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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거짓된 위로라도


1. 흘러내리는 수치심 달칵. 도어록이 잠기는 소리와 함께 스위트룸의 육중한 문이 닫혔다. 복도는 적막했고, 카펫은 푹신했다. 하지만 보윤은 그 화려한 복도를 당당하게 걸을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 홀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인기척과 밝은 조명이 마치 취조실의 불빛처럼 두려웠다. 그녀는 옷깃을 여미고 도망치듯 비상구 문을 열고 들어갔다. 쾅. 철문이 닫히자 센서 등이 파르르 떨며 켜졌다가, 이내 꺼지기를 반복했다. 어둡고 서늘한 계단참 구석. 보윤은 벽에 기대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임 상무가 씻고 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기에, 그녀는 정액과 타액으로 범벅이 된 몸 위에 그대로 옷을 꿰입고 나와야 했다. 속옷은 애초에 입지 않았다. 블라우스와 스커트 안쪽의 맨살은 끔찍할 정도로 찝찝했다. 등과 엉덩이에 뿌려진 임 상무의 정액은 옷감과 피부 사이에서 말라비틀어지며 살을 당겼고, 움직일 때마다 쩍쩍거리는 불쾌한 마찰음을 냈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다리 사이였다. "으으..." 아까 질 안에 가득 고여있던 타인의 체액과 술, 그리고 그녀의 애액이 섞인 혼합물이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허벅지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스타킹도 없이 맨다리에 닿는 그 미지근하고 끈적한 액체의 감촉. 걸음을 뗄 때마다 허벅지 안쪽이 미끌거리며 자신이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보윤은 떨리는 손으로 가방 안주머니에 쑤셔 넣었던 것을 꺼냈다. 아까 스위트룸 바닥을 기어 다니며 주워 모았던 노란 종이 뭉치였다. 어두운 센서 등 아래서 본 지폐들의 몰골은 처참했다. 땀에 젖어 눅눅해졌고, 어떤 것은 구겨졌으며, 어떤 지폐에는 희뿌연 얼룩이 묻어 서로 달라붙어 있었다. 돈에서 비릿한 밤꽃 냄새와 쇠 냄새가 진동했다. 그녀는 홀린 듯이, 혹은 강박적으로 그 더러운 돈을 한 장 한 장 떼어내며 세어보기 시작했다. 사락, 쩍, 사락. "쉰아홉... 예순..." 5만 원권 61장. 총 305만 원이었다. 보윤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직장인 한 달 월급에 준하는 큰돈. 고작 두어 시간, 짐승처럼 유린당하고 수치심을 견뎌낸 대가치고는 너무나 컸고, 동시에 그녀가 평생 지켜온 존엄을 팔아치운 값치고는 너무나 초라했다. '내 몸값이... 고작 이거야?' 버리지 못한 쓰레기 욱, 하고 구역질이 치밀었다. 순간적으로 이 더러운 돈을 계단 아래로 뿌려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이딴 거 필요 없다고, 나는 창녀가 아니라고 소리치며 찢어발기고 싶었다. 하지만 보윤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로는 '버려야 해'라고 외치는데, 손가락은 돈뭉치를 꽉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305만 원. 이 돈이면 밀린 카드값을 메꿀 수 있었다. 백화점 쇼윈도에서 침만 삼키며 보던 명품 가방의 할부금을 낼 수 있었다. 현실의 무게가 자존심을 짓눌렀다. "...흐윽... 흑..." 보윤은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냈다.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는 대신, 정액이 묻어 얼룩진 지폐를 닦았다. 쓱쓱. 더러운 돈을 닦아서 지갑 깊숙한 곳에 소중하게 챙겨 넣는 자신의 모습. 강간당한 피해자가 아니라, 화대를 챙기는 철저한 직업여성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사실이 임 상무의 폭력보다 더 그녀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나... 진짜 창녀가 됐구나..." 보윤은 옷매무새를 대충 정리하고 호텔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화려한 서울의 밤거리가 눈에 들어왔지만, 그녀의 세상은 흑백이었다. 택시에 올라타 멍하니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을 때, 핸드폰 진동이 짧게 울렸다. 박 차장이었다. [박 차장] : 성 주임, 고생했어. 방금 상무님한테 연락받았는데 아주 대만족이라신다. 역시 우리 보윤이밖에 없어. 보윤은 무표정한 얼굴로 스크롤을 내렸다. [박 차장] : 이번 프로젝트 성사되면 다 네 덕분이야. 인사 고과도 확실하게 챙겨줄 테니까 걱정 말고. 푹 쉬고 내일 보자. '우리 보윤이', '인사 고과'. 박 차장이 던진 달콤한 미끼들. 하지만 보윤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격려가 아니라,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또다시 다리를 벌리라는 악마의 계약서나 다름없다는 것을. 보윤은 답장을 보낼 힘조차 없어 휴대폰을 가방에 던져 넣었다. 덜컹. 택시가 방지턱을 넘자, 다리 사이에서 고여있던 액체가 울컥하고 쏟아져 나와 맨살을 적셨다. 지갑 속의 305만 원과, 다리 사이의 정액. 오늘 밤 그녀가 얻은 것은 그 두 가지뿐이었다. 2. 오염된 안식처 띠리릭, 철컥. 도어록이 열리고, 보윤은 시체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익숙한 섬유유연제 향기와 고요한 공기가 그녀를 맞이했다. 항상 편안함을 주던 자신의 보금자리였지만, 오늘따라 이 적막이 숨 막히는 진공 상태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신발도 벗지 못한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몸에 걸친 모든 것이 혐오스러웠다. 임 상무의 정액이 말라붙어 뻣뻣해진 블라우스, 땀과 체액에 절어 눅눅해진 스커트. 그것들은 마치 방사능 폐기물처럼 그녀의 살을 썩어들어가게 하는 것 같았다. "......" 보윤은 미친 사람처럼 옷을 벗어 던졌다. 세탁 바구니에 넣는 것조차 역겨워, 그대로 쓰레기봉투에 처박아 묶어버렸다. 다시는 이 옷을 입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곧바로 욕실로 뛰어 들어가 샤워기를 틀었다. 쏴아아-. 뜨거운 물줄기가 쏟아졌지만, 뼛속까지 스며든 한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보윤은 샤워 타월로 피부가 벌겋게 벗겨질 때까지 몸을 문질렀다. 임 상무의 혀가 닿았던 목덜미와 입술, 그의 침이 범벅되었던 항문 주변, 그리고 끊임없이 유린당했던 다리 사이. "사라져... 제발 사라져..." 박박 문지를수록 쓰라림은 더해졌지만, 귓가에 맴도는 '찌걱'거리는 소리와 코끝에 맴도는 밤꽃 냄새는 씻겨나가지 않았다. 거울 속에 비친 여자는 깨끗해진 것이 아니라, 그저 껍데기만 남은 흉물처럼 보였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보윤은 불 꺼진 방 침대 구석에 웅크리고 앉았다.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침대 시트를 적셨다. 협탁 위에는 지갑과 휴대폰이 놓여 있었다. 지갑 속에는 그녀가 몸을 팔아 번 305만 원이 들어 있었다. 오늘 하루, 그녀는 성 주임이 아니었다. 박 차장에게는 접대용 상품이었고, 윤 대리에게는 조롱거리였으며, 임 상무에게는 배설을 받아내는 그릇이었다. 철저하게 도구로 소비된 하루. 지금 이 순간, 사무치게 그리운 것은 '사람의 온기'였다. 자신을 '구멍'이 아닌 '성보윤'이라는 인격체로 대해줄 누군가의 목소리가 미치도록 듣고 싶었다. 하지만 없었다. 가족에게는 이런 꼴을 보일 수 없었고, 회사 동료들은 모두 공범이었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한 고독감이 그녀를 압사시킬 듯 조여왔다. 무의식적으로 휴대폰 화면을 켰다. 카카오톡 아이콘에 빨간 숫자 '1'이 떠 있었다. [김지은] 어제 온 메시지였다. 보윤은 아직 읽지 않고 있었다. 손가락이 잠시 머뭇거렸지만, 지독한 외로움이 이성을 마비시켰다. 그녀는 채팅방을 열었다. [김지은] : 언니! 요즘 진짜 바쁜가 보네ㅠ 얼굴 까먹겠어~ 바쁜 일 끝나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내가 쏠게! 파이팅!^^ 귀여운 이모티콘과 함께 날아온 가식적인 응원. 보윤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번졌다. 보윤의 뇌리에 잊으려 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의 남자친구 위에서 허리를 흔들며 교성을 내지르던 지은의 모습. 그때 보윤은 지은이 더럽다고 생각했다. 친구의 남자를 뺏어 먹는, 발정 난 걸레 같은 년이라고 경멸했다. 하지만 지금은? '누가 누굴 욕해...' 돈 300만 원에 늙은 노인네에게 항문까지 내주고, 정액을 뒤집어쓴 채 돈을 주워 담은 자신. 사랑, 혹은 욕망이라는 핑계라도 있었던 지은보다, 돈 때문에 자존심을 팔아치운 자신이 훨씬 더 더럽고 추잡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지은은 보윤이 그 사실을 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른 채, 여전히 착한 동생 코스프레를 하며 자신을 기만하고 있었다. 속으로는 '병신 같은 년'이라며 비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평소 같았으면 역겨워서 무시했을 메시지였다. 하지만 지금 보윤에게는 그 '가짜 위로'조차 절실했다. 나를 기만하는 년이라도 좋으니, 나를 얕잡아 보는 년이라도 좋으니, 지금 당장 나한테 "다리 벌려"라고 명령하지 않는 사람과 대화하고 싶었다. 내가 아직 사람이라는 걸 확인받고 싶었다. 보윤의 손가락이 떨렸다. 자존심 따위는 이미 비상구 계단에서 돈을 셀 때 버렸다. 그녀는 천천히, 아주 비굴한 마음으로 답장을 입력했다. [지은아... 자?] 전송 버튼을 누르는 순간, 보윤은 눈을 감았다. 자신을 배신한 여자에게 위로를 구걸하는 꼴이라니. 그것은 오늘 밤 성보윤이 바닥을 뚫고 지하 깊은 곳까지 추락했다는 완벽한 증명이었다. 눈을 감은 채 전송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폰이 징- 하고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김지은] 화면에 띄워진 이름을 보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스스로 덫임을 알면서 걸어 들어가는 모양새가 한심하고 우스웠다. 보윤은 떨리는 손으로 녹색 전화기 버튼에 손을 가져다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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