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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마약성 진통제


1. 수화기 너머 징- 징-. 답장을 보낸 지 1분도 채 되지 않아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액정에 뜬 이름 세 글자. [김지은] 보윤은 흠칫 놀라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받아야 할까. 지금 내 목소리는 정상일까. 망설임은 길었지만, 적막을 견디지 못한 손가락은 결국 통화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여보세요...?" ["언니! 안 자고 있었네? 톡 보니까 깨어있는 것 같아서 바로 전화했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지은의 목소리는 너무나 밝고 명랑했다. 과거의 어느 날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배신 따위는 저지르지 않았다는 듯 청아한 그 목소리. 그 평온함이 보윤의 무너진 마음을 건드리는 방아쇠가 되었다. "흐윽..." 참으려 입술을 깨물었지만, 목구멍을 타고 올라온 설움이 기어이 터져 나왔다. "흐으으... 흑... 지은아..." ["어? 언니? 왜 그래? 목소리가 왜 그래!"] 지은의 밝았던 톤이 순식간에 당황으로 바뀌었다. ["언니 울어? 무슨 일 있어?"] 범인의 심문 보윤은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오늘 하루 겪었던 수모들. 박 차장의 엉덩이 토닥임, 윤 대리의 비열한 웃음, 임 상무의 거친 수염과 돈 냄새. 그 모든 오물이 뒤섞인 감정이 눈물이 되어 쏟아져 나왔다. ["야, 성보윤! 말 좀 해봐! 누가 언니 괴롭혔어?"] 지은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어떤 새끼야? 회사 사람이야? 말해봐, 내가 지금 가서 다 엎어버릴라니까!"] 보윤은 울음 섞인 숨을 헐떡이며 지은의 말을 곱씹었다. 누가 나를 괴롭혔냐고? 너. 내 등 뒤에 칼을 꽂고, 내 남자를 뺏어 침대 위에서 뒹굴었던 바로 너. 가장 큰 가해자는 너잖아. 하지만 보윤은 그 말을 뱉을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을 걱정해 주는 척이라도 하는 사람은 세상에 오직 이 배신자 한 명뿐이었으니까. 위장의 이유 "아니야... 흑... 그런 거 아니야..." 보윤은 콧물을 훌쩍이며 거짓말을 지어냈다. "그냥... 일이 너무 힘들어서... 이번 프로젝트가 너무 안 풀려서..." ["아오, 진짜.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사람들이... 나를 너무 막 대해... 나는 진짜 열심히 하는데... 흐흑..." 반은 거짓이고, 반은 진실이었다. 그들이 자신을 막 대하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단지 업무가 아니라 몸을 막 대했을 뿐. 지은은 혀를 차며 맞장구를 쳤다. ["그 꼰대 새끼들 진짜 재수 없어. 언니가 착해서 만만하게 보는 거야. 똥 밟았다고 생각하고 잊어버려. 언니 잘못 하나도 없어."] 친구의 남자친구와 바람을 피우는 여자가, 몸을 파는 여자에게 건네는 기묘한 도덕적 위로. 그 모순적인 상황이 보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그 달콤한 위로는 지독하게 따뜻했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 ["안 되겠다. 언니 지금 혼자 있으면 계속 울기나 하지."] 지은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나 지금 택시 타고 갈게. 가서 술이나 한잔하자. 언니네 집 비번 그대로지?"] "어...?" 보윤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아, 아니야! 오지 마!" ["왜? 언니 위로해 주러 간다니까. 금방 가."] "안 돼... 집 꼴이 엉망이야... 청소도 하나도 안 해놨고..." 보윤은 급하게 거실을 둘러보았다. 바닥에 널브러진 가방, 쓰레기봉투에 처박힌 정액 묻은 옷가지들. 무엇보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몰골이 문제였다. 퉁퉁 부은 눈, 헝클어진 머리, 그리고 아직도 몸에서 풍기는 것만 같은 밤꽃 냄새와 돈 냄새. 지은에게 이 처참한 패배감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그녀 앞에서는 '피해자'일지언정 '창녀'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 너무 피곤해서... 그냥 약 먹고 자고 싶어... 오늘은 오지 마..." 추억의 장소 보윤의 완강한 거절에 지은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래...? 하긴, 피곤하겠다. 그럼 푹 쉬어."] 지은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시 밝은 목소리로 제안했다. ["그럼 이번 주말에 봐. 우리 옛날에 자주 가던 그 카페 있잖아. 홍대 쪽에."] "...아, 거기?" ["응. 거기 케이크 맛있잖아. 언니 단 거 먹으면 기분 좀 풀릴 거야.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어때?"] 옛날에 자주 가던 카페. 두 사람의 우정이 가장 순수했고, 보윤이 해주와 행복했던 시절, 셋이서도 자주 갔던 그곳. 이제는 모든 것이 망가져 버린 추억의 장소였지만, 보윤은 거절할 힘이 없었다. 아니, 주말에 만날 사람이 있다는 그 사실 하나가 썩은 동아줄처럼 그녀를 지탱하고 있었다. "응... 그래. 거기서 보자." ["알겠어. 얼른 자고, 내일 또 연락할게! 사랑해 언니!"] 뚝. 전화가 끊어졌다. 다시 찾아온 적막. 보윤은 뜨거워진 휴대폰을 가슴에 품고 침대로 쓰러졌다. '사랑해'라는 지은의 마지막 인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것은 지독한 독약이었지만, 죽어가는 보윤에게는 유일한 진통제였다. 2. 빛나는 포식자 주말의 홍대 거리는 활기로 가득했다. 보윤은 약속 장소인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나름대로 가장 단정하고 깔끔한 블라우스와 슬랙스를 입고 나왔지만, 창가 자리에 앉아 있는 지은을 보는 순간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언니! 여기야!" 지은이 보윤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샤넬 가방, 목덜미에서 반짝이는 반클리프 목걸이, 그리고 조명을 받은 듯 윤기 흐르는 피부까지. 대기업 취업을 포기하고 인플루언서가 되겠다며 떠났던 그녀는, 누가 봐도 성공한 삶을 살고 있는 화려한 포식자의 모습이었다. 환하게 웃는 지은의 얼굴 위로, 잊으려 했던 잔상이 겹쳐졌다. 자신의 전 남자친구인 해주의 허리 위에서, 땀에 젖은 채 교성을 지르던 그 쾌락에 찌든 표정. '저렇게 예쁜 얼굴로... 나를 짓밟고, 뺏어갔지.' 속에서 울컥하고 역겨움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보윤이 자리에 다가서기도 전에, 지은이 자리에서 일어나 달려와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 언니!" 와락. 따뜻한 체온과 함께 고급스럽고 향긋한 냄새가 훅 끼쳐왔다. 보윤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몸에서 나는(것 같은) 밤꽃 냄새와 돈 냄새가 들킬까 봐 움찔했지만, 지은의 부드러운 포옹은 그녀의 긴장한 근육을 순식간에 녹여버렸다.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을 '구멍'으로 취급할 때, 유일하게 '사람'으로 안아주는 온기. 보윤은 그 이율배반적인 안도감에 눈을 질끈 감았다. 가장 치열했던 시절 "언니 얼굴 반쪽 됐다. 회사 일이 많이 힘들어?" 자리에 앉은 지은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보윤을 살폈다. 보윤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다들 그렇지 뭐." "하여간 그놈의 회사가 문제야. 언니, 우리 옛날에 취업 스터디할 때 기억나?" 지은이 불쑥 과거의 이야기를 꺼냈다. "스터디룸 빌릴 돈 아끼겠다고 카페 구석에서 하루 종일 죽치고 있었잖아. 편의점 김밥으로 때우면서." "아... 그랬었지." "그때 언니 진짜 멋있었는데. 자소서 첨삭도 언니가 다 해주고, 모의 면접 봐줄 때도 언니가 짚어주는 것마다 다 나왔잖아." 지은은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나, 언니 아니었으면 서류 광탈이었을걸?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언니가 제일 똑똑하고 배울 점 많은 사람이었어." 보윤의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하게 울렸다. 회사에서는 '일머리 없는 년', '다리 벌리는 용도'로 취급받으며 바닥까지 떨어졌던 자존감이었다. 그런데 지은은 보윤을 '능력 있고 고마운 은인'으로 기억해주고 있었다. "그때 언니가 내 멘탈 지주였잖아. 나 울 때마다 언니가 다 받아주고." "...내가 그랬나." "그럼! 언니는 나한테 은인이야." 지은의 말속에 거짓은 없어 보였다. 보윤은 코끝이 시큰해졌다. 그래, 적어도 우리에게 그 시절만큼은 진심이었지. 지은의 칭찬 세례를 듣고 있으니, 자신이 '창녀'가 아니라, 다시 '좋은 언니'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향기로운 족쇄 한참 동안 옛날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우던 지은이, 테이블 아래에서 쇼핑백 하나를 쑥 내밀었다. "자, 이거." "어? 이게 뭐야?" "선물. 오다가 백화점 들렀는데, 딱 시향 하자마자 언니 생각나서 샀어." 보윤이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자, 평소 비싸서 엄두도 내지 못했던 고가의 니치 향수가 들어 있었다. "이거... 너무 비싼 거잖아." "에이, 우리 사이에 뭘 따져? 그냥 받아." 지은은 보윤의 손을 꼭 잡으며 속삭였다. "그 향수 이미지가 '우아함'이랑 '차분함'이래. 딱 언니잖아. 언니한테선 항상 이렇게 좋은 향기가 나야 해." 우아함. 그 단어가 보윤의 심장을 꿰뚫었다. 스스로를 더럽고 추잡한 오물덩어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은은 자신에게서 우아함을 찾아주었다. 이것은 남는 물건을 적선하는 것도, 대가를 바라는 뇌물도 아니었다. 오로지 자신을 아껴주는, 친구의 순수한 마음처럼 느껴졌다. "고마워... 진짜 잘 쓸게." 보윤의 눈에 물기가 어린 것을 본 지은이 환하게 웃었다. "울지 마, 바보야. 내가 더 잘할게." 달콤한 마취 카페를 나설 때, 보윤은 지갑을 꺼내려 했다. 그 안에는 임 상무에게 받은 피 묻은 돈 300만 원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지은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 말렸다. "아냐, 오늘은 내가 낼게. 오랜만에 만났는데 동생이 사야지. 나 돈 잘 벌잖아~" "그래도..." "됐어. 언니는 나중에 내가 힘든 일 있을 때, 그때 도와주면 돼. 알았지?" 지은은 윙크를 하며 계산대로 향했다. 지은과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보윤은 골목길 가로등 아래 멈춰 서서, 쇼핑백에서 향수를 꺼냈다. 치익-. 손목에 뿌린 향수를 목덜미와 귀 뒤에 문질렀다. 고급스럽고 깊은 꽃향기가 그녀를 감쌌다. 그 달콤한 향기는 뇌리에 박혀있던 임 상무의 밤꽃 냄새와, 지갑 속의 돈 냄새, 그리고 스스로에게서 느끼던 패배감의 악취를 완벽하게 덮어버렸다. 보윤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마치 마약에 취한 듯, 몽롱하고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지은이는 나쁜 애가 아니야." 해주와의 일은 실수였을 것이다. 젊은 남녀가 그럴 수도 있지. 중요한 건, 지금 내가 가장 비참할 때 내 곁을 지켜주는 건 지은이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유일한 내 편이야." 보윤은 향수 냄새에 취해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그것이 자신을 서서히 죽여갈 달콤한 마취제라는 것을 모른 채, 그녀는 스스로 지은이라는 족쇄를 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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