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19화
19화
그 후로 테즈만은 오지 않았다. 가끔 르로이만 성당에 들릴 뿐이었다.
한국에 돌아갈 생각도 못 하도록 혼을 빼놓고는 정작 당사자는 오지 않는다니. 해도 너무했다.
“하.”
그녀의 입안에서 탁한 숨이 터져 나왔다.
“고민이 많으신가 봅니다.”
어느새 수아가 앉은 의자 끝에 르로이가 앉아 있었다. 평소라면 놀랐겠지만 지금 수아는 그럴 여력도 없었다.
“테즈만 씨는... 잘 지내시나요?”
테즈만의 안부를 묻는 그녀를 향해 르로이가 고개를 돌렸다.
“바쁘신 것 같습니다.”
“아...”
늘어지는 목소리에서 실망감이 묻어났다.
“어쩌면 기다리시는 걸 수도 있고요.”
가라앉았던 수아의 시선이 다시금 르로이에게 향했다.
“누군가의 답을 말이죠.”
누군가의 답. 그게 뭔지 수아는 알고 있었다. 마지막, 성당을 나서면서도 그는 자신을 선택해달라고 말했었다. 어쩌면 수아에게 시간을 주는 것일 수도 있었다. 선택을 위한.
수아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수녀님.”
가만히 있던 르로이가 입을 열었다.
“제 아버지와 어머니는 천주교 신자셨습니다. 제가 신부님이 되길 바랐을 정도로 아주 열렬한 신자셨죠.”
갑작스러운 르로이의 고백에 수아는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 열렬함이 제게는 독이 되었습니다. 전 억압당하고 강요받는 삶을 살아야 했으니까요.”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완전무결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며, 부모란 작자들은 르로이를 강제로 굶기고 가둬두기도 했다. 고작 여덟 살이 된 르로이를 고행이랍시고 혹독한 매질을 견디게 하거나 물고문도 했다. 예수도 이 모든 것을 당했다면서.
“나중에는 제 몸에 사탄이 들렸다는 신부의 말에 망설임 없이 칼을 들이밀더군요.”
신부님이라는 사람이 그랬다고?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수아가 반문하려 하자 르로이가 희미하게 웃었다.
“너무 열렬해서 이상하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성당인 척하는 사이비였습니다.”
세뇌당한 부모님은 무슨 짓을 해도 돌아오지 않았다. 반복해서 그를 죽이려고 할 뿐.
“그래서 죽였습니다. 제가 열다섯이 되는 생일날에.”
르로이를 바라보는 수아의 눈동자가 엷게 떨렸다.
“부모님을...?”
“네. 제가 살기 위해서는 죽여야 했거든요.”
그날도 제 목에 칼을 들이밀었다. 살려면 제게 칼을 들이민 부모를 죽여야 했다.
“부모를 죽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모든 사람들이 제게 등을 돌렸습니다. 손가락질을 해대며 제가 받은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정말로 사탄이 되어버렸다. 모든 것을 빼앗긴 채 길거리를 나도는 르로이에게 거지들조차 손가락질을 해댔다.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평소처럼 이유 없이 맞고 있었습니다.”
항상 똑같았다. 누군가에 분풀이 대상으로 맞는 것은. 하도 맞아서 늘어난 맷집 때문에 아프지는 않았지만. 빨리 지치기만을 바라며 맞고 있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갑자기 절 강간하려고 하더군요.”
자세히 보니 예쁘장하게 생겼다면서. 더러운 손으로 르로이의 몸을 주물럭댔다. 죽여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제 위에서 몸을 흔드는 남자의 목을 조르려던 순간,
“그때, 테즈만 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저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하지만 키는 르로이보다 훨씬 컸다. 단번에 저보다 두 배는 돼 보이는 남자의 머리를 바닥에 짓이기고는 태연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괜찮냐며.
“구원이었습니다. 제게는.”
제게 처음 내민 손. 그 손을 맞잡으며 르로이는 생각했다. 평생, 이 손을 놓지 말아야겠다고.
“누군가의 구원이 되는 건 아주 짧은 찰나죠.”
덤덤하게 내뱉는 르로이의 시선이 수아에게 향했다.
“비록 구원의 행위를 한 자는 단순한 행위일지라도.”
연민과 동정, 놀람과 당혹. 온갖 감정들이 뒤섞인 그녀의 눈동자가 혼란스럽다는 듯 흔들렸다.
“누군가에게는 그 구원으로 그 사람이 세상의 전부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올곧은 눈동자로 차분하게 말하던 르로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즈만 님은 외로우신 분입니다. 많은 이들이 그분의 손에 구원받고 기대고 있지만 정작 테즈만 님의 손을 잡아줄, 기댈 안식처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기댈 안식처가 없다니. 모든 것을 다 가져 보이는 그가 정작 마음 놓고 기댈 사람 하나 없다는 것이 수아의 마음을 동요하게 했다.
“오늘은 제가 말이 많았습니다. 그럼, 잘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멈칫하는 수아를 두고 혼자 성당 밖을 나선 르로이가 짧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오지랖이었던 건지. 제 과거까지 술술 털어놓았다. 평소의 르로이라면 절대로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동양인 수녀 하나가 대체 뭐라고.
단지 수아의 얼굴에 드리워진 시름을 조금 걷어내 주고 싶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아니 없어야만 했다. 제 주인 테즈만을 위해서도.
찰나의 봄날이 너무나도 따스해서. 흐트러지는 꽃잎에 가슴이 그냥 간질거린 것뿐이었다. 봄이 끝나면 당연하게 없어질.
수아만 시름에 잠긴 것은 아니었다. 성당을 나와 태연한 척 발을 옮기는 르로이의 두 눈에도 가득했다.
르로이가 떠나고 혼자 성당에 남은 수아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처음 수녀가 되겠다고 생각한 게 언제였더라. 열 살을 갓 넘긴 그때쯤일 것이다. 아플 때도, 기쁠 때도 언제나 그녀 옆에 있어 주던 아네스 수녀를 보며 언젠가 자신도 커서 그녀 같은 수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동경의 대상과 같이 나란히 옆에 서고 싶었다. 버려진 그녀를 거둬준 곳은 보육원이었고, 그런 보육원에서 신을 섬기며 아네스 수녀와 함께 살아간다면 그만큼 좋은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매 순간 성실하게 임했다. 청원기와 수련기 그리고 유기 서원기. 힘들 때도, 지칠 때도, 그 힘든 순명까지 다 받아들였다.
그렇게 쌓아온 모든 것들을, 제가 그토록 동경하던 아네스 수녀의 옆에 있을 수 있는 기회까지 버리며, 그를 구원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애초에 이렇게나 빨리 누군가에게 마음을 내준다는 것이 가당키나 할까. 찰나의 동요가 아닐까.
“수녀님.”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그의 목소리가 끈적하게 머릿속에서 울렸다. 결국 어떤 선택을 하든 그는 수아를 놔주지 않을 것이다.
그의 손을 잡기 위해서는 자신이 타락해야 했다. 그가 손바닥에 올려둔 선악과를 먹을지 말지는 오로지 그녀의 몫이었고.
어쩌면 선택은 끝난 것일 수도 있었다. 한국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새하얗게 잊어버렸을 때,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부정하고 또 부정했을 뿐.
자신을 구원해달라던 그의 목소리가 다시금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더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원하는 것이 구원이라면 그 구원을 위해 수아는 선악과를 먹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염치없게 모인 두 손이 중앙 제대 위 십자가로 향했다. 신을 생각하는 마음은 선악과를 먹기 전이나 후나 똑같았다.
“감히 수녀가 될 사람으로서 그를 마음에 품은 것.”
살포시 내리깐 눈꺼풀이 잔잔하게 떨렸다.
“결국에는 그의 손을 잡아버린 것도.”
간절하고도 간절한 목소리가 성당 안을 울렸다. 어쩌면 이 기도가 성당에서 하는 마지막 기도일 수도 있었다.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죄를 용서해주소서.”
감히 그런 선택을 하고 용서를 입에 올리는 자신을 보며 신께서 많이 노여워하지 말아 주시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따라 성호경을 긋는 수아의 손동작이 느렸다. 가만히 고개를 들고는 중앙 제대 위 십자가를 응시했다. 한참을 바라보던 수아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동안 제가 앉아 기도하던 자리를 손으로 가볍게 쓸고는 돌아섰다.
빈첸시오 신부에게 제 선택을 말해야 할 시간이었다.
성당을 나온 수아가 향한 곳은 수도원에 딸린 작은 서재였다. 빈첸시오 신부가 집무를 보는 곳이기도 했다. 낡은 문 앞에서 망설이던 수아가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떠난다는 말은 이미 했었다. 이유까지 곁들여서.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수도원을 떠나서 한국으로 가는 게 아닌, 수녀를 그만둔다고 말해야 했다.
“하...”
수녀를 그만두는 이유를 빈첸시오 신부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고민이었다. 테즈만, 그러니까 남자 때문에 수녀를 그만둔다고 하면 빈첸시오 신부는 무슨 표정을 지을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수아를 끔찍하게 여길 수도, 더럽게 볼 수도 있었다. 어찌 됐든 신께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한 사람이었으니까.
망설이던 수아가 어렵게 손을 들어 올렸다. 고민을 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질질 끄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은 없으니.
똑똑. 낡은 문을 노크하며 수아가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빈첸시오 신부님.”
천천히 열리는 문틈 사이로 빈첸시오 신부의 얼굴이 보였다.
“수-아.”
빈첸시오 신부는 수아의 얼굴을 보자 그녀가 무슨 말을 하러 온 것임을 알아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