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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22화


22화 수도원 창문으로 성당을 바라보던 수아가 고개를 돌렸다. 정리된 방은 누군가 당장 들어온다고 할 정도로 깨끗했다. 수녀복은 소중한 듯 개어서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더는 입을 수가 없으니 필요도 없었다. 환속 절차는 빨랐다. 종신서원을 한 수녀가 아니었기에 소속 수도회에서 바로 답변이 왔다. 청장 수녀님과 면담이 잡혀있었지만, 수아가 해외 체류 중이었기에 빈첸시오 신부가 대신했다는 증명을 보냈다. 지금쯤이면 아네스 수녀도 그녀가 환속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빈첸시오 신부와 이야기를 한 날, 수아는 저녁 늦게 아네스 수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차마 통화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네스 수녀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몰랐기에. 원망 섞인 말이라도 들었다가는 그대로 무너질 것만 같아서 무서웠다. [ 수녀님. 직접 말씀 못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정리되면 바로 전화 드릴 테니 그때까지 기다려주세요. 부디 제 행동을 용서해주세요. ] 혹시나 아네스 수녀한테서 전화가 올까 봐 휴대폰도 꺼놓았다. 죄를 지은 것처럼 마음이 무거웠다. 르로이에게 털어놓은 뒤로 삼 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이미 퇴회가 결정된 만큼 성당을 떠나야 했고. 정작 테즈만은 오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르로이마저 오질 않자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자신은 수녀까지 포기했는데 그는 그저 장난일 뿐이었나. 이 모든 건 신의 시험이었고 그 벌을 받는 건가 하고. 테즈만이 오질 않아도 그건 제가 선택한 것이기에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이미 환속을 한 수녀가 다시 수도원에 들어갈 수도 없었고. 당장 갈 곳은 없지만 우선 수도원을 나가야 한다. 가만히 있어봤자 상념에 빠질 테니까. 가방을 챙겼다. 처음에 수도원에 왔을 때보다 절반이 줄어든 짐이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방을 나가기 전에 거울 앞에 섰다. 매일 머리카락을 가렸던 새하얀 베일이 없어지고 검은색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이상했다. 베일만 벗었을 뿐인데 마치 발가벗겨진 듯한 기분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모자라도 사놓는 건데.” 나가자마자 바로 모자를 사야겠다며, 방을 나섰다. 1층으로 내려가자 빈첸시오 신부와 요한 신부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한 신부는 수아가 환속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자 냉랭해졌다. 아무래도 신을 배신한 배신자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수아를 바라보는 요한 신부 대신 빈첸시오 신부가 수아를 보고는 기도하듯 손을 모았다. “신의 은총이 있기를.” 수아가 조용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수도원의 문을 열었다. 이제는 수도자가 아닌 일반인으로서 내딛는 발걸음이 마치 첫걸음마를 하는 아이 같았다. “하...” 착잡한 마음과는 다르게 날씨는 따스했다. 꽃내음을 가득 품은 봄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헝클고 지나갔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눈을 가리자 수아가 손을 올려서는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걷어냈다. 그리고 그때였다. “내가 너무 늦게 왔나 봐.” 기다렸던 목소리가 수아의 귓가에 닿자마자 그녀가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 테즈만?” “우리 수녀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느라.” 흔들리는 동공 속에 테즈만이 담겼다. 옷차림에 신경을 쓴 모양인지 늘 풀어있던 타이도 깔끔하게 한 모습이었다. 가만히 그를 응시하던 수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안 오는 줄 알았어요.” “그럴 리가.” “날... 날 이렇게 만들어놓고.” 떨리는 목소리가 차츰 젖어 들기 시작했다. 무서웠다. 수녀까지 포기하면서 그가 내민 손을 잡았는데, 결국 그에게는 단지 스쳐 가는 봄바람이었을까 봐. “정말로 안 오면 어쩌나, 내가 얼마나….” 수녀의 신분을 내려놓자 더는 거리낌이 없어진 수아의 입에서 속내가 터져 나왔다. “걱정하고 마음 졸이면서...!” 성큼 그녀에게 다가선 테즈만이 손을 뻗었다. 단번에 제 가슴으로 수아를 끌어안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이토록 사랑스러운데 내가 왜.” 사랑스럽다고? “나도 내 입에서 사랑스럽다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마땅한 표현이 없어서. 이게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 같아.” 수아의 이마 위로 그가 가볍게 입을 맞췄다. “수녀님이 날 구원한 만큼, 난 내 모든 것을 수녀님께 드릴 생각이에요.” 처음으로 그가 수아의 앞에서 환하게 웃어 보였다. “테즈만이라는 뱀의 주인이 된 걸, 축하해요.” 뱀의 주인. 그토록 께름칙했던 뱀이라는 존재가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마치 다른 애완동물들처럼 느껴졌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특별했다. “가요.” 그녀의 허리에 감싼 손에 힘을 주며 테즈만이 말을 이었다. “우리의 저택으로.” 차 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수아의 얼굴은 긴장감으로 물들었다. 수아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테즈만은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혹시…. 집에 가족들은 없어요? 제가 가도 괜찮은 건지 궁금해서요.” “저택을 관리하는 사람 말고는 없어요. 나 혼자 사는 저택이니까.” “아... 그럼 제가 사용할 방도 있는 거예요?” 수아의 순진한 말에 그가 작게 실소를 터트렸다. “방은 많은데, 수녀님이 쓸 방은 없어요.” “... 네?” “내 방에서 같이 생활할 거니까.” 수아가 멈칫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같이...?” “네. 같이요.” 잡은 그녀의 손을 자신의 입술 근처로 당겨오며 그가 말을 이었다. “각오하고 온 거 아닌가.” 수아의 손등 위로 그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내 옆에 평생 둘 거예요. 수녀님.” 평생이라니. 거기까지는 생각지도 못한 수아였다. “잠, 잠깐만…. 설마 나랑 결혼이라도 하자는 거에요?” “결혼? 뭐든 좋아. 수녀님이 내 옆에 있을 수만 있다면.” 생각보다 위험했다. 구원이라는 것이 평생 그의 옆에 있는 것이라니. “테즈만, 전... 그런 생각으로...” “수녀님.” 나직하게 내려앉는 그의 목소리가 수아의 귓가를 울렸다. “한국에 돌아가봤자 갈 곳도 없잖아요.” 이미 수아의 뒷조사는 끝낸 상황이었다. 그녀가 고아라는 것도, 수녀들이 운영하는 보육원에서 자라서 수녀를 꿈꿨다는 사실도 전부. “아...” 맞는 사실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수아를 향해 그가 속삭였다. “나와 함께 하면 되는 거예요. 아무 걱정 없이.” 빤히 보이는 유혹임에도 수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욱 알고 싶었기에 같이 지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같이 지내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그때 다시 선택을 할 생각이었다. 그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가서 수녀가 아닌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지, 아니면 이곳에 남든지. 생각에 잠긴 수아를 응시하는 테즈만의 시선이 집요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많이 하는 건지. 어차피 저택에 들어간 순간, 수아의 머릿속은 오직 저만 생각하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차창 너머로 저택이 보이자 그의 입가가 엷게 휘었다. “다 왔네요.” “아...” 생각하는 것을 잠시 멈춘 수아가 고개를 들고 차창 너머를 바라봤을 때, 차마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여기... 무슨 성인가요...?” 흡사 TV에서만 보던 유럽의 성이라던가, 대저택의 모습과 비슷했다. 실제로 사람이 살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여기가 설마, 테즈만 집이에요?” “맞아.” “여기가요?!”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벙찐 수아의 손을 잡고는 그가 차 문을 열었다. “이리 와요.” 그가 잡은 수아의 손을 이끌었다. 주춤하며 차에서 내린 수아가 다시금 제 앞에서 엄청난 위엄을 자랑하는 대저택을 천천히 훑었다. “혹시... 테즈만, 엄청난 부자라거나... 뭐 신분이 무척 높다거나....” “우리 수녀님께서 수도원을 나오시니 세속적이 됐네.” “아니에요!” 발끈하는 수아를 보며 그가 작게 실소했다. “수녀님 정도는 먹여 살릴 능력이 있으니 걱정 안 해도 좋아요.” 그 말이 꼭 프러포즈 같아서 괜히 마음이 울렁댔다. 언제부터 제 마음이 이렇게까지나 동요하게 된 것일까. 테즈만을 볼 때마다 요동치는 심장은 이미 붙잡기에는 늦어 버렸다. “들어가요.” 수아의 손을 잡은 채로 그가 저택으로 향했다. 원래라면 정원에 사냥개들이 보초를 서듯 어슬렁거렸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혹여 커다란 사냥개를 보고 수아가 놀랄까 봐 사냥개들은 물론 저택을 지키는 카포들과 솔저들까지 안 보이는 곳으로 이동시켰다. 연신 신기한 듯 주위를 살피는 그녀가 기꺼웠다. 칵트에게 다시금 정원을 손질하고 저택을 최대한 그녀 마음에 들게 꾸미라고 시켰다. 앞으로 수아가 있을 곳이니까. 부디 이곳이 마음에 들기를. 그가 수아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저택의 커다란 대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고풍스러운 인테리어가 수아의 눈에 담겼다. 마치 저택 전체가 하나의 예술품 같았다. 입도 다물지 못한 채, 감탄을 내뱉는 수아를 향해 누군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중후한 목소리. 은은하게 미소를 띤 얼굴로 칵트가 서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저택에 오시게 된 걸 환영합니다. 저는 칵트라고 합니다. 테즈만 님의 비서이자 이 저택의 관리인이죠.” 수아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혹, 도울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 주세요. 요리는 못해도 청소나 빨래는 자신 있어요.” 청소나 빨래라니. 가당치도 않은 말이었다. 칵트가 대답 대신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가지.” 테즈만이 발걸음을 옮겼다. 덩달아 움직이게 된 수아가 고개를 돌려서는 칵트에게 다시 한번 인사를 했다. “테, 테즈만.” “저택 구경은 천천히 하도록 해요. 지금은 내가 못 참아서.” 뭘 못 참는다는 건지. 의아한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는 수아의 손을 가져다가 제 앞섶에 올렸다. 새하얀 도화지에 붉은 물감을 뚝, 떨어트린 듯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수녀님과 떨어져 있는 동안부터 계속 이 상태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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