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17화
17화
새벽녘부터 테즈만을 마주한 수아의 마음은 뒤숭숭했다. 아이들도 떠나가는 탓에 가뜩이나 어지러운 마음을 잔뜩 헤집은 그가 밉기도 했다.
“얌전히 타락할 준비를 해요.”
머릿속에서 자꾸만 그의 목소리가 왕왕 댔다.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노력할수록 오히려 더 빠져드는 것 같았다. 이미 늪지대에 들어선 이상 발버둥 치는 것보다야 가만히 가라앉기를 바라는 게 덜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수녀님, 수녀님!”
줄리아의 목소리에 수아가 심연으로 가라앉던 정신을 끌어 올렸다. 방금 전까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리 없는 줄리아는 활짝 웃으며 수아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우리 성당에 일주일 더 있는데요! 나 수녀님이랑 더 있을 수 있어요!”
일주일이나 더 있는다고? 아이들과 함께 더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좋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 한국에 가야 한다는 마음은 그대로였으니까.
“...왜, 왜?”
“보육원 고치는 게 오래 걸린대요! 응? 수녀님, 나는 수녀님이랑 더 있어서 기쁜데! 수녀님은 안 기뻐요?”
“나도 기뻐. 우리 줄리아랑 함께 있어서.”
“그렇죠?!”
다시금 자신을 꼭 끌어안는 줄리아의 등을 토닥이는 수아의 눈빛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빈첸시오 신부와 약속을 했다. 보육원 아이들이 돌아가기 전까지 같이 있겠다고. 그렇기에 그녀가 이곳에 남아있어야 할 시간도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줄리아! 요한 신부님이 과자 나눠 주신대!”
“정말?! 수녀님, 저 과자 먹고 올게요!”
꼼질 거리며 품에서 빠져나온 줄리아가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수-아.”
때마침 저를 부르는 빈첸시오 신부를 보며 수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신부님, 방금 줄리아 말로는….”
“네. 저도 오늘 아침에 소식을 들었습니다. 원장님 말로는 후원자님이 이참에 보육원을 다 고치는 게 어떠냐고 제안하셔서 받아드렸다고 합니다.”
“후원자요...? 후원자라면,”
“네. 우리 성당에도 기부금을 내주신 테즈만 씨입니다.”
테즈만. 그의 이름에 수아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새벽녘에 제게 말한 것이 이런 뜻이었나. 어떻게든 자신을 묶어두려는 것임을 알면서도 수아는 차마 빈첸시오 신부에게 바로 떠나겠다고 말하지 못했다.
“수-아. 굳이 아이들이 돌아갈 때까지 있지 않아도...”
“괜찮아요. 저도 아이들이 좋아서 있는 건데요.”
자신도 보육원에 있었기에, 누구보다 사람의 손이 그리웠던 것을 알기에 줄리아는 물론 보육원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핑계고 그와 조금 더 있을 명분을 만드는 것일 수도 있었지만.
“수-아. 정말 괜찮겠습니까?”
다시 묻는 빈첸시오 신부를 향해 수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녀님! 수녀님 과자도 받아왔어요!”
수아를 향해 과자를 흔들며 뛰어오는 줄리아를 향해 그녀가 손을 흔들었다. 빈첸시오 신부가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깊고 주름진 눈가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가 안타까움에 물들었다. 빈첸시오 신부가 조용히 두 손을 모았다. 기도하듯 모은 두 손 위로 중얼거리는 듯한 빈첸시오 신부의 말이 들렸다.
“부디 신의 은총이 있기를.”
그 후로 테즈만은 매일 출석이라도 하듯 성당에 방문했다. 산타클로스처럼 매일 선물을 가져오는 테즈만은 아이들에게 정말 산타가 된 듯했다.
“오늘도 잘생긴 아저씨 오셨으면 좋겠다!”
“맞아, 맞아! 처음엔 엄청 무서웠는데 내가 케이크 먹고 싶다니까 사다 주시고 참 좋으신 분 같아!”
“수녀님, 수녀님도 그렇게 생각하죠?!”
아이들이 조잘대는 말을 듣던 수아의 얼굴이 당혹스럽다는 듯 물들었다.
“아... 응.”
아이들에게만큼은 테즈만은 좋은 사람이었지만 수아에겐 아니었다. 매일 같이 유혹의 손길을 내미는 그가 두려울 뿐이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그가 아니라 찰나의 유혹에 넘어가 그의 손을 잡게 될 자신이 두려웠다.
“그런데 오늘은 왜 안 오시지?! 오늘 신부님들이랑 꽃 보러 가기로 했는데!”
빈첸시오 신부와 요한 신부가 아이들을 데리고 근처 꽃 농장으로 구경하러 간다고 했다. 수아는 점심 식사 준비로 성당에 남는다고 했고.
테즈만은 항상 아침 일찍 와서 점심쯤 돌아갔기에 그때쯤이면 혼자 성당에 남아도 그와 마주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왜, 오늘따라 테즈만은 성당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건지. 이러다가 다들 꽃 농장에 간 사이, 성당에 수아 혼자 남아있을 때 그가 오게 된다면.
“... 설마.”
하지만 설마가 현실이 되는 건 불과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혼자 성당에 남은 수아는 시간을 확인했다. 아이들이 다시 돌아오기까지 기도를 드리고 점심을 준비해도 충분히 남는 시간이었다.
아이들이 성당에서 자는 탓에 매일 아침 일찍, 저녁 늦게 하던 기도도 하지 못한 지가 꽤 되었다. 아이들이 자리를 비운 지금, 수아는 느긋하게 앉아서 마음껏 기도할 생각이었다. 항상 앉던 자리에 앉아 그녀가 두 손을 모으던 때였다.
“빌려면 나한테 빌어요.”
모은 두 손 위로 떨어졌던 고개가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그 신은 수녀님께 천국을 보여주지 않잖아.”
느긋한 걸음으로 그가 천천히 수아를 향해 다가왔다. 이윽고 그녀의 옆에 선 테즈만이 말을 이었다.
“난 가능한데.”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켜졌다. 성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그와 수아뿐이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소서.
간절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포갠 두 손에 힘을 주었다. 떨어지면 안 된다는 듯, 꽉 맞댄 수아의 손을 그가 잡아 이끌었다.
“그 작은 손으로 날 위해 기도해줘요.”
거부하지도 못할 만큼 달콤한 말로 속삭이는 그는 정말로 에덴의 뱀이었다.
“신이 아니라 날 위해.”
천천히 벌어진 손 틈 사이로 그의 손이 파고들었다. 슬그머니 올라온 손가락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맞물렸다. 완벽하게 그와 손깍지를 하게 된 수아의 시선이 흔들렸다.
“... 테즈만.”
“왜, 수녀님.”
“이러지 말아요.”
그가 나직하게 웃었다.
“뭘 한 것도 없는데 이러지 말라면.”
비스듬하게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이 무척이나 여유로웠다.
“내가 꼭 수녀님한테 몹쓸 짓이라도 한 것 같잖아.”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수아에게는 모두 시험이었다. 대놓고 유혹을 작정한 남자를 어떻게 이겨내야 할지, 아니 애초에 이겨낼 생각은 있는 건지 의심이 됐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나 그에게 휘둘릴 수 있을까. 온갖 핑계를 대고 합리화를 해가며 그의 행동에 타당성을 불어 넣는 건 자신이었다.
“수녀님!”
구원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손에 잡혀있던 손을 휙, 빼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수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조심히 가세요.”
도망치듯 자리를 뜨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테즈만이 웃음을 참아냈다.
흔들리고 있는 것이 빤히 보이는데 발버둥 치는 것이 애처로우면서도 갸륵했다. 상관없었다. 충분히 기다릴 수 있었다. 하복부가 빠듯했다. 테즈만이 눈동자만 굴려서는 바지 앞섬을 확인했다. 금방이라도 바지를 뚫고 나올 기세로 불룩 솟아난 선단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그가 중얼댔다.
“얼마나 참을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만족해야 했다. 보육원 아이들이 성당에 머무는 시간을 늘려서 그녀가 한국에 가지 못하게 시간을 번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기간 안에 수아를 잔뜩 흔들어 놔야 했다. 결국에는 제 품으로 떨어지기를 바라며.
독이 바짝 오른 페니스를 겨우 가라앉힌 그가 성당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그녀는 자리를 뜬 뒤였다. 테즈만이 성당 앞에서 뛰노는 아이 하나를 잡고는 물었다.
“수녀님은 어디 있지?”
“수녀님이요? 수녀님은 수도원 부엌에 계세요! 점심 만드신대요!”
그러고 보니 벌써 점심시간이었다. 수아와 함께 있을 때, 테즈만의 시간은 마치 물처럼 흘렀다. 가늠도 할 수 없게끔.
테즈만을 향해 아이가 천진난만하게 말을 이었다.
“아저씨도 같이 먹어요! 수녀님 요리는 최고거든요!”
“아. 아.”
수아가 만든 점심이라.
테즈만이 같잖은 착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
애써 진정된 마음을 가라앉힌 수아는 점심 만들기에 집중했다. 이렇게나마 그의 존재를 머릿속에서 지울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넉넉하게 해서 많이 먹여야지.”
항상 부족했던 식재료는 테즈만의 후원금 덕에 풍성해졌다. 아이들을 먹일 생각에 들뜬 듯 흥얼거리며 요리를 하던 수아가 인기척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수녀님! 배고파요!”
해맑게 웃는 아이의 등 뒤에는 수아가 그토록 머릿속에서 떨쳐내려던 존재가 서 있었다.
“점심, 먹으러 왔는데.”
수아의 타들어 가는 속은 모르고 테즈만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