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한줄기 빛
1. 세금
박 차장과의 점심시간 업무를 끝낸 후 사무실로 복귀 후 오후 3시.
팀 주간 회의가 끝났다.
오후 업무 시간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범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아, 정확히 말하자면 회의 직후 윤 대리의 호출이 있었다.
장소는 탕비실 안쪽 비품실.
"후우... 성 주임, 오늘따라 더 쪼이네."
윤 대리는 보윤을 복사 용지 박스 위에 걸터앉히고, 급하게 욕구를 해결했다.
짐승 같은 교미라기보다는, 마치 급하게 컵라면을 해치우는 듯한 인스턴트 섹스였다.
보윤은 윤 대리의 어깨 너머로 먼지 쌓인 선반을 바라보며 무덤덤하게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이 정도면 곧 끝나겠지.'
수치심? 반항? 그런 건 이제 사치였다.
그저 회사 생활을 편하게 하기 위해 내야 하는 '세금' 같은 것이었다.
닳아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짧은 10분만 눈 딱 감고 버티면 오후 업무가 편해진다.
윤 대리가 사정하고 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보윤은 휴지로 대충 뒤처리를 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리로 돌아왔다.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은 채, 다시 엑셀 파일을 여는 그녀의 손길은 기이할 정도로 차분했다.
2. 집요한 호출
자리에 앉아 업무를 시작하려는데 휴대폰이 징징거렸다.
[한설아] : 야, 성보윤! 살아있어? 왜 톡 안 봐? ㅠㅠ
설아였다.
그날 밤 이후 처음으로 오는 개인 톡이었다.
보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태인과 설아, 그들과 엮였던 기억은 뇌리에서 지우고 싶었다.
[나] : 미안. 업무가 바빠서 못 봤어.
[한설아] : 에이, 뻥치지 마. 일부러 씹은 거지? ㅋㅋ 오늘 마치고 밥 먹자!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보윤은 망설였다.
또다시 그 지옥 같은 쓰리섬의 현장으로 끌려가고 싶지 않았다.
[나] : 오늘은 좀 피곤해서... 쉬고 싶어.
하지만 설아는 끈질겼다.
[한설아] : 아잉~ 그러지 말고. 태인 오빠는 오늘 바빠서 못 나와. 우리끼리만 보는 거야.
[한설아] : 여자끼리 오붓하게 수다나 떨자구. 나 심심해 죽겠단 말이야. ㅠㅠ
[한설아] : 7시에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기다릴게. 안 나오면 나 삐진다?
'태인 씨는 안 나온다...'
그 말에 보윤의 경계심이 아주 조금 허물어졌다.
가장 두려운 포식자인 태인이 없다면, 설아 정도는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혼자 집에 가서 우울하게 있는 것보다는 화려한 설아와 어울려 잠시 현실을 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이미 약속 장소까지 정해서 통보해버린 설아의 기세에 거절하기가 애매했다.
[나] : ...알겠어. 칼퇴하고 넘어갈게.
[한설아] : 앗싸! 역시 우리 보윤이 착해. 이따 봐! ♥
퇴근 시간.
보윤은 화장실에서 번진 화장을 고치고 회사 건물을 나섰다.
'그래, 그냥 밥만 먹는 거야. 여자끼리니까.'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찜찜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지난번 그날 밤.
설아는 태인 못지않게 능숙하게 보윤의 몸을 탐했다.
자신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던 설아의 혀, 부드러운 살결, 그리고 기어코 자신을 절정으로 몰고 갔던 그 테크닉.
강남역 인파 속에서 손을 흔드는 설아의 화려한 모습이 보였다.
해맑게 웃고 있는 그 얼굴 뒤에 무엇이 숨겨져 있을지, 보윤은 알 수 없었다.
그저 이끌리듯 그녀에게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3. 회색빛 도시의 네온사인
강남역 10번 출구 앞은 금요일 밤의 열기로 들끓고 있었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설아는 단연 눈에 띄었다.
몸매가 드러나는 화려한 오프숄더 원피스에, 멀리서도 반짝이는 액세서리들.
칙칙한 회사 유니폼이나 다름없는 슬랙스 차림의 보윤과는 다른 세상 사람 같았다.
"보윤아! 여기, 여기!"
설아가 방방 뛰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해맑은 웃음을 보자, 보윤은 하루 종일 회사에서 시달렸던 피로가 아주 조금은 가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을 탐욕스러운 눈으로 훑어보는 늑대들이 없었으니까.
"와, 우리 보윤이 오늘따라 더 청순해 보이네? 이런게 직장인이구나~"
설아는 자연스럽게 보윤의 팔짱을 끼며 재잘거렸다.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달콤한 향수 냄새가 비릿한 정액 냄새와 땀 냄새에 절어있던 보윤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뭐 먹고 싶어? 내가 진짜 힙한 데 알아놨어. 스트레스받을 땐 무조건 자극적인 걸 넣어줘야 해."
설아는 보윤의 대답도 듣지 않고, 그녀를 이끌고 화려한 네온사인 숲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보윤은 엉거주춤 끌려가면서도, 설아의 따뜻한 체온과 명랑한 목소리에 조금씩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설아가 데려간 곳은 20대 초반 대학생들로 북적이는 트렌디한 마라 전골 집이었다.
쿵쿵 울리는 베이스 음악 소리와 자욱한 수증기, 시끌벅적한 대화 소리가 혼을 빼놓을 지경이었다.
평소 보윤이라면 절대 혼자서는 오지 않았을 장소였다.
"여기 얼그레이 하이볼 두 잔이요! 전골은 제일 매운맛으로!"
설아는 익숙하게 주문을 마치고, 턱을 괴고 보윤을 빤히 쳐다보았다.
"회사 일 힘들지? 얼굴이 반쪽이 됐네. 가슴은 그대로인데 볼살만 빠졌어. 속상하게."
설아는 짓궂게 웃으며 보윤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그 손길에는 지난번의 성적인 뉘앙스가 전혀 없었다.
그저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귀여워하는 듯한, 담백한 스킨십이었다.
곧이어 나온 영롱한 갈색빛의 얼그레이 하이볼.
"자, 짠! 오늘 하루도 고생한 우리를 위하여!"
챙그랑.
얼음이 부딪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보윤은 하이볼을 한 모금 들이켰다.
달콤 쌉싸름한 홍차 향과 함께 시원한 알코올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며, 딱딱하게 굳어있던 위장을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맛있다..."
보윤의 입에서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그치? 내가 맛집 레이더잖아. 많이 마셔, 오늘 내가 쏘는 거니까."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붉은색 마라 전골의 매콤한 향기가 식욕을 자극했다.
설아는 뜨거운 고기와 채소를 앞접시에 덜어 호호 불어가며 보윤의 앞에 놓아주었다.
"뜨거우니까 조심해서 먹어. 아, 맞다. 너 그거 봤어? 요즘 유튜브에서 유행하는 고양이 밈!"
설아는 휴대폰을 꺼내 웃긴 영상을 보여주며 깔깔거렸다.
어둡고 끈적한 주제들은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오로지 연예인 가십, 요즘 유행하는 패션, 웃긴 동영상 이야기뿐이었다.
너무나 가볍고, 그래서 더없이 소중한 대화들이 오갔다.
하이볼 두 잔이 비워질 무렵, 보윤은 자신이 소리 내어 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윤 대리의 비품실 호출도, 박 차장과의 모텔행도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졌다.
알코올이 주는 나른한 행복감이 그녀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4. 네 컷 사진
"아, 배불러. 야, 우리 그냥 가기 아쉽지 않아? 저거 찍자, 인생네컷!"
가게를 나온 설아가 길가에 있는 셀프 포토 부스를 가리켰다.
술기운에 기분이 업된 보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찍자!"
좁은 부스 안은 밝은 조명으로 가득 차 있었다.
벽에는 온갖 종류의 우스꽝스러운 머리띠와 선글라스가 걸려 있었다.
"보윤아, 넌 이거 써. 토끼 귀! 완전 잘 어울릴 것 같아."
설아가 하얀색 토끼 귀 머리띠를 보윤의 머리에 씌워주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귀여워 보여, 보윤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설아는 커다란 리본 머리띠를 하고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 찍는다! 시간 없어, 빨리 포즈 취해!"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제한 시간 안에 포즈를 바꾸느라 좁은 부스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둘은 서로의 볼을 맞대고, 엽기적인 표정을 짓고, 설아가 보윤을 뒤에서 끌어안고 브이를 그렸다.
카메라 앞에서 경직되어 있던 우수 사원은 없었다.
그저 술에 취해 친구와 장난치는 평범한 20대 여자만 있을 뿐이었다.
설아의 부드러운 볼이 닿고, 그녀의 숨결이 귓가를 간지럽힐 때마다, 지난번의 기억보다는 따뜻한 친밀감이 먼저 느껴졌다.
지잉-
기계에서 따끈따끈한 사진 두 장이 인쇄되어 나왔다.
네 컷의 사진 속 두 여자는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다.
특히 활짝 웃고 있는 자신의 얼굴을 본 보윤은 가슴 한구석이 찡해져 왔다.
매일 거울 속에서 보던, 생기 없고 죽어있는 눈동자의 여자는 온데간데없었다.
"잘 나왔다! 이거 하나씩 나눠 가지자. 지갑에 꼭 넣고 다녀, 알았지?"
설아가 사진 한 장을 보윤의 손에 쥐여주었다.
밤공기는 시원했고, 알코올 기운은 적당히 기분 좋게 올라왔다.
보윤은 사진을 소중히 지갑 속에 넣으며, 옆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설아를 바라보았다.
태인의 파트너, 자신을 성적으로 탐했던 여자.
경계해야 마땅한 대상이었지만, 오늘 밤만큼은 그녀가 유일한 구원자처럼 느껴졌다.
"설아, 오늘... 진짜 고마워. 나 너무 재밌었어."
보윤의 진심 어린 말에, 설아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가로등 불빛을 받은 그녀의 눈동자가 묘하게 반짝였다.
"그치? 내가 뭐랬어. 나오길 잘했지?"
설아는 보윤의 손을 꼭 잡으며, 의미심장하지만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앞으로 더 자주 보자. 알았지?"
그 달콤한 제안 속에 어떤 가시가 숨겨져 있을지, 술에 취해 무방비해진 보윤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맞잡은 손의 온기가 따뜻해서,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