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10화
10화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시간, 그제야 수아는 성당으로 향했다. 테즈만과 만나지 않기 위해, 기도한다는 이유로 성당에 나가지 않았다. 빈첸시오 신부는 원래 종신 서원을 앞두고 생각이 많아진다며 수아가 기도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왔다.
보지 않으니 생각나지 않는 것이 당연한데 그러질 못했다. 기도에 전념하려고 해도 금방 상념에 젖어 들었다. 그 상념의 주인이 테즈만이라는 것에도 좌절했다.
벗어나기 위해 도망쳤는데 결국은 아무것도 해결되는 것이 없었다. 계속해서 그에게 끌리는 마음을 부정해야 했으며 그럴수록 수아는 하느님 앞에서 죄인이 되었다.
“하...”
탁한 숨을 내뱉으며 성당 문을 열었던 수아는 멈칫했다. 항상 그녀가 앉던 자리에 누군가 있었다. 기도하는 남자의 탁한 카키색 머리카락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등치로 보나, 머리카락 색으로 보나 테즈만이 아니었다. 바짝 긴장했던 수아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기도를 하던 남자가 끝났는지 조용히 성호경을 그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유럽은 아직도 귀족 가문이 남아있다고 하던데. 수아는 지금 제 앞으로 보이는 사람이 틀림없는 귀족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유럽 어느 나라의 왕세자라거나. 아니, 애초에 귀족이나 왕세자라는 사람이 이렇게 작고 낡은 성당에 올 일이 있을까.
“수녀님이신가 봅니다.”
생각에 잠겨있던 수아가 나긋한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아. 안녕하세요. 기도를 방해했다면 죄송합니다.”
“그럴 리가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남자가 말했다.
“전 미카엘입니다. 참고로 세례명입니다.”
세례명을 이야기하는 걸 보니 독실한 신자인듯했다. 남자가 다시금 흐트러지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름은 르로이, 르로이 바그너입니다.”
“아, 그럼... 세례명으로 불러드릴까요? 아니면 이름으로?”
“편하신 대로 불러도 좋습니다. 앞으로 자주 올 것 같아서 말이죠.”
새로운 신자라니. 빈첸시오 신부도 좋아할 것이 틀림없었다.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수아가 활짝 웃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말씀 주세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수녀님.”
입은 웃고 있음에도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이질적인 표정으로 르로이가 그녀를 향해 물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답해주시겠어요?”
“아... 네. 말씀하세요.”
“수녀님은.”
이제는 입가의 미소마저도 사라진 채, 르로이가 그녀를 향해 물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종교를 버리지 않으실 건가요?”
예상치 못한 질문이라는 듯 수아의 얼굴이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수녀에게 신을 버릴 수 있냐니. 어쩌면 그녀에게 가혹한 질문이었다.
“조금 짓궂었던 질문 같군요.”
그럼에도 르로이는 질문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그럼,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환속을 하실 수 있으십니까.”
환속. 수녀를 그만둘 수 있냐는 물음이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수아에게는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조금만 짓궂은 질문은 아닌 것 같네요.”
단호하게 내뱉는 수아를 보는 르로이의 눈빛이 흥미롭게 바뀌었다.
“저는 평생을 신을 따르고 봉사하기 위해 준비해왔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 서 있는 거고요. 아직 종신 서원을 하지 않은 수녀지만 그래도 제게 물을 질문은 아니라고 생각하네요.”
“그런가요?”
“네. 그래요.”
“다른 수녀님이나 신부님께 물었을 때는 이 정도 반응은 아녀서 말이죠. 수녀님 또한 괜찮을 줄 알았습니다.”
수아의 눈꺼풀이 떨리듯 깜빡였다.
“수녀님. 제가 감히 한 말씀 드리자면.”
언제 무표정이었냐는 듯 르로이가 부드럽게 눈가를 휘었다.
“속단하는 걸 조심하세요. 사람 일은 모르는 겁니다. 또한, 강한 부정도 하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긍정의 표현일 수도 있으니 말이죠.”
강한 부정은 긍정이나 다름없다는 말이 머리에서 왕왕 댔다. 멍해진 채 서 있는 수아를 향해 르로이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럼, 수녀님. 다음에 또 뵙죠.”
수아는 유유히 자리를 뜨는 르로이를 돌아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고? 왜 하필 이 질문에서 수아는 그를 떠올렸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더욱 발끈하며 답한 것일 수도 있었다.
동요하는 제 마음을 숨기기 위해.
아찔한 느낌에 수아가 재빠르게 의자에 앉았다. 마음을 다잡고 손을 마주 모았다. 가라앉혀야 했다. 없애야 했다. 쓸데없는 상념 따위는.
그 후로도 르로이는 꾸준히 성당에 찾아왔다. 르로이를 만나는 것이 괜히 껄끄러워진 수아는 계속해서 시간을 달리해 성당을 찾았지만, 헛된 수고였다. 마치 짜기라도 한 듯 그녀가 성당 문을 열었을 때는 르로이가 기도를 하고 있었다.
자신보다 먼저 와서 기도하고 있었기에 차마 의심할 수도 없었다. 그럴 때면 수아는 르로이와 멀찌감치 떨어져서 기도를 시작했다. 르로이가 어서 빨리 기도를 끝내고 자리를 뜨길 바라며 일부러 긴 기도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르로이는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수아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기도를 끝내고는 볼일을 다 봤다는 사람처럼 수아를 지나쳐 성당을 나갈 뿐이었다.
테즈만도 신경 쓰였는데 이제는 르로이라니. 그러고 보니 둘 다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었다. 얼굴도 아니고 이미지도 아닌 풍기는 아우라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기도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난 수아는 성당 문 앞에선 그를 발견했다.
그토록 상념을 없애고자 절절한 기도를 올렸음에도 테즈만과 마주친 순간 머릿속은 백지장이 되어버렸다.
“오랜만이야, 수녀님.”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자마자 예민하게 반응했다. 수아가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툭 그의 이름을 뱉어냈다.
“... 테즈만”
천천히 걸어오는 그의 얼굴을 보자니 밀어내야 한다는 사실도 잊어 버렸다. 홀렸다는 게 이런 기분이었나 싶을 정도로.
“기도한 보람이 있나 봐. 수녀님이 내 이름을 먼저 불러줄 줄 몰랐거든.”
달짝지근하게 떨어지는 시선을 그대로 받아내기가 버거울 정도였다. 애써 태연한 척 말을 돌렸다.
“... 혹시, 성당에 후원한 거….”
“아. 너무 적게 내서 수녀님이 날 피하는 줄 알았는데.”
너무 적게 내다니. 성당과 수도원을 다시 짓고도 남을 돈을 보내놓고서는.
“적지 않아요. 오히려...”
“날 구원했잖아. 그런 것 치고는 너무 적은 돈이긴 하지.”
작게 벌어져있던 입술이 이윽고 앙다물렸다. 어차피 그와 말을 섞으면 섞을수록 말려드는 것은 수아였다.
“그래서 수녀님, 왜 날 피했지?”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서는 수아와 시선을 맞추려 했다.
“... 피한 거 아니에요.”
“그럼?”
“... 테즈만 자체가 부담스럽기도 하고 신경 쓰이기도 하니까요.”
답답함에 저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본심에 테즈만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 날 신경 썼다고 말했어?”
하마터면 쏟아낼 뻔했다. 자신이 수아를 생각하면 하복부에 피가 바짝 몰리는 것처럼 그녀 또한 그러는지. 자신이 수아를 생각하면 갈증이 일고 애타는 것처럼 그녀도 그러는지.
“수녀님.”
생각하자니 미칠 것만 같았다.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초조함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수아를 향해 바짝 다가선 그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놔, 놔주세요! 신성한 성당에서...!”
“그래, 신성한 성당에서 우리 수녀님께서 날 흥분시켰잖아.”
“테즈만...!”
어느새 그녀의 코끝으로 제 코를 바짝 가져다 댄 테즈만이 은밀하게 속삭였다.
“그래, 계속 불러.”
서로의 숨과 숨이 적나라하게 섞이는 거리. 그가 그 거리를 단번에 좁혔다.
“지옥에 떨어지라고 욕을 해도 좋아.”
그가 왜 지옥이라는 말을 내뱉었는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으읍.”
몰캉거리며 닿는 입술에 테즈만은 참지 못했다. 꽉 다문 입술 사이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뾰족하게 세운 혀로 수아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서는 잇새를 샅샅이 훑었다. 여린 점막을 혀가 쓸자 수아의 다리가 휘청였다. 그러자 그의 단단한 팔이 더욱 옥죄였다.
“흐읍...”
도망가는 그녀의 혀를 잡기 위해 그의 혀가 입 안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다. 성급하게 굴지는 않았다. 부드럽고도 다정하게 주위를 살살 건드리며 수아의 혀를 물고 빨았다.
굳어있던 수아의 혀가 어설프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테즈만은 애타던 것이 해갈됨을 느꼈다. 물론, 이 모든 갈증이 없어지기 위해서는 그녀의 모든 것을 물고 빨고 제 것에 잔뜩 절여놓아야 했지만.
이렇게 뛰다가는 곧 멈출 것처럼 수아의 심장이 뛰었다.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온몸에 숨겨진 세포가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생경한 감각에 수아의 목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지만 그대로 그의 입 속에서 삼켜졌다. 오직 들리는 소리라고는 입술을 탐하는 젖은 소리뿐이었다. 입술과 입술 사이, 차마 삼키지 못한 타액이 고였다.
수아는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배덕감, 쾌락, 타락. 수녀로서는 절대 갖춰서는 안 될 것들을 지금 수아는 다 갖추고 있었다.
“흐으...”
툭. 수아의 손에서 묵주가 떨어졌다. 가녀린 손가락이 그의 블랙 재킷을 움켜쥐었다. 그에게 삼켜지는 기분이었다. 온몸이 떨렸으며 숨이 가빠왔다.
“수녀님.”
입술을 뗀 그가 쾌락에 젖은, 몽롱한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는 수아를 보며 입술을 휘었다. 이 모습 그대로 작품으로 만들어 자신만 볼 수 있는 곳에 걸어놓고 싶었다.
수아의 입술 끝에 모인 타액을 쓸어서는 다시금 그녀의 입안으로 집어넣으며 그가 속삭였다. 수아의 입술을 쓸며 그가 속삭였다.
“신이 아니라 날 선택해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