을 더욱 처참히 무너지게 만들었다. 차라리 내가 다쳤어야 했는데. 그럼 도련님께서 다리를 못 쓰게 되는 일도 없었을 텐데. 아프지도 않았을 텐데……. 나 때문에 억지로 끌려오다시피 한 행사 자리에서도, 정유월은 오직 나만 생각했다. 애석하게도 나는 내 다리에 크게 미련 같은 건 없었다. 아프지 않았으니까. 아니, 확실히 살점이 으깨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감각은 들었다. 그러나 나는 정유월을 내 곁에 둘 수 있다면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그 도로에 뛰어들 터였다. 통증 따윈 문제가 되질 않았다. “괜찮아, 유월아.” 그래서 달래 주려고 했다. 아프지 않았으니 망가진 다리 또한 신경 쓰지 말라고. “다리병신, 틀린 말도 아니잖아.” 우리 둘만 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말한 건, 창백하게 질린 유월이 안쓰럽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정유월의 너머에, 그녀를 쳐다보는 남자애들 때문이었다. 그녀 자신은 모르겠지만, 정유월은 시선을 잡아끄는 힘이 있었다. 외모도 외모지만 가해자라는 이름으로 힘겨워하면서도 어떻게든 나를 챙기려는 책임감 때문일까. 위태롭게 꺾인 듯하면서도 떨어지지 않는 모습은 꼭 겨울바람에 흩날리면서도 끈질기게 나무에 붙어 있는 하얀 꽃 같았다. 하찮고도 가엾어서 계속 눈길을 줄 수밖에 없는.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정유월이 사내자식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그때마다 나는 ‘치료’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나는 정유월을 다치게 만드는 대신, 내 다리를 망가뜨렸다. 타인을 해치지 않았으니 이 정도면 ‘정상’을 흉내 내는 데 성공한 것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그건 내 착각이었다. 나는 여전히, 정유월을 보는 사람들의 눈을 전부 날카로운 것으로 찔러 버리고 싶었으니. 그러니 내가 이런 뒤틀린 생각을 가진 데엔 유월의 책임도 있었다. 네가, 감히 나를 두고 ‘친구’ 같은 걸 입에 담지 않았더라면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을 테니까. 정유월은 아픈 게 싫고 다정한 게 좋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다쳤고, 널 나무라는 대신 상냥히 대해 주었다. 모든 사람이 너를 비난해도 나만은 널 예뻐해 주었다. 그러니 넌 내 생각만 해야지. 나만 떠올려야지. 그러기로 약속했잖아. 하지만 그 책임을 묻는 대신 나는 작게 미간을 좁혔다. 이 이상 몰아세우면 울어 버릴지도 모르니. 그리고 정유월의 눈물은 오직 내 것이어야만 했다. “아파, 유월아.” 살짝 인상을 찌푸렸을 뿐인데, 정유월은 순식간에 정신을 차렸다. “아, 아파? 어디가 아파?” “다리 아파도 아프고 머리도 아파. 잠깐 쉬면 괜찮아질 것 같은데…….” 나는 유월의 어깨에 이마를 대며 웅얼거렸다. “유월이가 부축해 줘. 응?” 그 말에 유월이 기다렸다는 듯 내 팔을 붙잡았다. 나는 유월에게 편하게 몸을 맡긴 채 몸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유월이 음침하게 숨어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자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그들은, 정유월은 동시에 깨닫는 것이다. 가해자 정유월. 피해자 권해수. 견고하다 못해 죽어도 깨지지 않을 우리의 관계를. “쟤 또 왔네.” “누군데? 나 사실 아까부터 보고 있었는데, 계속 권해수랑 같이 있더라?” “야, 너 쟤 몰라? 쟤 걔잖아. 그 사고 원인.” “……미친, 진짜? 그 사람이 쟤라고?” 익숙한 반응이 우리를 향한다.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절뚝거리며 발을 내딛는다. 우리가 내딛는 걸음마다 시선이 따라붙는다. 보이지 않는 족쇄가 되어, 정유월의 발목을 옭아맨다. 유월의 뺨이 더욱 창백하게 질려 갔다. 간신히 내쉬는 호흡이 꼭 목이 졸린 사람 같았다. 그 작은 머릿속에서 무슨 광경이 펼쳐지고 있을지 눈앞에 선했다. 내가 그녀에게 선물한 트라우마였으니까. 그러나 난 그런 유월을 달래 주지 않았다. 그녀가 그 모든 말을 들을 수 있도록 부러 천천히 걸었다. 스멀스멀 올라온 죄책감이 정유월의 목을, 호흡을, 정신을 지배하도록. 그래서 정유월이 오직 나만 생각할 수 있도록. 아프지도 않은 다릴 끌고 자리에 앉은 나는, 정유월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여전히 쏟아지는 사람들의 시선 따윈 보이지 않는다는 듯.  나는 이렇게 많은 사람 속에서도 너와 나, 오직 둘만이 고립된 것 같은 느낌을 사랑했다. 가슴 충만히 차오르는 이 만족감이, 소름 끼치게 좋았다. “이렇게 앉아 있으니까 훨씬 편하고 좋다, 그치?” “……응, 그렇네.” 동요를 숨기는 목소리였으나, 나는 모르는 척 미소 지었다. 나로 인해 비참해지면서도, 결국 나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정유월이 사랑스러워서……. 아, 정말이지. “하하.”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힘들었다. ***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어느 날부턴가 발끝의 감각이 돌아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붙어 있기만 할 뿐 뜻대로 되지 않았던 다리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설마 싶었는데. “치료가 되는 것 같습니다!” 고장 난 다리와 맞지 않게 키가 클 때부터 예상된 일이었을까. 그렇다고 해도 이건 생각지 못한 변수였다. 다리가 낫는다는 건 정유월이 더는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사고가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었으나, 나는 정유월이 작은 자유조차 얻지 않길 바랐다. 그래서. “두 번 다치는 건 어렵겠죠?” 무심결에 이렇게 내뱉었다. “……예?” “기적을 더 바라는 건 욕심이잖아요. 나중엔 잘라야 할 수도 있을 텐데. 그건 보기에 예쁘지 않을 것 같아서.” “…….” “역시 그건 어려우려나…….” 무감한 내 중얼거림에 의사는 믿기 힘든 표정을 지었다. 지금도 문밖에는 어떻게든 한 걸음을 떼어 보려 애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토록 원하는 기적을 겪었음에도 전혀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사고를 그리워하는 듯한 내 태도가 퍽 소름 끼쳤으리라. 그럼에도 나는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다시 다쳐야 하나? 영원한 불구가 되면서도 그 장면을 정유월이 보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여러 전제와 가설 속에서 결론은 빠르게 지어졌다. 낫지 않은 척하면 된다. 거짓을 계속하면 진실이 되는 법이었다. 귀찮아서 입을 다문 내가 트라우마로 인해 말을 잃은 불쌍한 아이가 된 것처럼. 때마침 나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권성의 뒤를 이을지, 아니면 계속 미술을 할지. 홈스쿨링을 받으면서 꾸준히 미술을 하긴 했지만, 그건 그냥 천희영의 속을 뒤집기 위해서였다. 딱히 그 재능을 이용할 생각은 없었다. “사모님께서 도련님의 진료 기록을 확인하신 것 같습니다.” “…….” “유월 양에게는 아직 말하지 않은 듯합니다만…… 그래도 어찌 될지 알 수 없으니…….” 불안해진 천희영이 내 비밀을 건드리기 전까지는, 딱히 이것을 재능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는 뜻이었다. 바보 같은 짓이었다. 나는 그 즉시 내 아버지, 권재찬을 찾아갔다. “오랜만이에요, 아버지.” “…….” 평소답지 않은 내 인사에도 아버지는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하기야 아버지는 죽은 어머니와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드물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를 것이다. 어머니를 닮은 내가 두 발로 걷고 있었으니. 그때의 형상과 닮은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이지?” 역시, 내 아버지는 눈치가 빨랐다. 원하는 건 명료했다. 고장 난 내 다리는 언론과 주주들이 헐뜯기 좋은 구실이었다. 나는 다리가 다 나았다는 걸 언젠가 밝히겠노라 말했다. 유일한 흠집을 직접 제거해 주겠다고. 그 대신 딱 하나. “정유월.” “…….” “그 애는 제 거예요.” 내게 같은 피를 물려준 아버지는 이게 무슨 뜻인지 이해한 듯했다. 내가 당신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처신 잘해라.” 그 말 한마디로, 천희영이 힘겹게 모은 내 ‘비밀’은 그렇게 숨겨졌다. 분노한 천희영은 대학을 핑계로 정유월을 내게서 떨어뜨려 놓으려 했지만, 내가 작품을 던져 주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나는, 정유월을 위한 나만의 새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정유월이 내 새장 속에서 영원히 갇히도록. “달라지는 건 없죠. 다리병신 되기 전부터 정유월은 제 거였으니까.” 그리하여 모든 걸 알게 된 정유월이, 나와 눈을 분명 마주쳤음에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정유월이……. “아무 일도 없었어, 해수야…….” 모든 것을 외면한 채 나만 바라보도록. 그러므로 나는 알고도 먹은, 나에게 전혀 통하지 않은 약을 떠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하늘이 유독 맑은 날이었다. 어딘가 익숙하다는 생각이 든 것도 잠시, 아. 입김과 함께 입 밖으로 나도 모르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런 느낌이었군요, 어머니. 당신의 웃음은. 최초의 의문이 사라진 지금. 어머니와 비슷한 나이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를 이해한 나는 다시 시선을 내렸다. 신호등 끝, 무언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유월이 나를 돌아본다. 두 눈이 어느새 눈물로 젖어 있었다. 잘했어, 유월아. 마지막에서라도 날 돌아봤으니 박제는 하지 않을게. 그러니 잘 봐주기를. 나는 살아 있되 죽어 있는, 너의 영원한 악몽이 될 테니까. 깜박. 신호등이 바뀐다. 나는 비틀거리는 척하며 한 걸음 내디뎠다. 정유월이, 내 아이를 임신한 정유월이 나를 향해 다가온다. 저 멀리 차가 돌진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나는 웃었다. 비로소 하나가 될 우리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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