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20화
20화
잔뜩 쌓아둔 책을 옆으로 치우자 낡은 의자 하나가 드러났다. 빈첸시오 신부가 민망한 듯 웃으며 말했다.
“앉으세요, 수-아.”
“아, 네.”
의자에 앉는 수아를 지켜보는 빈첸시오 신부의 표정은 평온했다.
“마음의 준비가 끝난 겁니까?”
“그게…. 그러니까.”
떨리는 손에 힘을 줘 주먹을 쥐었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뗀 수아가 빈첸시오 신부를 응시했다. 수아가 평생 제 입에서 나오지 않을 단어라고 생각했던 것을 뱉어냈다.
“퇴회, 하고 싶습니다.”
퇴회라는 말에 놀랄 만도 한데 빈첸시오 신부의 얼굴은 동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 말을 할 줄 알았다는 듯 태연하게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놀라지 않으시네요….”
빈첸시오 신부가 온화하게 웃었다.
“수도원 생활만 50년이 넘었습니다. 떠나가는 이도 그만큼 많이 보았습니다.”
“절 책망하지 않으세요...?”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빈첸시오 신부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다들 이유가 있었고 그만큼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무척 괴로워하며 말입니다. 누구보다 힘들게 결정을 했을 사람한테 책망이라니요.”
수도자는 외로운 싸움이었다. 지난 50년 동안 빈첸시오 옆에 있던 많은 수도자가 다들 제각각의 이유로 환속을 했다. 누군가는 제 앞에서 울기도 했고, 누군가는 화를 내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들을 말려도 보고 마음을 돌려보려고 노력도 했었다. 하지만 끝은 똑같았다. 이미 마음의 정리를 한 번 한 수도자들은 결국 다시 나가는 길을 선택했다.
50년 동안 수도자로 있으면서 빈첸시오 신부가 느낀 것은 가는 사람은 붙잡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새 출발을 지지해주고 수도자가 아닌 평신도로 돌아가서도 하느님을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수-아는 아직 종신서원을 하지 않았으니 따로 교황청 퇴회 단계를 밟을 필요가 없습니다.”
“... 네.”
“소속 수도회에 수-아의 의견만 전달하면 됩니다. 아네스 수녀에게 전달하면 되겠군요.”
아네스 수녀의 이름에 수아의 가슴이 무거워졌다.
빈첸시오 신부에게 말하기 전에 아네스 수녀에게 먼저 말하려고 했지만 차마 그러질 못했다. 무서웠다. 제게 실망할 아네스 수녀가.
밥 먹듯 말했었다. 아네스 수녀 같은 수녀님이 되고 싶다고. 그런데 아네스 수녀가 쌈짓돈까지 주며 보낸 이탈리아에서 고작 반년 만에 남자 때문에 환속하겠다니.
아네스 수녀가 그녀에게 손가락질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실망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사실을 털어놓았을 때, 아네스 수녀가 그녀를 이탈리아에 보낸 것을 후회한다고 책망할까 봐 그게 더 무서웠다.
어두워진 수아의 얼굴을 보며 빈첸시오 신부가 말을 꺼냈다.
“수-아.”
가라앉아있던 수아의 시선이 빈첸시오 신부에게 향했다.
“남들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실망할 거라는 이유로 자신의 감정을 속이는 것이 신께서 보기에는 더 나쁘게 보실 수도 있지요.”
“아...”
“그러니 다른 건 생각하지 마세요. 오직 수-아의 결정이 중요합니다.”
맞는 말이었다. 결정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었다. 아네스 수녀가 실망할 수도 있다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었지만 그보다 그를 구원해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정말로 퇴회 할겁니까?”
이제 와서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마음은 이미 정해졌으니까.
“네.”
빈첸시오 신부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중으로 수-아의 소속 수도회에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답변이 오는 즉시 수도원을 나가셔도 좋습니다.”
“... 네.”
씁쓸해진 눈빛으로 답하는 수아를 향해 빈첸시오 신부가 말했다.
“그 길이 진정으로 수-아가 원하는, 행복을 위한 길이라면 응원하겠습니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수-아.”
“...감사합니다.”
빈첸시오 신부에게 인사를 한 후, 자신의 방으로 올라온 수아는 허무함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청원기와 수련기 그리고 유기 서원기. 총 8년이란 시간 동안 수녀가 되기 위해 준비했다. 실질적으로 준비한 기간이 8년이었지, 어릴 적부터 수녀를 꿈꿔온 시간을 모두 합치면 수아가 살아왔던 시간의 절반 이상이었다.
그 모든 시간을 퇴회하겠다는 말 한마디로 끝내버렸다. 너무나도 간단하게.
허무함이 발끝부터 천천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가득 찬 허무함에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슬프면서도 후련하고, 허무하면서도 안타까운 감정. 온갖 감정이 뒤섞여서 왜 우는지조차 몰랐다. 대체 뭘 위해서 수녀가 되려고 했을까. 단지 아네스 수녀 때문이었을까. 이렇게 쉽게 끝날 거면 시작하지 않는 게 좋았을까.
결국에는 화살을 테즈만으로 돌렸다. 왜 하필 그의 눈에 띈 것인지, 그가 유혹하지만 않았더라면 제 잔잔한 일상에 변화는 없었을 텐데.
원망에 살이 붙었다. 그럴수록 자괴감이 들었다. 모든 선택은 자신이 한 것이었다. 그의 유혹에 넘어간 것도, 수녀를 그만두고 그의 손을 잡으려는 것도, 모두.
“그러면서 무슨 핑계를...”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어차피 택한 선택이라면 더는 후회가 없어야 했다.
그날 저녁부터 수아는 부지런히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짐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었다.
“... 다른 옷 좀 가져올걸.”
다른 옷들은 필요 없기에 수녀복만 가득 챙겨왔다. 퇴회하며 수녀복은 반납해야 했기에 수도원을 나갈 때, 마땅하게 입을 옷이 없었다.
“... 블라우스 정도는 입고 가도 괜찮겠지.”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입고 다니던 수녀복을 더는 입지 못하는 것도, 수녀로서 지켜야 할 것들을 더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도 수아에게는 낯설 뿐이었다. 애꿎은 수녀복을 만지작거리던 수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퇴회하겠다고 했으니 곧 소속 수도회에서 연락이 올 것이다. 종신서원 수녀도 아니었기에 행정 처리도 크게 없을 것이고. 계약직 같은 유기 서원 수녀기에 바로 처리될 수도 있다.
처리되는 순간 더는 수녀를 꿈꿀 수 없었다. 그 전에 수녀복을 입고 기도를 올리고 싶었다. 어쩌면 그녀가 수도자로서 마지막으로 올리는 기도일 수도 있으니까.
수아가 조용히 거울 앞에 섰다. 머리카락 한 가닥도 보이지 않게 가린 하얀 베일, 정숙한 수녀복을 입은 채 서 있는 수아의 모습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오직 그녀의 마음 빼고는. 애꿎게 단정한 수녀복을 몇 번이나 매만지고는 성당으로 향했다.
손에 든 묵주가 오늘따라 제 것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애써 묵주를 꾹 쥔 채, 자리에 앉은 수아가 두 손을 모았다.
지난번에는 용서해달라고 빌었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그동안 자신을 보살펴준 빈첸시오 신부와 요한 신부의 건강을 빌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제 퇴회 소식을 들었을 아네스 수녀가 부디 크게 실망하지 않기를 빌었다.
오로지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였다. 자신이 아닌.
그 어느 때보다 더 간절한 기도를 끝내고 눈을 떴을 때, 수아가 앉은 의자 끝에 르로이가 앉아 있었다. 인제 보니 르로이는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가만히 앉아서 중앙 제대 위 십자가를 감정 없는 눈동자로 응시할 뿐이었다.
수아는 지난번, 르로이가 털어놓았던 과거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제야 르로이는 자신의 부모를 그렇게 만든 신을 좋아할 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르로이가 성당을 오는 이유는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테즈만이 시켰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수아는 르로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르로이.”
그렇다면 계속해서 성당을 찾게 하는 것도 못 할 짓이었다. 르로이는 성당을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
“이제 성당에 올 필요 없어요.”
의아심이 섞인 르로이의 시선이 수아에게 향했다. 수아가 엷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
“부탁?”
“테즈만 씨한테….”
뭐라고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도 시간 낭비였다. 가장 솔직하게, 지금 자신이 생각하는 감정을 전했다.
“제가 보고 싶어 한다고 전해줄 수 있나요?”
갑작스러운 말에 놀라기라도 한 듯 르로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수아의 말을 곱씹던 르로이의 눈동자가 엷게 진동했다. 이제야 그녀가 내뱉은 말의 뜻을 눈치챈 듯싶었다.
“포기하셔야 할 게 많으실 겁니다.”
“이미 포기는 많이 한 것 같은데. 이것보다 더요?”
“... 아마도.”
테즈만의 여자라는 사실 하나로 위험해질 일이 많을뿐더러 그것 때문이라도 그는 보이지 않는, 가장 안전한 새장에 그녀를 가둬놓을 것이 분명했다. 성당에 가는 것도 허락을 구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을 수아가 이해할지, 그녀를 바라보는 르로이의 얼굴에 걱정이 스쳤다.
“수녀도 포기했는데. 다른 건 일도 아닐 것 같은데요.”
씁쓸하게 말하는 수아를 향해 르로이가 진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후회. 안 한다고는 장담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걱정하지 말라는 듯 수아가 웃어 보였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