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돌아온 용의 몸
“……!”
나는 비명을 지를 기력조차 없었다.
베이커스의 유일한 조력자는, 사실 황제의 심복이었다.
이것은 탈출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짜인, 또 다른 귀족들의 덫이었다.
* * *
내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고, 온몸이 차갑게 얼어붙는 것을 보며 발할라우젠이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냈다.
“후후후… 후후후후…”
그는 늙은 마법사의 주름진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교활하고 탐욕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부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녀 전하, 그리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을, 당신을 탐내고있는 재상 크리스토퍼나, 욕심 많은 다른 귀족들에게 팔아치우는 짓 따위… 절대로 하지 않을 테니. 하지만 이제부터 제 주시를 제대로 따라주셔야 합니다!”
그의 말은 안심시키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깟 하찮은 놈들’에게는 너를 넘기지 않겠다는, 너는 오직 더 위대하고 특별한 존재만이 가질 수 있는 보물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는 마차의 문을 닫으며, 밖에서 빗장을 걸어 잠갔다.
철컥- 하는 소리가, 내게 내려진 사형 선고처럼 울렸다.
“사실, 저는 그저… 폐하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그는 창문 너머로 나를 향해 마지막으로 섬뜩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황녀 전하께서는… 오직 폐하와 전하, 두 분만을 위한 ‘성배(聖杯)’가 되셔야 하니까요.”
‘성배’.
그 단어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것은 단순한 감금이 아니었다. 황제와 황태자, 그리고 황궁의 대마법사까지.
아니, 어쩌면 베이커스까지…!!!
이 제국의 가장 강력한 네 남자가 공모하여, 나를 영원히 자신들만의 소유물로 만들려는 끔찍한 계획의 일부였던 것이다.
‘혹시, 내가 결혼을 언급하거나. 그들의 통제로부터 벗어나려고 해서?’
그렇다!
베이커스의 희생은, 처음부터 그들의 계획을 위한 한낱 연극에 불과했다.
어쩌면 이들은, 내가 아름답다는 점 때문에 나를 정략적인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황가로 불러들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왜인지, 그들은 나를 보자 그런 원래의 계획 따위는 잊어버리고 그저 성적인 쾌락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만 사용하기 시작했다.
덜컥!
그때, 마차가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창문 없는 어두운 마차 안에서, 이제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모른 채 절망에 몸을 떨어야 했다.
‘이대로 뛰어내릴까?’
어둠 속에서 흔들리는 마차 안, 나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차라리 지금 여기서 뛰어내리는 게 낫겠지.
하지만 곧이어 절망적인 현실이 머릿속을 스쳤다. 여긴 황도 루칸의 중심부다.
설령 내가 마차에서 탈출한다 한들, 숨을 곳은 어차피 그 어디에도 없을 것이었다.
나의 절망을 비웃기라도 하듯, 마차는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나아갔다.
분명 황궁 전체에 비상경보가 울렸을 텐데도, 거대한 황도의 성문을 지키는 경비병들은 우리의 마차를 탐문하기는커녕, 오히려 길을 비켜주기까지 했다.
마치, 지엄한 황명에 의해 약속이라도 미리 된 것처럼.
모든 것이 짜여진 각본이었다.
나는 거대한 연극 무대 위의 주인공이자, 동시에 희생양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끌려갈 수만은 없었다.
나는 마차의 작은 창틈으로 바깥 풍경을 살폈다.
마차는 성문을 완전히 빠져나와, 인적이 드문 초원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발할라우젠은 내가 모든 것을 체념했다고 생각했는지, 마부석에서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었다.
‘지금이다!’
발할라우젠이 완전히 방심했을 거라고 여긴 찰나, 나는 마차 안의 모든 힘을 끌어모아 나무로 된 문을 어깨로 들이받았다.
쾅!
낡은 빗장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나는 달리는 마차에서 그대로 몸을 던졌다.
“으윽!”
몸이 거친 흙바닥 위로 나뒹굴었다. 어깨와 무릎에서 살이 찢겨 나가는 고통이 느껴졌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나는 초원 위를 구르고 또 굴렀다.
마차가 멈추는 소리, 그리고 뒤에서 들려오는 발할라우젠의 당황한 외침을 등 뒤로 한 채, 나는 오직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감히! 제 앞에서 무사히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으흐흐흐! 잡히기만 해보십시오! 베이커스가 황녀전하의 자궁에 질펀하게 싸지른 아기씨를 모두 걷어내고, 제 특별한 아기씨로 잔뜩 채워드리죠!”
내 등 뒤에서 발할라우젠의 분노에 찬 외침이 들려왔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그의 손에서 푸른빛의 마력이 피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곧 추격 마법이 날아올 것이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오오오오오오-!”
내가 도망치고 있는 방향, 드넓은 초원 너머의 울창한 숲속에서.
땅을 울리는 듯한 길고 장엄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단 한 마리의 소리가 아니었다.
수백, 수천 마리의 굶주린 짐승들이 일제히 내뿜는, 충성의 맹세와도 같은 함성이었다.
“저, 저것들은…!”
발할라우젠의 목소리가 경악으로 떨렸다.
숲의 경계선 너머로, 어둠 속에서 수천 개의 붉은 눈동자가 등불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거대한 검은 파도가 되어, 수천 마리의 와르그 떼가 드넓은 들판 위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목표는 발할라우젠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직 나, 자신들의 유일한 여왕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 압도적인 광경에, 제국의 대마법사 발할라우젠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했다.
그는 사색이 되어, 주문을 외우는 것조차 잊고 허둥지둥 마차를 돌려 왔던 길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는 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나를 향해 달려오는 나의 군대를 바라보았다.
“모두들… 나를 기다려주었구나!”
내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충신…. 너희들이야말로, 충신이로다.”
가장 먼저 내게 달려온 거대한 와르그의 머리를 쓰다듬자, 녀석은 거대한 몸집과는 어울리지 않게 강아지처럼 내 손을 핥짝거리며 꼬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이제 내 완벽한 복종 아래에 들어온 그들은, 더 이상 예전처럼 나를 무지성으로 겁탈하려는 흉포한 맹수가 아니었다.
오랜 시간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반가운 주인을 맞이하는 충직하고 사랑스러운 강아지들이었다.
나는 나의 군대, 나의 유일한 가족의 품 안에서,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느꼈다.
* * *
수천 마리의 와르그들에게 둘러싸여, 나는 잠시 잊고 있던 평화를 만끽했다.
녀석들은 나를 위해 주변을 철통같이 경계했고, 사냥해 온 먹이를 내 앞에 가져다 바쳤다. 하지만 동시에 걱정이 들기도 했다.
‘이만한 애들을 먹이려면… 막대한 식량이 들 텐데.’
수천 마리의 대식가들을 이끌고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그런 고민을 안고, 나는 충직한 와르그들의 품에 안겨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베이커스와의 약속 이후, 정확히 24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
다시 눈을 떴을 때, 내 시야는 하늘 높이 솟아 있었다.
드디어 다시, 드라고나이의 몸으로 빙의된 것이다.
빙의와 동시에, 내가 잠들어 있던 동안 드라고나이가 겪었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드라고나이는 효잔에게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가 델-코라 시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유일한 반려가 될지도 모르는 ’세라 하트소울’을 찾기 위해 여정을 떠났었다.
하지만 델-코라 시에서 흑룡 반드세우크와의 싸움 끝에 그녀를 놓쳐버렸고, 그 후로 애타게 근교를 찾아 헤매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엄청난 일을 저질러 버렸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니베리아 대공과 그의 두 호위 기사가 자신의 마법에 의해 아름다운 미소녀로 변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지만, TS된 미소녀에게는 전혀 흥미가 없었기에, 그들이 성 안의 고용인들에게 능욕당하던 그 상태 그대로 내버려두고는 다시 델-코라 시를 빠져나와 ‘세라’를 찾는 데에만 주력하고 있었다.
“크르르릉…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이냐, 나의 신부여…”
나는 드래곤의 흉측한 입을 빌려, 나 자신을 애타게 찾는 중얼거림을 내뱉었다.
바로 그 순간에, 나는 드라고나이에게 빙의가 되었던 것이었다!
나는 거대한 용의 몸으로 하늘을 선회하며, 앞으로의 계획을 세웠다.
일단 어떻게 할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드라고나이와 한 몸, 즉 그의 영혼의 일부가
빙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그가 나중에 내 본체인 ‘세라’를 만났을 때, 함부로 겁탈하지 않을 것이다.
드라고나이의 기억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의 성욕은 다른 드래곤들처럼 아주 왕성했다. 드래곤은 인간과 달리 24시간 내내 섹스를 해도 지치지 않고, 365일 내내 정기만 빨아먹으며 살아갈 수도 있는 종족이었다.
그런 그가 만약에 나를 보고 ‘신부’로 맞아들인 다음, 죽도록 페니스질을 해댄다면?
나는 365일 내내 여체에 갇혀서, 지옥 같은 섹스만 경험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황궁의 삶보다 더 끔찍한 결말이었다.
‘우선은… 그의 권솔들에게 알려야 해.’
그래! 드라고나이에게 직접 말하기 전에, 그의 가장 가까운 측근인 효잔과 큐브에게 내가 그의 몸에 빙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서, 그들이 증인이 되어주게 만들어야 한다.
그들이 드라고나이에게 ‘저 여자는 단순한 인간이 아닙니다. 당신의 또 다른 일부입니다’라고 말해준다면, 그 역시 내 몸을 함부로 능욕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 다음에 드라고나이와 정식으로 접촉해서, 그의 안전한 보호를 받으며 이세계 날먹… 아니, 본격적인 드래곤 수저가 되어 꿀을 빠는 것이다!
계획은 완벽했다.
나는 하늘 아래에서 나를 애타게 찾고 있을 효잔과 큐브의 위치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이 거대한 용의 감각이라면, 그들을 찾는 것은 시간문제일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