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지켜야 할 그림자
로웬이 떠나간 자리, 홀로 남은 리디아는 손끝조차 까딱할 힘 없이 소파 위에 널부러져 있었다. 노을이 완전히 진 창밖으로 어스름한 빛이 희미하게 리디아의 몸을 비췄다.
머리는 소파 팔걸이에 거칠게 젖혀졌고, 단정히 묶어 두었던 코코아빛 머리카락은 풀어진 채, 젖은 목덜미와 쇄골 위에 무질서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땀에 젖은 살갗은 은은한 광택을 띠었고, 그녀는 어깨가 떨리며 가느다란 숨을 몰아쉬었다.
리디아의 눈은 초점을 잃은 채 천장을 향해 멍하니 머물렀다. '내가 왜...' 의식조차 흐릿한 틈을 타, 짧은 의문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자 공허한 눈동자 위로 빠르게 눈물이 차올랐다. 내가 왜. 내가 왜... 진정되고 있던 숨결이 다시 거칠어지며 빠르게 가슴이 오르내렸다. 숨죽인 흐느낌이 억누르려 해도 새어 나왔다.
"끕...흐으, 흑...흡..."
아무도 없는데, 리디아는 자신도 모르게 울음을 참으려 했다. 울고 싶지 않았다. 울어버리면, 불쌍한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는 게 될까 봐.
그러나 한번 터진 울음은 참기 힘들었다. 뜨거운 눈물이 목덜미를 적시고, 리디아의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벌어진 살점 사이로는 여전히 묽고 하얀 정액이 끈적하게 흘러내렸다. 끈질기게.
[71. 지켜야 할 그림자]
어두워진 저녁, 클라라가 로웬의 서재 앞을 지나는 길이었다.
"주인님... 지금까지 어디 계셨어요..."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 서재 안에서 분명 이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와는 다른 간드러진 말투로.
"아...거기는...오늘은 안되는데..."
"왜? 이걸 원해서 찾은 게 아니었나?"
클라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로웬과 이오가...누가 들어도 알 수 있을 만큼 가까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이오의 눈앞이 흐려졌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의 귀로 들리는 음성들은 불길한 예감을 확신으로 만들고 있었다.
"하아...이오..."
문틈 사이로 로웬의 거친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로웬의 목소리에 담긴 욕망이 클라라의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무언가,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서재 안의 소리는 점점 더 격렬해지고 있었다.
"아앙...으응!"
이오의 신음이 터져나오자, 클라라는 떨리는 숨을 고르며 서재 문을 다급하게 두드렸다.
"주인님, 클라라입니다. 급한 용무가 있어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최대한 침착하게 말하려 했지만, 말끝에서 미세한 떨림이 섞여 나왔다. 클라라의 목소리에, 문 너머에서 들려오던 모든 소리가 일순 멈췄다. 잠시간의 정적이 흐르고, 로웬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기다리게. 나도 급해서 말이야."
클라라는 순간 이를 악물었다. 서재 안에서 벌어질 일들을 상상하자 불안과 분노가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손목이 떨릴 만큼 강하게 주먹을 쥐자,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죄송합니다만, 주인님. 하녀장님께서 이오를 찾으십니다."
문 너머로 로웬의 한숨이 들려오고 뒤이어 허락이 떨어졌다.
"들어와."
로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클라라가 조금 다급한 몸짓으로 서재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가늘게 떨리던 숨을 삼켰다. 이오의 하녀복은 온통 흐트러져 어깨가 드러나 있었고, 치맛자락은 급하게 정돈한 듯 구겨져 주름이 깊게 패여 있었다. 그 어지러운 모습 속, 이오의 입술은 선명하게 붉어져 부풀어 있었고, 드러난 목덜미 위로 새겨진 붉은 자국은 선명했다. 그곳에서 로웬만이 멀끔한 차림새로 서서, 차분한 표정으로 클라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클라라는 로웬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도 잊었다. 그저 경직된 얼굴이 화가 난 표정으로 바뀌는 걸 간신히 참기에 바빴다.
"그래. 마거릿이 부른다고? 데려가. 여기 있으니까."
로웬이 이오의 등을 살짝 밀자 이오의 뾰로통하게 삐쭉였다. 마치 연인에게 애교를 부리는 듯한 태도에 클라라의 입매가 더욱 굳어졌다.
이오가 느릿한 걸음으로 클라라에게 다가서자, 클라라는 이오의 손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실례하겠습니다."
반쯤 문밖으로 상체를 기울여 작은 목례를 남긴 클라라는 거의 뛰다시피 서재를 빠져나왔다. 평소라면 정제된 걸음걸이와 단정한 태도를 잃지 않았을 그녀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굳게 다문 입술과 팽팽하게 당겨진 어깨가 불안한 심경을 여실히 드러냈다. 뒤에서 로웬의 시선이 따갑게 꽂히는 걸 느꼈지만, 클라라는 오직 복도 저편만을 바라보며 무심히 발을 옮겼다.
"언니. 내가 거기 있던 건 어떻게 안 거야? 그리고, 이 시간에 하녀장님이 나를 왜 불러?"
철없이 투덜대는 이오의 말에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던 클라라의 손아귀가 강해졌다. 마치 무언가를 붙들지 않으면 무너질 것처럼. 숨을 고르며 말없이 걸어가던 클라라는 복도 끝자락에 다다르자 이오를 빙 둘러세웠다.
"이오."
조용히 부르는 목소리에는 서늘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내가 백작님과 절대 단둘이 있지 말라고 했잖아. 조심하라는 말 이해 못한 거야?"
클라라의 눈썹이 깊게 찌푸려지고, 미간에는 짙은 주름이 생겼다. 그녀의 날 선 음성에 이오가 움찔하고 고개를 움츠렸다.
"언니..."
클라라의 가슴이 눈에 띄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침묵으로 이어지는 대치에 이오는 침을 꿀꺽 삼키며 언니의 눈치를 보았다. 조용한 복도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오가 두 손을 불안하게 꼬아 쥐었다. 넓은 복도가 감옥처럼 좁게 느껴졌다.
"언니가 잘 몰라서 그래. 주인님은 생각보다 좋은 분이셔. 나에게 다정하게 대해주시고... "
"왜 항상 내 말을 듣지 않는 거야. 왜!"
클라라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단단한 쇳소리처럼 복도에 울려 퍼졌다. 그녀는 눈앞의 이오가 자신의 말보다 로웬을 더 신뢰한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추악한 성정을 가진 괴물이었고, 언제든지 가식을 부릴 줄 아는 이였다.
"그가 꾀를 부린 거야. 넌 이용당하는 거라고."
이어지는 말에, 이오가 울컥, 눈을 부릅뜨며 입술을 다물었다. 맑은 올리브색 눈동자 위로 눈물이 고였다.
"아니야. 아무것도 모르면서... 내가 왜 언니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해?
이오의 목소리는 점점 더 낮고 가늘어졌다. 그녀는 떨리는 턱 끝을 부여잡으며 억지로 울음을 삼켰다. 서툴게 눈가를 문지르다가 다시 손을 내리자, 눈두덩이 벌겋게 부어올랐다.
"나도 이제 성인이야. 내 일은 내가 판단할 수 있어."
"니가 어른으로써 판단한 게 이거야?"
단호하고 싸늘한 클라라의 반문에, 이오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숨이 거칠게 오르내리는 걸 감추려 했지만, 부풀어오른 가슴은 작은 체구를 배반하듯 크게 들썩였다. 그녀는 양손을 꽉 움켜잡으며 눈물에 젖은 눈은 더 크게 치켜떴다.
"왜 말을 그렇게 해?! 나는, 나는 언니를 위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터질 듯 쏟아내는 이오의 목소리에, 클라라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말들이 뒤엉켰지만, 결국 입 밖으로 튀어나온 건 가장 가혹한 문장이었다.
"...너가 정말로 날 위했다면 이 곳에 오면 안됐어."
충동적으로 튀어나온 말에 클라라가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숨소리마저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오는 얼어붙은 듯 클라라를 바라보다가, 눈썹을 떨며 힘겹게 그녀를 불렀다.
"언니...?"
작고 떨리는 목소리. 클라라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지친 듯 힘없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다시는...그자에게 가까이 가지마.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야."
"마지막? 지금 이거 협박이야?"
이오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억눌렀던 분노와 서러움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려는 듯, 그녀가 이를 악문 채 외쳤다.
"왜...? 나는 언니 말만 항상 들어야 돼? 언니 뒤만 졸졸 따라다녀야 해?! 왜!!"
손짓은 허공을 마구 휘저었고, 어깨가 심하게 흔들렸다. 볼을 타고 흐른 눈물은 하녀복 깃을 적셔 작은 얼룩을 남겼다.
"왜 맨날 언니 마음대로 끌고가려 하는데! 내가 무슨, 무슨 그림자냐고!"
창 밖으로 비치는 달빛이 이오의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을 비추었다. 두 자매의 눈빛은 이제 서로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상태로 엇갈리고 있었다. 하얀 달빛 아래 이오의 갈색 머릿칼과 클라라의 금발은 흐릿하게 빛을 잃고 있었다.
"이오, 언니 말 들어."
클라라가 떨리는 손으로 이오의 어깨를 잡으려 하자, 이오는 몸을 비틀어 거칠게 그녀의 손을 밀쳐냈다. 이오의 올리브색 눈동자에는 깊은 상처와 배신감이 서려 있었다.
"더는... 더는 말하고 싶지 않아. 언니는 절대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거야."
이오는 몸을 홱 돌려 복도 끝 계단을 향해 달려갔다. 치맛자락이 복도에 부딪히며 가벼운 소리를 냈고, 울먹이는 숨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클라라는 빈 복도에 홀로 남았다. 두 다리가 풀려 벽에 몸을 기댔고, 그대로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차가운 석벽의 온기가 등을 타고 스며들었다.
하늘은 온통 칠흑 같았고, 멀리서 부엉이 소리 하나가 길게 울렸다.
클라라는 무릎을 끌어안고 머리를 숙였다.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로웬의 실체를 말하려면, 자신의 상처까지도 드러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오에게 그런 무거운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이오 앞에서는 언제나 강하고 변함없는 언니이고 싶었다.
그렇게 숨죽인 시간이 흘렀다. 멀리서 가죽 구두굽이 복도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클라라는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다. 복도 저편에서 다가오는 그림자는 점점 또렷해졌다.
"하녀장에게 간 것이 아니었나?"
"주인님..."
클라라는 급히 눈가를 닦으며 일어섰다. 어지럽게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서둘러 다듬는 동안, 로웬은 그녀 앞에 서서 미소를 지었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미소였다.
"용무는 끝난 듯 한데, 시간 있지? 누가 내 즐거운 시간을 방해해서 말이야. 대신 놀아줄 사람이 필요한데."
창밖으로 구름이 달을 가렸다. 복도는 한층 더 어두워졌고, 로웬의 그림자가 클라라를 완전히 삼켰다. 복도를 울리던 부엉이 소리마저 뚝 끊겼다. 세상의 소리가 끊긴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