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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집 앞의 불청객


1.낯선 빛 윤 대리가 비상계단을 빠져나간 뒤, 보윤은 떨리는 손으로 옷매무새를 추슬렀다. 뜯어진 블라우스 단추는 찾을 수 없어, 가방 구석에 있던 옷핀으로 엉성하게 여몄다.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린 정액과 타액은 물티슈로 벅벅 닦아냈지만, 살갗에 스며든 비릿한 냄새는 지워지지 않는 것 같았다. "후우..." 오후 업무는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박 차장의 성추행과 윤 대리의 폭력적인 유린을 견뎌낸 보윤은,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도망치듯 회사를 빠져나왔다. 지하철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처참했다. 화장은 번져 있었고, 눈동자는 죽은 생선처럼 탁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몸에서 시궁창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집에 가서 씻자... 씻고 그냥 자는 거야...' 그녀는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리며 익숙한 골목길로 들어섰다. 보윤이 사는 낡은 빌라 앞. 평소라면 가로등 하나가 깜빡거려야 할 어두운 골목이 대낮처럼 환했다. 강렬한 LED 헤드라이트 불빛이 눈을 찔렀다. 보윤은 미간을 찌푸리며 손으로 빛을 가렸다. 그 빛의 발원지는 골목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날렵한 유선형의 포르쉐였다. 엔진 소리마저 웅장하게 그르렁거리는 검은색 스포츠카. '누가 이런 차를 여기에...' 보윤이 주춤하며 옆으로 비켜서려던 순간, 운전석 문이 열리고 누군가 내렸다. "보윤아."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 차에 기대어 서 있던 남자가 보윤을 보며 환하게 손을 흔들었다. 태인이었다. 그는 깡패나 양아치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몸에 딱 떨어지는 세련된 네이비색 세미 정장, 말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 그리고 은은하게 풍기는 고급 향수 냄새. 한 손에는 작은 쇼핑백을 들고 있는 그는, 마치 여자 친구를 깜짝 마중 나온 '완벽한 남자친구'의 모습 그 자체였다. "퇴근이 늦네? 한참 기다렸잖아." 태인은 보윤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보윤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만큼 압도적인 비주얼과 분위기였다. "카톡 답장도 없고... 오빠가 걱정돼서 얼굴이라도 보려고 왔지." 그는 보윤의 코앞까지 다가와, 헝클어진 보윤의 앞머리를 다정하게 넘겨주었다. 그 손길, 그 미소, 그리고 여자를 하대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저 태도. '......!' 보윤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태인의 얼굴 위로, 과거 보윤의 인생을 짓밟고 웃으며 떠나갔던 '백윤겸'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사람을 홀리는 달콤한 가면 뒤에, 잔인한 포식자의 본능을 숨기고 있던 그 악마. 태인에게서 똑같은 냄새가 났다. "어... 어떻게 여기를..." 보윤이 뒷걸음질 치려 하자, 태인이 피식 웃으며 어깨를 감싸 쥐었다. "섭섭하네. 저번에 지은이랑 소금빵 주러 왔었잖아. 기억 안 나?" 그랬다. 그때는 차 안에만 있어서 얼굴을 제대로 못 봤을 뿐, 태인은 이미 보윤의 거주지를 꿰뚫고 있었다. 태인의 시선이 보윤의 옷차림을 훑었다. 옷핀으로 억지로 여민 블라우스, 구겨진 슬랙스, 그리고 화장이 지워진 창백한 얼굴. 그는 보윤이 오늘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짐작이라도 한 듯,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가 이내 다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너 안색이 왜 그래?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 "아... 아니에요. 그냥 좀 피곤해서..." "밥도 안 먹었지? 배고프겠다." 태인은 보윤의 손에 들린 쇼핑백을 쥐여주며, 조수석 문을 열었다. "타. 안 그래도 너 몸보신 좀 시켜주려고 괜찮은 식당 예약해 놨어." "저, 저는... 그냥 집에서 쉬고 싶..." 보윤이 거절의 의사를 비치자, 태인의 미소가 미묘하게 굳어졌다. "에이, 보윤아. 오빠가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보낼 거야? 쪽팔리게." 그는 웃고 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거기 예약 잡기도 힘든 곳이야. 내 성의를 봐서라도 같이 가주라. 응?" 부드러운 권유였지만, 그 속에는 '거절하면 어떻게 될지 알지?'라는 서늘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지나가던 동네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잘생긴 부자 남자친구와 초라한 여자의 그림. 여기서 소란을 피우면 내일 당장 소문이 날 것이고, 태인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보윤을 짓눌렀다. "...잠깐 밥만... 먹는 거예요..." 보윤은 결국 고개를 숙였다. 오늘 하루, 자신의 의지대로 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박 차장의 점심 호출도, 윤 대리의 비상계단 호출도, 그리고 태인의 저녁 식사 초대도. "그럼. 밥만 먹자. 오빠 믿지?" 태인은 만족스러운 듯 보윤의 등을 떠밀어 조수석에 태웠다. 털썩. 최고급 가죽 시트의 안락함이 오히려 가시방석처럼 느껴졌다. 태인이 운전석에 타자마자 보윤 쪽으로 몸을 숙였다. 보윤이 흠칫 놀라 움츠러들었지만, 그는 씩 웃으며 안전벨트를 당겨주었다. 철컥. 안전벨트가 채워지는 소리가 마치 수갑이 채워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출발하자." 부드러운 엔진음과 함께 차가 미끄러지듯 골목을 빠져나갔다. 보윤은 차창 밖으로 멀어지는 자신의 집을 바라보았다. 씻고 싶다는, 쉬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마저 박탈당한 채, 그녀는 또다시 늑대의 굴에서 호랑이의 굴로 끌려가고 있었다. 2. 이질적인 공간 태인의 포르쉐가 도착한 곳은 청담동의 한 고급 한우 오마카세 식당이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검은 정장을 입은 매니저가 달려 나와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이사님. 제일 안쪽 프라이빗 룸으로 준비했습니다." "아. 네, 수고가 많아요." 태인은 익숙한 듯 매니저의 어깨를 툭 치며 걸음을 옮겼다. 보윤은 쭈뼛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은은한 조명,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정중한 직원들. 옷핀으로 뜯어진 단추를 겨우 여민 블라우스와 하루 종일 흘린 땀과 체액에 절어있는 자신의 몸이, 이 청결하고 화려한 공간에 지독한 오점처럼 느껴졌다. '나 같은 게 이런 데를 와도 되는 건가...' 안내받은 룸은 둘만의 공간이었다. 담당 셰프가 정중히 인사하며 화려한 마블링이 핀 고기를 접시에 담아 보여주었다. "살치살부터 구워드리겠습니다." 치이익-. 달궈진 무쇠 팬 위에서 고기가 익어가는 소리와 고소한 냄새가 룸 안을 가득 채웠다. 보윤은 무릎 위에 손을 올린 채 멍하니 불판을 바라보았다. 입맛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음식을 넘길 기분도,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태인은 보윤의 앞접시에 잘 익은 고기 한 점을 올려주며 턱짓했다. "먹어. 비싼 거야." 보윤은 거절할 수 없어 젓가락을 들었다. 억지로 입을 벌려 고기를 넣었다. "......!" 씹는 순간, 풍부한 육즙과 고소한 기름이 혀를 감싸고돌았다.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고기는 솜사탕처럼 사르르 녹아 없어졌다. 하루 종일 굶주리고 혹사당한 몸이 비명을 지르며 영양분을 환영했다. 보윤의 눈이 저절로 동그랗게 커졌다. 미간이 펴지고, 죽어있던 동공에 생기가 돌았다. 비참한 현실과는 별개로, 혀끝의 말초적인 감각은 너무나 솔직하게 쾌락에 반응하고 있었다. "풉." 태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와인 잔을 흔들며, 오물거리는 보윤을 흥미롭다는 듯 관찰하고 있었다. "잘 먹네. 귀엽게." 그 말에는 묘한 뉘앙스가 섞여 있었다. 사랑스러운 연인을 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비에 젖은 채 벌벌 떨던 길고양이를 데려와 캔 따개를 따주었더니, 경계하면서도 허겁지겁 받아먹는 꼴을 구경하는 주인의 눈빛. 젠틀함 속에 숨겨진 은근한 무시와 하대. "천천히 먹어. 아무도 안 뺏어 먹으니까." 태인은 자신의 몫까지 보윤의 접시에 밀어주었다. 마치 굶고 다닌 아이를 동정하듯, 혹은 사육하는 짐승의 배를 불리는 것처럼. 보윤은 그 시선이 언짢았지만, 젓가락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 웃으라고 해.' 복잡하게 생각해 봤자 머리만 아팠다. 어차피 태인이 이러는 목적은 뻔했다. 저번에 호텔에서 자신을 거칠게 다루고, 친구들을 불러 난교 파티까지 벌였던 남자다. 그런 그가 순수하게 밥만 먹이려고 불렀을 리가 없다. '어차피 밥값 하라는 거겠지.' 이 비싼 고기를 먹이고 나면, 호텔로 끌고 가서 몸을 요구할 것이다. 에너지를 채워놔야 밤새 가지고 놀기 좋을 테니까. 보윤은 스스로를 정의했다. 자신은 더 이상 존중받아야 할 인격체가 아니라고. 그저 밥을 주면 기능을 제공하는 '생체 오나홀'일 뿐이라고. '차라리 이게 나아. 박 차장이나 윤 대리처럼 짐승 취급하는 것보단... 이렇게 비싼 밥이라도 먹여주고 박히는 게 낫잖아.' 보윤은 반쯤 체념한 채, 이 순간의 안락함과 미각적 쾌락을 즐기기로 했다. 그녀는 셰프가 구워주는 족족 고기를 집어삼켰다. 식사가 끝났다. 태인은 수십만 원이 찍힌 계산서를 아무렇지 않게 카드로 긁었다. "가자." 다시 포르쉐의 조수석에 앉았다. 보윤은 안전벨트를 매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이제 어디로 갈까. 강남의 특급 호텔? 아니면 그의 집? 배가 부르니 나른함이 밀려왔고, 알코올 기운에 수치심도 무뎌졌다. 어디든 가서 다리를 벌리라면 벌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 부드러운 엔진음과 함께 차가 출발했다. 보윤은 창밖을 보며 멍하니 있었다. 그런데 차창 밖 풍경이 낯익었다. 화려한 네온사인이 줄어들고, 익숙한 주택가의 풍경이 나타났다. '어...?' 차가 멈춘 곳은 호텔이 아니었다. 보윤이 사는 낡은 빌라 앞이었다. 3. 안도와 혼란 엔진이 꺼지고 정적이 흘렀다. 보윤은 당황스러웠다. 안 내리고 뭐 하냐고 묻는 듯한 태인의 시선에, 그녀는 쭈뼛거리며 안전벨트를 풀었다. "......" 당연히 요구할 줄 알았던 섹스가 없었다. 몸값도 받지 않고 그냥 보내준다고? 집에 와서 하려는 건가? 집은 지저분해서 싫은데... 보윤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핸들을 톡톡 두드리던 태인이 입을 열었다. "들어가서 푹 쉬어." 그는 보윤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밥 먹이러 온 거니까. 다음에 컨디션 좋을 때 보자." 다정한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묘한 오만함이 깔려 있었다. "아, 그리고." 태인은 내리려는 보윤을 향해 검지 손가락을 까딱였다. "연락하면 바로바로 받고. 읽씹 같은 거 하지 말고. 알았지?" 웃고 있었지만 명령이었다. "네..." 보윤은 도망치듯 차에서 내렸다. 그녀가 빌라 현관으로 들어갈 때까지 태인의 차는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집 안에 들어와 문을 잠그고 나서야, 밖에서 웅장한 배기음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아..." 보윤은 현관문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당연히 강간당할 것이라 예상했다. 험한 꼴을 당할 각오로 따라갔다. 그런데 맛있는 밥만 얻어먹고, 안전하게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긴장이 풀리면서 안도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 안도감 뒤편으로, 기묘한 혼란스러움이 고개를 들었다. 박 차장과 윤 대리에게는 느낄 수 없었던, 태인만이 주는 이 기괴한 '친절'. 그것이 자신을 안심시켜 경계심을 허물고, 더 깊은 늪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사육의 과정임을 보윤은 미약하게 눈치 챘지만, 그저, 배부르고 등 따뜻한 현재에 감사하며 무거운 눈꺼풀을 닫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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