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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클라라의 사정


"하녀장님, 다녀오겠습니다." 클라라의 목소리에 하녀장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깊은 주름진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아, 오늘이 그 날이군." 하녀장의 목소리는 묵직했다. 그녀는 클라라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매달 말일마다, 월급이 나오고 나면 꼭 찾아오는 그 날이었으니까. 무심한 듯 덤덤한 목소리였지만, 그녀가 지금까지 클라라에게 보여준 태도는 결코 무관심이 아니었다. 도박으로 가정을 파괴하고 도망간 아버지가 남긴 빚. 그리고 그 빚으로 인해 고통받는 클라라와 그녀의 어린 동생. 하녀장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저택에서 일하며 보아온 수많은 사연들 중에서도, 클라라의 이야기는 특히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조심히 다녀오거라."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안에는 깊은 위로와 걱정이 담겨있었다. 클라라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방을 나섰다. 그녀의 가방 안에는 어젯밤 받은 월급이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24. 클라라의 사정] 이른 아침의 부드러운 햇살이 백작 저택의 정원을 감싸고 있었지만, 클라라의 마음은 여전히 차갑고 무거웠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녀는 아버지가 남긴 짐들을 하나씩 치워나가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되새겼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클라라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풍경들이 지나쳤다. 5년 전, 처음 이 길을 달렸을 때의 두려움과 막막함이 다시 떠올랐다. 그때의 자신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의 자신에게는 이 길이 너무나도 익숙했다. 흔들리는 마차 안,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5년 전 처음 이 길을 달렸을 때의 두려움과 절망을 고스란히 불러일으켰다. 그때의 눈물과 공포는 지금은 익숙한 그림자처럼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마차가 멈춘 곳은 한때 따스한 추억이 가득했던 고향 마을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마을조차 고리대금업자의 음침한 그림자와 빚의 무게에 짓눌려 있었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걷던 클라라는, 낡은 간판 아래 퀴퀴한 냄새와 함께 존 도우라는 이름의 늙은 고리대금업자와 마주쳤다. "아, 클라라 아가씨가 오셨구먼." 문을 열자,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존 도우, 늙은 고리대금업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번 달 상환금 가져왔습니다." 클라라는 가방에서 조심스레 꺼낸 봉투를 내밀었다. 지난 5년 동안 매달 하녀 월급의 대부분을 쏟아부었지만, 빚의 원금은 한 치의 변화도 없이 그대로였다. "음... 그래, 그래." 존은 느릿하게 돈을 세며, 클라라의 옅은 연둣빛 눈동자와 군더더기 없는 몸매를 은밀하게 훑었다. "그나저나 아가씨, 백작가에서 일한다 했지?" 그의 말은 마치 아무렇지 않게 던져진 것 같았지만, 그 속에는 충분히 의도가 있었다. "거기야 값나가는 물건이 많을 텐데... 뭐 하나만 슬쩍해와도 이 빚은 다 갚을 수 있을 텐데 말이야." 클라라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느꼈다. 존의 말을 들으며, 그녀의 머릿속은 하얘졌다. 그의 말은 계속되었다. "얼마 전에도 어떤 하녀가 주인집 은수저 하나로 3개월 치를 한번에 갚았다더군." 그의 눈빛이 더욱 음흉해졌다. 클라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다음 달에도 오겠습니다." 차갑게 말을 마친 클라라는 발걸음을 돌렸다. 등 뒤에서 존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밖으로 나온 클라라는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것은 그녀가 가진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 비가 올 듯한 흐린 하늘 아래, 클라라는 한 손에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퍼지는 구름 속에서 차가운 공기가 숨을 쉴 때마다 그녀의 목덜미를 스쳤다. 그곳은 어린 시절의 기억이 깃든 곳이었다. 그러나 그 기억들이 이제는 점차 무겁고 아픈 짐처럼 느껴졌다. 낡은 집에 도착해 삐걱거리는 문을 열자, 익숙한 공기가 그녀를 맞이했다. 오늘따라 어쩐지 그 안에는 예전보다 조금 더 따스한 온기가 감돌았다. 그리고 그 온기의 근원은 문 앞에서 환한 미소로 서 있던 한 존재였다. "언니!" 이오였다. 길고 짙은 갈색의 생머리가 햇살 아래 차분하게 빛나며, 따뜻한 올리브빛 눈동자가 순수한 기쁨과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이오는 두 팔을 활짝 벌려 달려와 클라라의 피곤한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드디어 왔네! 언니 보고 싶었어!" 그 한마디에, 백작 저택의 차가운 현실 속에서 잊혀졌던 감정들이 서서히 피어오르는 듯했다. 그러나 이오는 고개를 들며 잔잔한 걱정을 담은 목소리로 물으며 입술을 조금 삐쭉였다. "근데,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또 밥 제대로 안 먹었지?" 클라라는 동생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짊어져야 했던 무거운 책임과 고통을 잠시 잊은 듯 미소를 지었다. "아니야, 잘 먹었어." 그러나 이오는 그녀의 대답을 믿지 않는다는 듯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거짓말. 언니 얼굴이 피곤해 보여." 이오는 손을 뻗어 클라라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작은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마치 햇살처럼 따뜻했다. "괜찮아, 이오. 나는 그냥 조금 피곤할 뿐이야." "흥, 맨날 그렇게 말하잖아. 근데 이번엔 더 피곤해 보여. 그냥... 너무 많이 버티는 것 같아." 클라라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이오는 누구보다도 빠르게 그녀의 상태를 알아채곤 했다. 하지만, 클라라는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애써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일이면 나아질 거야." 그러자 이오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팔짱을 꼈다. "흠, 그래...?" 미심쩍은 표정으로 여전히 입술을 삐쭉이다가 이내 표정을 풀고 밝게 미소짓는다. "뭐, 괜찮아. 어차피 언니는 내 감시 아래 있을 거니까!" 그녀는 손을 번쩍 들며 선언하듯 말했다. "오늘부터 언니는 내 밥을 꼬박꼬박 먹어야 하고, 많이 쉬어야 해! 그리고!" 이오는 클라라의 손을 힘껏 잡아끌며 식탁 의자로 이끌었다. "난 오늘 언니랑 밤새 얘기할 거야! 그러면 피곤한 거 다 날아갈걸?"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한낮의 햇살처럼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 따스함에, 클라라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백작의 저택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감정. 지친 몸과 마음이, 이오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조금씩 편안해지는 듯했다. "그래, 그러자." 이오의 손을 잡고 따라가는 동안, 클라라는 비로소 실감했다. 그녀에게 '휴가'란, 이곳에서 이오와 함께하는 시간이 아닐까 하고. "언니, 잠깐 기다려. 내가 차 좀 내올게." "아, 괜찮아. 내가 할게." 클라라는 고개를 돌리며 말을 하려 했지만, 이오는 고개를 흔들며 클라라의 손목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언니는 쉬어야 돼. 내가 할 거니까." 클라라는 잠시 이오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오가 차를 내오는 동안, 클라라는 잠시 식탁의자에 앉아 여유를 찾으려 했다. "아 참! 언니, 나도 백작가에서 일할래!" 주방에서 들려오는 이오의 말에 클라라는 순간적으로 숨을 멈추고, 이오를 바라보았다. 동생의 올리브빛 눈동자는 기대에 차 반짝이고 있었다. "이오… 무슨 말이야?" "나도 하녀로 들어갈 거라고! 백작가에서 새로운 하녀를 뽑는다면서? 언니랑 같이 일하면 빚도 금방 갚을 수 있을 거야! 언니가 추천 좀 해줘 응?" 이오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웃을 때마다 마치 따스한 햇살이 방 안에 스며드는 듯했다. 하지만 그 따스함은, 클라라의 가슴속에서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순간, 손끝이 떨렸다. 그녀는 무언가를 말해야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백작가. 그곳은 이오 같은 아이가 있어선 안 되는 곳이었다. 클라라는 간신히 입술을 떼며 조용히 속삭였다. "안 돼, 이오." "왜? 언니 힘들잖아. 나도 도울 수 있어." "안 돼." 이오의 미소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언니…" "이오, 제발." 클라라는 두 손을 꽉 쥐었다. 차가운 식탁 표면이 손끝을 파고들었지만, 그보다 더한 불안이 가슴을 죄어왔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괴물...이 있어." 이오가 눈을 깜빡였다. "뭐?" "백작가는 괴물 같은 곳이야. 이오, 네가 감당할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이오는 멈칫했다. 그녀는 다 컸다. 예전처럼 단순히 언니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나이였다. 그녀의 눈빛에는 당황스러움과 의심이 서려 있었다. "언니… 무슨 소리야? 괴물이라니, 그런 게 어디 있어?" "정말이야." 이오는 헛웃음을 지었다. "언니, 나 애 아니야. 그런다고 내가 겁먹을 거라고 생각해? 언니 일에 방해 안 할게. 그러니까..." "이오!" 클라라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오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제야 클라라는 자신이 주먹을 꽉 쥔 채 몸을 떨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숨을 들이마셨지만, 가슴속에 차오른 공포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귀에 맴도는 백작의 서늘한 목소리, 거친 손길. 클라라는 그 순간 소피아를 떠올렸다. 꿈 많고 생기 넘치던 그녀는 백작의 손길이 닿자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마주칠 때마다 쉴 새 없이 조잘대던 입은 점점 굳어 갔고, 어느새 말수가 줄어든 그녀는 퀭한 눈으로 허공을 오래도록 응시하곤 했다. 그리고 끝내, 스스로 백작저를 떠났다. 클라라는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아니, 붙잡을 수 없었다. 클라라는 숨을 삼켰다. 그리고 동생을 바라보았다. "이오, 제발 믿어 줘." 이오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 속에 어딘가 씁쓸한 빛이 어렸다. "언니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믿어야겠지." 이오는 그렇게 말하고는 미묘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올리브빛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클라라가 여전히 자신을 아이로 여기고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클라라는 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오는 백작가에 가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안도해야 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이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다시는 동생이 그곳을 떠올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래." 이오는 짧게 내뱉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클라라를 향해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언니는 내가 아직 애라고 생각하는구나."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클라라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침묵은 이오에게 충분한 확신을 심어주었다. "됐어. 이해해." 이오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억지스러웠다. "나 먼저 잘게." 그렇게 말한 뒤, 이오는 등을 돌려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조용히 닫히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클라라는 그제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손끝이 차갑게 얼어붙은 듯했다. 이오는 상처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클라라는 이오에게 백작가의 실상을 다 설명할 수 없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백작이 어떤 인간인지, 소피아가 어떻게 망가졌는지,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그 끔찍한 진실을 이오의 세계에 들여놓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걸 이오가 이해할 리 없었다. 클라라는 이오가 들어간 문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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