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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공작과의 위험한 거래 (3)


그의 믿음직한 보이스가 귓가를 후렸다. 하지만 그의 손이 내 손을 잡는 그 순간, 나는 알았다. 그의 탈출은 단순한 계획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뒤틀린 사랑이, 제국의 어둠을 뚫고 나아가는 여정의 시작이었다. 그의 손가락이 꼼지락거리면서 내 손가락 사이로 스며들 때, 나는 앞으로 내가 온전히 의지해야 할 사내의 정액이 속 안에서 흘러넘치는 게 느껴졌다. 뜨겁고, 끈적한 그 잔향이, 우리의 미래를 예고하듯 내 몸을 물들였다. * * * 새벽의 여명이 창틈으로 수줍은 빛을 내뿜으며 스며들 무렵, 베이커스는 마침내 내게서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에는 밤사이의 황홀했던 흔적 대신, 다시 제국의 검성으로서의 비장함과 결의가 서려 있었다. “이제 시작할 시간입니다, 황녀 저하.” 그는 미리 준비해 둔 듯, 방 한쪽 구석에서 투박한 여행자 복장과 검은 망토를 꺼내 내게 건넸다. 화려한 실크 잠옷을 벗고 거친 천으로 된 옷을 입자, 비로소 내가 황궁을 떠난다는 사실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계획은 이렇습니다.” 그는 지도를 펼쳐 보이며, 낮은 목소리로 브리핑을 연달아 시작했다. 그의 계획은 대담하고도 치밀했다. 마침내 시작된 황궁 탈출 계획! “우리는 버려진 별궁을 통해, 황궁의 식자재를 운반하는 하인들 사이에 섞여 갈 것입니다. 이 별궁 앞에는, 그 하인들이 지나가는 경로가 있습니다. 지금 시간은 교대 근무로 경비가 가장 허술해지는 때! 통과하기는 안성맞춤인 시간이죠. 그 다음, 정문을 통과하는 대신, 저하께서 예전에 이용했던 도적 길드로 이어졌던 그 지하 수로처럼, 황궁의 또 다른 입구를 이용할 것입니다. 그곳은 평상시엔 황궁의 쓰레기를 처리하는 곳으로 위장되어 있어, 아는 자가 거의 없죠.” 잠시 후, 그가 황궁 외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수로의 출구에는 제가 미리 매수해 둔, 저의 충직한 부하 한 명이 마차를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가 우리가 황도를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도울 것입니다.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 등 뒤에서 떨어지시면 안 됩니다.” 그의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제국에 대한 반역! 그것은 자신과 가문의 모든 것을 거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이었다. 하지만 그는 오직 나를 위해, 그 모든 것을 기꺼이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는 밖으로 나섰다. 희미한 새벽빛 아래, 황궁은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우리의 발소리는 안개 속으로 조용히 스며들었다. 거대한 황금 새장을 벗어나기 위한, 위험하고도 필사적인 탈출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 첫 번째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우리는 버려진 별궁의 어둠을 틈타, 막 교대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하인들의 행렬에 자연스럽게 섞여들었다. 베이커스는 음식물 쓰레기를 담는 거대한 통을 끄는 인부로, 나는 그의 옆에서 허드렛일을 돕는 하녀로 완벽하게 위장했다. 우리가 식자재 창고를 지나 중앙 주방으로 향하는 넓은 통로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새벽 일찍부터 일을 시작해 피곤에 절어 있던 몇몇 하인들이, 코를 킁킁거리며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어이, 이거… 무슨 냄새 안 나나?” “킁킁… 그러게. 어디서 진한 밤꽃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한 늙은 하인이 음흉하게 웃으며, 주변의 젊은 하녀들을 훑어보았다. “크크큭, 혹시 어젯밤에 어떤 년이 남정네랑 뜨거운 밤이라도 보낸 모양이지? 냄새가 아주 진동을 하는구만. 이 새벽부터 발정 난 암캐가 누군가?” 그 저속한 말에 주변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순간, 내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들이 말하는 ‘밤꽃 냄새’는, 바로 내 몸에서 풍겨 나오는 것이었다. 밤새 베이커스와 나눈 정사의 흔적, 그의 정액 냄새가 씻을 새도 없이 내 몸과 옷에 배어 있었던 것이다. 시작부터 위기였다. 내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는 것을 본 베이커스가, 나를 자신의 등 뒤로 슬쩍 숨기며 거대한 쓰레기통을 앞으로 밀었다. 그리고는 일부러 코를 막는 시늉을 하며, 최대한 걸걸하고 천박한 목소리로 외쳤다. “에잇, 퉤! 이놈의 음식물 쓰레기 냄새는 언제 맡아도 역겹군! 어서 치워버리고 막걸리나 한 사발 해야지! 모두들 꾸물거리지 말고 움직여!” 그의 능청스러운 연기와, 실제로 쓰레기통에서 풍겨 나오는 역한 냄새 덕분이었을까. 하인들은 잠시 투덜거리더니, 이내 흥미를 잃고 각자의 일터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베이커스의 넓은 등 뒤에 숨어, 간신히 한숨을 돌렸다. 하지만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이 냄새가 앞으로 또 어떤 위기를 불러올지 알 수 없었다. 탈출은 시작부터 삐걱거리고 있었다. * * * 첫 번째 위기를 간신히 넘겼지만, 곧이어 예상치 못한 근본적인 문제가 드러났다. 그것은 바로 나의 ‘외모’였다. 나는 탈출을 위해, 일부러 낡고 허름한 하녀 복장을 입고 얼굴에는 검댕까지 묻혔다. 머리는 되는대로 틀어 올려 투박한 두건 안으로 감췄다. 아무리 봐도 영락없는 시골 출신의 하녀여야 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아무리 내가 하인으로 분장을 하고 꾀죄죄하게 보이려 해도, 내 본연의 미모는 감출 수가 없었다. 오히려 허름한 옷차림은 내 새하얀 피부와 완벽한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고, 얼굴에 묻은 검댕은 백옥 같은 피부 위에 내려앉은 한 점 흑요석처럼 기묘한 매력을 발산했다. 두건 아래로 흘러내린 몇 가닥의 머리카락마저도, 달빛 아래에서는 은실처럼 빛났다. 결과적으로 나는 ‘꾀죄죄한 하녀’가 아니라, ’귀족 아가씨의 하녀 코스프레’처럼 보였다. 우리가 지나갈 때마다, 마주치는 모든 남자들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잠이 덜 깬 병사들은 눈을 비비며 나를 쳐다봤고, 무거운 짐을 나르던 인부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넋을 잃고 나를 바라보았다. 심지어는 고위 귀족의 마차를 몰던 마부조차, 고삐를 놓칠 뻔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시선에 인 것은 평범한 호기심 따위가 아니었다. 본능적인 이끌림! 그리고 ‘저런 여자가 왜 저런 곳에 있지?’라는 강렬한 의구심이 담겨 있었다. 베이커스는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더욱 필사적으로 나를 자신의 등 뒤로 감추려 애썼다. 그는 거의 나를 끌어안다시피 한 채,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인적이 드문 곳을 향해 나아갔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우리가 막 황궁의 후문 쪽으로 향하는 복도를 돌았을 때, 정면에서 순찰을 돌던 근위대장과 마주치고 말았다. 그는 황궁의 모든 인원을 꿰고 있기로 유명한, 깐깐하고 눈썰미 좋은 자였다. 그의 날카로운 눈이, 베이커스의 등 뒤에 숨어 있는 나를 정확히 포착했다. 그리고 그의 미간이 의심으로 깊게 찌푸려졌다. “거기, 멈춰라.” 근위대장의 낮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심장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내 앞을 막아선 베이커스의 어깨가 꿈틀했다. 그의 선택은,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었다. 콰직-! 베이커스는 들고 있던 거대한 쓰레기통을 그대로 근위대장의 얼굴을 향해 집어 던졌다. “크헉!” 근위대장은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썩은 음식물과 함께 뒤로 나자빠졌다. 주변의 병사들이 당황하여 검을 뽑으려 하기도 전에, 베이커스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선택은 협상도, 변명도 아니었다. 오직, 압도적인 무력에 의한 정면 돌파. “황녀 저하! 뛰십시오!” 그는 내 손목을 낚아채고, 무서운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위장은 무의미했다. 그의 등 뒤에서, 분노한 근위병들의 고함 소리와 경보를 울리는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반역이다! 베이커스 공작이 반역을 일으켰다!” “황녀님을 납치하고 있다! 당장 잡아라!” 베이커스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한 손으로는 나를 이끌고, 다른 한 손으로는 허리춤에서 뽑아 든 단검으로 앞을 가로막는 병사들의 목을 망설임 없이 베어버렸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고, 비명이 복도를 채웠다. 제국의 검성이, 마침내 자신의 검을 제국을 향해 겨눈 순간이었다. 그는 더 이상 황궁의 비밀스러운 경로들을 찾지 않았다. 오직 최단 거리, 지하 수로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을 향해,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부수며 돌진했다. 이제 우리의 탈출은, 조용한 잠입 작전이 아닌, 피와 비명이 난무하는 핏빛 돌파 작전이 되어 있었다. “후후후! 내가 그리 쉽사리 잡혀줄까보냐!!!” 베이커스의 포효와 함께, 우리는 피와 비명이 난무하는 복도를 미친 듯이 질주했다. 그의 등 뒤로 황궁 전체가 깨어나는 듯한 소란이 따라붙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마침내, 악취가 진동하는 지하 수로의 철문 앞에 도달했다. 베이커스는 육중한 철문을 단숨에 뜯어내듯 열어젖혔다. 어둡고 축축한 통로의 입구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황녀 저하! 먼저 피하십시오!” 그가 나를 통로 안으로 밀어 넣으며, 자신은 입구에 버티고 섰다. 뒤쫓아오는 근위병들의 횃불 빛이 복도 저편에서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저는 이곳에서 잠시 시간을 끌겠습니다! 통로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제 부하와 함께 말을 달리십시오! 곧, 저도 그리로 합류하여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그의 등은 산처럼 굳건했다. 나는 그의 결의에 찬 눈을 보며, 망설일 시간이 없음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둠 속으로, 수로를 따라 필사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통로 끝에서 희미한 빛이 보였고, 약속대로 낡은 마차 한 대와 마부 복장을 한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오, 황녀 전하아아! 공작님의 명이십니다! 어서!” 마부가 나를 재빨리 마차 안으로 이끌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마부에게 물었다. “고맙습니다. 공작님의 충직한 부하시군요. 성함이…?” 그 순간, 마부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낡은 모자를 벗었다. 희미한 달빛 아래 드러난 그의 얼굴! 그것은 베이커스의 부하가 아니었다. 뾰족한 모자, 길고 하얀 수염, 그리고 장난기 어리면서도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깊은 눈동자. 그는 황궁의 모든 마법을 총괄하는 대마법사이자, 황제의 가장 오랜 친구. 궁정 마법사, 발할라우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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