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열등감
백작가에는 어김없이 다시 아침이 찾아오지만, 소피아에게서는 전과 달리 활발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평소라면 동료들과 웃으며 하루를 시작했을 그녀였지만, 그날 이후로 소피아는 표정 없이 멍하니 땅만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녀의 눈빛은 텅 빈 듯 했다.
하녀들 중 몇몇은 소피아의 변화를 눈치채고, 의아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실수 많고 모자란 듯 보여도 남을 배려하는 따뜻한 성격의 그녀가 오늘은 달랐다. 그녀는 사람들과의 대화도 피하고, 무엇보다 그들의 시선을 맞추지 않으려 했다.
"오늘, 소피아는 왜 이렇게 조용하지?"
하나의 하녀가 속삭이며 물었다. 그 말에 다른 하녀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피아를 주의 깊게 살폈지만,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텅 빈 듯한 모습이었다.
소피아는 계속해서 땅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그날의 기억이 짙게 남아 있었다. 백작과의 그 순간이, 마치 꿈처럼 그녀를 붙잡고 있던 것이다. 그 순간이 지나갔어야 했고, 그녀는 이미 그것을 잊으려고 했지만, 매번 다시 떠오르는 그 기억은 그녀의 마음을 짓누르며, 똑바로 걷는 것조차 힘들게 만들었다.
그날 이후, 소피아는 점점 더 스스로에게 갇혀갔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하려 했지만,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계속해서 그녀를 괴롭혔다. 표정 없는 얼굴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소피아는 그 누구에게도 이 감정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소피아는 더 이상 자신이 누구였는지, 어떤 모습이었는지도 헷갈리는 듯했다. 그날의 기억은 그녀를 계속해서 괴롭혔고, 표정 없는 얼굴로 지나는 매 순간이 그녀에겐 무겁고 괴로웠다.
[11. 열등감]
백작가의 대문이 열리자, 고풍스러운 마차 한 대가 천천히 들어왔다. 마부가 고삐를 당기자 말들이 조용히 멈춰 섰고,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내렸다. 에단.
황금빛 햇살이 그의 백금발 위로 내려앉았다. 단정하게 넘긴 머리카락과 정갈한 복장은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자신의 이미지를 관리하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한결같이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있었고, 한 손을 뒤로 뻗어 마차 안을 향했다. 그러자 가녀린 손이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리리, 인사해야지."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숨듯 서 있던 리리가 뒤늦게 자신의 행동을 깨닫고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밀색 머리칼이 부드럽게 흘러내렸고, 커다란 눈망울이 로웬을 올려다보았다. 리리는 주저하는 듯했지만, 아버지에게 등을 살짝 밀려 조심스럽고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백작님께 인사드립니다."
로웬은 그녀의 모습에서 에단의 흔적을 찾았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갓난아기였던 리리가 이제는 아름다운 숙녀가 되어 있었다. 성정은 소심한 듯 보여도 그의 앞에서 행하는 예법에는 실수없이 완벽했다. 작은 손짓 하나에도 깃든 기품, 단정한 표정, 그리고 완벽하게 정제된 말투까지. 모든 것이 에단과 닮아 있었다. 단 하나, 그녀의 머리색만이 달랐다. 백금빛의 에단과는 다르게, 리리의 머리는 한층 더 어두운 밀색이었다. 마치 그녀가 에단과 같은 혈통임을 증명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와 다른 존재임을 암시하는 듯했다.
"잘 왔다, 에단." 로웬은 자연스럽게 미소 지었다.
"이곳까지 먼 길이었을 텐데, 불편하진 않았나?"
"전혀." 에단은 한결같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형님."
그 한마디가 로웬의 가슴을 저릿하게 짓눌렀다.
어릴 적부터 그는 '형'이 아니었다.
부모님의 사랑도, 기대도, 자랑스러운 시선도 모두 에단에게 향했다.
어디서든 주목받았고, 언제나 뛰어났으며, 모든 것이 완벽했다.
어린 시절, 로웬은 그와 비교되는 것이 지긋지긋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들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태연한 척, 무덤덤한 척, 그리고 지금처럼 반갑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에단처럼 해보려고 노력은 해봤니?'
부모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어릴 적 기억들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그래, 오랜만이군. 리리도 많이 컸구나."
그는 애써 자연스러운 태도를 연기하며 에단을 맞이했다.
리리는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 긴장한 듯 어깨를 굳히자 에단이 부드럽게 리리의 등을 토닥였다.
"낯선 곳에 와서 긴장한 모양입니다."
로웬은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가슴 한켠이 쓰라렸다. 완벽한 아버지의 모습마저도 에단이 더 잘하고 있었다.
"괜찮다."
로웬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리리, 넌 내 조카야. 편하게 있어도 돼."
리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백작님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그녀의 조심스러운 태도는 마치 로웬을 두려워하는 듯했다. 로웬은 순간, 자신이 그런 눈빛을 받을 만한 사람이었던가 하고 생각했지만, 곧 마음을 다잡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그는 한 손을 내밀며 말했다.
"방은 준비해두라 일렀어. 일단 차부터 마시지."
"좋습니다, 형님."
에단이 밝게 대답하며 성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리리는 그 뒤로 숨어들 듯 조용히 따랐다. 로웬은 그들의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어릴 적부터 모든 걸 가졌던 동생, 그리고 그를 닮은 그의 딸. 로웬의 마음에서 묘한 감정이 일렁였다.
리리는 에단의 뒤를 따르며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발은 마치 우아하게 춤을 추는 듯 가벼웠다. 로웬은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어릴 적 품었던 열등감이 다시 한번 깊은 숨을 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응접실로 향하는 복도를 걸으며, 로웬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뒤를 따르는 에단의 발걸음은 우아하고 가벼웠다. 마치 이곳이 자신의 집인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형님, 이곳은 여전히 변함없네요."
에단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따스한 향수가 묻어있었다.
"세월이 흘러도 이 저택은 언제나 그리운 기운을 품고 있어요."
로웬은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단의 말에, 그의 마음속에서는 쓴웃음이 피어올랐다. 자신에게는 그저 일상적인 공간이었지만, 에단이 오면 늘 과거의 그림자가 따라왔다.
"그래, 변함없이 좋지."
로웬이 간단히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냉기가 섞여 있었다.
응접실에 도착하자 하녀들이 재빨리 차를 준비했다. 로웬은 소파에 앉으며 깊은 숨을 들이켰다. 에단과 리리도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에단의 백금발을 비추며 찬란한 빛을 발했다. 그 빛은 마치 후광처럼, 그의 존재를 신성하게 감싸고 있는 듯했다. 리리는 조용히 에단 옆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밀색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리며 햇살에 반사되었다.
로웬은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복잡한 감정을 삼켰다. 완벽한 동생과 그를 닮은 딸. 그들의 존재가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잘 지내나? 부인은 잘 지내시고?"
하녀가 차를 따르는 모습을 지켜보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무심한 듯 들렸지만, 귀끝은 미세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에단이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덕분에 잘 지냅니다. 아내는... 함께 왔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만삭이라서요."
"어쩐 일로 지방에서 수도까지 올 생각을 한 거지?"
로웬이 물었다. 그의 시선이 잠시 리리에게 머물렀다가 다시 에단에게로 향했다.
로웬은 에단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동생의 얼굴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가 떠 있었다. 그 완벽한 표정이, 언제나처럼 로웬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이번에 무역협정 건으로 수도에 와야 했습니다." 에단이 설명했다.
"리리를 데리고?
"하하, 예. 리리가 수도를 꼭 가보고 싶다고 해서요. 그래서 그런데... 혹시 리리를 며칠 동안 여기 묵게 해주실 수 있을까요?"
에단이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에단의 말에 리리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수줍음과 기대감이 섞여 있었다.
로웬은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에단을 닮은 아름다운 소녀를 바라보며, 그의 마음속에서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용솟음쳤다. 그것이 평생 그를 따라다녔던 열등감의 연장선인지, 아니면 더 어둡고 위험한 무언가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물론이지."
로웬이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평온하게 들렸지만, 마음속에서는 복잡한 감정이 격렬히 소용돌이쳤다.
햇살이 창문으로 스며들어 리리의 밀색 머리카락을 비추었다. 그 모습이 마치 어린 시절의 에단을 보는 것 같았다. 로웬은 자신의 마음 한켠에서 피어오르는 불편한 감정을 애써 무시하려 했다.
"리리."
로웬이 부드럽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소녀는 살짝 긴장한 듯 고개를 들었다.
"어릴 때 한 번 본 이후로 처음이구나. 많이 컸네."
"네..."
리리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경계심이 서려있었다.
로웬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햇살이 그의 어깨를 따스하게 감쌌다. "춤추는 걸 좋아하니?" 그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애프릴에게 말하듯, 부드럽고 따스하게 퍼졌다.
리리는 살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에단은 그런 그들을 보고 미소 지으며 바라보았다.
"공주님, 저와 한 곡 추실까요?" 로웬이 한 손을 내밀며 말했다. 마치 아이를 대하는 말투였다.
그 순간 자신의 말에 스스로도 놀랐다. 애프릴을 대하듯 나온 말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리리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우아한 자태와 성숙한 분위기를 풍기는 숙녀였다.
리리는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잠시 당황한 듯했다. 그녀의 긴 속눈썹이 부드럽게 깜빡였다. 그러나 곧 그녀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푸풋..." 그녀의 웃음소리는 맑고 우아했다.
로웬은 그제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애프릴을 대하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눈앞의 소녀는 에단을 닮은 우아한 숙녀였다. 그녀의 자태에는 더 이상 어린아이의 천진함이 아닌, 성숙한 여인의 기품이 깃들어 있었다.
"영광입니다, 백작님."
리리가 긴장이 풀린 미소를 지으며 우아하게 대답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에단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형님께서 리리를 아직도 어린아이로 보시는 것 같네요."
로웬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혼란스러운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애프릴에게 보여주던 순수한 따뜻함과, 리리의 성숙한 아름다움에 이끌리는 감정이 얽혀, 자신도 알 수 없는 불편한 마음을 불러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