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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7화. 새로운 이름


모니터 한가운데 깜빡이는 커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후드 안쪽에서 머리칼이 살짝 미끄러져 내려왔고, 그 감촉에 무심코 턱을 괴었다. 닉네임 하나인데 왜 이렇게 오래 보게 되는지 모르겠다. 랜덤 추천 목록이 다시 한 번 눈에 들어왔다. 하나별, 소소, 블루, 은하 “…다 여자같긴 한데.” 귀여운? 닉네임 같은 게 지금의 나한테 썩 잘 어울리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예전처럼 아무 의미 없는 아이디를 쓰기엔 이제 상황이 달라져버렸다. 나는 손가락을 키보드 위에 얹었다가 다시 떼었다. ‘뭐….’ 키보드를 눌렀다. 한 글자, 그리고 또 한 글자. 은 잠깐 멈췄다가, 하 그렇게 나는 확정 버튼 위에 커서를 올렸다. 딸깍. 추천 목록에 있던 이름이었지만 막상 직접 치니까 느낌이 달랐다. 너무 반짝이지도 않고, 너무 튀지도 않고. 그냥 어딘가 멀리 있는 것 같은 이름. 제일 분위기를 덜 탈 것 같은 이름으로 정했다. …여차하면 쓸 수 있는 사람 이름같기도 하고. [닉네임 설정 완료] 변경 전: 임시닉네임_001 변경 후: 은하 “……” 이상했다. 이름 하나 바꿨을 뿐인데 화면 속 채널이 조금은 사람 같아 보였다. 회색 실루엣 아래 이제는 분명한 이름이 있었다. [프로필 이미지 설정] 현재: 기본 아이콘 추천 이미지 업로드 or 스냅샷 기능 사용 가능 ※ 설정하지 않으면 기본 이미지로 표시됩니다. 새로운 입력창이 하나 더 떴다. “아, 이건 좀 고민되는데…” 무심코 머리를 긁으려다 손끝에 닿은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살짝 멈췄다. …머리, 안 말렸었지. 나는 고개를 한번 젖혀 이마에 붙은 머리칼을 털고 컴퓨터에 연결된 노트북 카메라를 잠시 응시했다. “이 상태로 캡쳐해도 괜찮으려나…?” 화장은 당연히 없고 후드티에 팬티 차림. 하지만 화면 안에 비친 나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눈이 조금 커보이고, 피부는 하얘져서… 의외로, 꽤 자연스러운 얼굴 같기도. “그래, 뭘 더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나는 스냅샷 촬영 버튼을 눌렀다. 찰칵, 하는 인공적인 소리. 그리고… [프로필 이미지가 등록되었습니다.] 곧바로 회색 실루엣이 ‘나’의 얼굴로 바뀌었다. 카메라 너머로 누가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잠깐이나마 긴장했는지 괜히 식은땀이 맺혔다. 이어서, 다음 창이 떴다. [채널 소개글 작성] (최대 100자) 커서가 다시 깜빡였다. “엑.” 뭘 써야 하지. 나는 키보드를 몇 번 두드리다 멈췄다. 뭐라고 써야 하지? ‘게임도 하고, 수다도 떠는… 아직은 어색한 신입입니다.’ 너무 뻔하고… 너무 평범해. 그런데 또 너무 튀게 쓰자니 부끄럽고. “…….” 나는 끙끙거리며 잠깐 생각하다가 아주 짧게 적었다. 조용한 게임 방송합니다. 말 많지 않아요. 그래도 오래 켜둘게요. 엔터. 그게 전부였다. 진짜로 할 수 있을만한 건 이런 것 밖에 없어서. [설정 저장 완료] 🎉 축하합니다, 은하님! 채널 공개 상태 유지 중 구독 기능: 활성화 실시간 유입 태그: 신입 / 캠방송 / 게임스트리머 전부 클릭을 누르자 플랫폼의 마스코트 캐릭터가 축포를 터트리며 나를 반겨주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방송을 처음 시작하던 그 때가 떠올라 어이없이 피식 웃어버렸다. “하아…” 괜히 또 한숨이 나왔다. 이제 이 망할 가챠에서 나온 상태창이 뭐라고 할까 싶어서. 하지만 동시에 이상하게도 조금 기대가 됐다. 다음 방송, 다음 선택. 다음에 보게 될 사람들. 나는 잠깐 등을 기대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은하, 스트리머.” 마우스를 내려놓은 채 후드 소매로 손등을 덮은 채 작게 중얼였다. 입에 올려보니 아직은 어색했지만 싫지는 않았다. “한 번만 더 해보자.” 그 말은 누구에게 들리게 한 것도 아니고 다짐이라고 하기엔 너무 작았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에겐 충분했다. 모니터 위쪽에서 작게 알림이 하나 더 떠올랐다. ----------------------------------------------------- [서브 퀘스트 추천 진행] — 연계 항목: 커뮤니티 초기 활성화 — 추천 행동: 첫 공지 작성 — 효과: 닉네임 인식 고정 / 재방문 확률 증가 ※ 안내: 초기 공지는 짧을수록 이탈률이 낮습니다. ----------------------------------------------------- “…공지?” 나는 화면을 한 번 더 훑어봤다. 근 2년간 방송하는 동안 필로우란 건 하나도 없었기에 쓸 생각도 못했던 시스템이었다. 어줍잖게 페이지를 살펴보다, 클릭.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 회색 배경 위에 [첫 글을 작성해보세요] 라는 문구가 떠 있었다. 뭔가 처음에 너무 거창한 걸 하는 것 같아 괜히 침을 삼켰다. 방송은 껐다 켜면 그만이지만 공지글은 누군가 들어와서 언제든 볼 수 있는 흔적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10명의 팔로워가 붙어있으니, 그들에겐 곧장 알림이 갈 텐데. 커서가 입력창에 깜빡였다. 작성자: 은하 “…아.” 입 밖으로 소리가 났다. 누가 불러준 것도 아닌데 이름이 화면에 찍혀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한 번 더 뛰었다. 나는 잠깐 등을 의자에 붙였다가 다시 앞으로 기울었다. ‘어렵게 쓸 필요 없어.’ 아까 전에도 그랬다. 짧게, 지금 할 수 있는 만큼만. 키보드를 두드렸다. [커뮤니티 공지] 안녕하세요. 은하입니다. 닉네임 바꿨어요. 어제는 테스트 방송이었고, 오늘 방송은 오늘 밤 10시쯤 켤 것 같아요. 조용한 게임 방송입니다. 편하게 들러주세요. 엔터. 글이 등록되자마자 공지글 상단에 작은 아이콘이 하나 붙었다. [공지] “…끝?” 너무 싱거운가 싶어서 다시 읽어봤지만 괜히 덧붙이면 더 어색해질 것 같았다. 그냥 이 정도가 지금의 나였다. 공지글을 올리고 나서 한참을 화면만 보고 있던 때였다. 마우스를 내려놓으려는 순간 익숙한 반투명 창이 조용히 겹쳐 떴다. ----------------------------------------------------- [서브 퀘스트 완료] — 이름: 퍼스널 캐릭터 셋팅 — 분류: [정체성 - 공개범위 설정] — 선택 시 스트리머 프로필 & 커뮤니티 기능 해금 — 결과: 달성 추가 보상 지급 중… ----------------------------------------------------- 보상. 지금 입고 있는 속옷도 여기서 나온 거긴 한데... 덕분에 속옷 가게에서 다 큰 어른이 쭈뼛거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이 와중에도 진짜 게임처럼 보상을 챙긴다는 게 어이가 없어서. 조금의 기대와 함께 나는 조금 자세를 고쳐 앉았다. ----------------------------------------------------- [보상 목록] — 스트리머 기본 의상 세트 (여성용 / 캐주얼) · 오프숄더 원피스 1종 · 속옷 세트 1종 · 스트랩리스 브라탑 1종 ※ 효과 — 시청 시선 분산 감소 — 착용 시 신체 인식 안정화 +5% — ‘사고’ 확률 감소 (일시적) ----------------------------------------------------- "으앗!" 허공에서 툭 던져지듯 머리로 쏟아져오는 천더미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앞에 생겨날 수도 있을텐데 성질 나쁘긴! 시선 높이 저 어딘가를 향해 한숨 섞인 투덜거림이 새어 나왔다. 방금 전까지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하얀 천이 물결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허리를 굽혀 조심스럽게 하나를 집어 들었다. 하얀색 오프숄더 원피스. 얇지 않으면서도 가볍고, 손끝에 닿는 촉감이 부드러웠다. 너무 꾸민 느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집에서 막 입는 잠옷 같지도 않은... 그, 소개팅룩? 같은 거. “…이런 거면.” 괜히 중얼거리며 옷을 펼쳐 보았다. 어깨가 드러나는 디자인이라 다행일까. 이 가슴을 전부 욱여넣어야 할텐데 오히려 답답했던 목선을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느낌. “사고 확률 감소….”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설명 문구를 다시 떠올렸다. 노출을 줄이겠다는 게 아니라 의도치 않은 상황을 막아주겠다는 쪽에 가까운 설명. 그 옆에 놓인 까만 속옷 세트와 하얀색 브라탑은 색도 디자인도 전부 무난했다. 괜히 의식하게 만드는 화려함은 없었다. “…그래도, 선택권은 주네.”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자 묘하게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어제는 입고 싶어서 입은 것도 아니라 좀 꾀죄죄했지. 사고 역시 보여주고 싶어서 보여준 것도 아니었는데, 지금은 달랐다. 적어도 입을지 말지는 내가 정할 수 있었다. 나는 원피스를 침대 위에 걸어 두고 잠깐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알림 하나. [커뮤니티] ‘은하’님의 공지에 댓글이 달렸습니다. “…벌써?” 심장이 괜히 한 박자 빨라졌다. 댓글 3 하나도 아닌 셋이나. 떨리는 손을 붙잡고 그대로 하나씩, 천천히 내려 읽었다. — ㅇㅇ: 닉 바꿨네 — 오늘유입 : 으흐흐 — 갤에서보고옴 : 은하님 10시 확인~ 너무 무리하지 말고 편하게 해주세요 “….” 바로 웃음이 나왔다. 무리하지 말라는 말이 왜 이렇게 다정하게 느껴지는지. 모니터 속 회색이던 공간에 조금씩 온도가 생기는 기분이었다.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휴대폰을 가슴 위에 올려둔 채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두근. 괜히 심장 소리가 크게 들리는 것 같아 손바닥으로 가볍게 눌러봤지만 소용없었다. “…댓글 몇 개 달렸다고.” 스스로를 타박하듯 말했는데 입꼬리는 내려오지 않았다. 뭘 했다고 날 기다리는 사람들이 생긴 건지. 나는 다시 원피스가 놓인 침대 쪽을 힐끔 보았다. '10시.' 아직 시간은 조금 남아 있었다. 괜히 자세를 고쳐 앉고 머리칼을 한번 귀 뒤로 넘겼다가 다시 내려오자 또 정리하고. '이런 적이 없었는데.' 방송 켜기 전이 이렇게 길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휴대폰 화면을 끄며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였다. “기다린다….” 어쩐지 전날보다는 조금 더 잘해보고 싶어졌다는 신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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