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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화 승천 (2)


#140화 ​ 비단 그녀가 살벌한 기세를 비추며 노처녀의 서러움을 드러내서, 또 그런 그녀와 앞으로 그렇고 그런 일을 할지 모른다는 것 때문은 아니었다. ​ 왠지 모르게 그녀의 맨얼굴을 본다는 것 자체가 손끝이 떨릴 정도로 긴장됐다. ​ 박력 있게 벗기라는… 소리를 했지만, 그녀도 조금 긴장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헬멧에 수없이 떠오른 마법진이 사라지고 나서 그녀의 바이저에 맺히는 입김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 뿌옇게 번지는 숨결이 덧칠되는 속도가 무척. ​ 무척 빨랐다. ​ ‘…저러다 과호흡으로 쓰러지겠네.’ ​ 신비상인 조합은 여느 때처럼 밝고 고즈넉한 분위기였지만 남녀 둘이 만들어내는 묘한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당겨진 실처럼 위태로운 느낌이 있었다. ​ 헬멧의 밑부분을 받치고 있는 손에 살짝 힘을 주어 들어 올리자 힐다의 몸이 흠칫 떨렸다. ​ 라이터 슈트와 헬멧으로 가려져 있던 그녀의 가느다랗고 새하얀 목선이 내 시선을 모조리 빼앗았다. ​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견디기 어려웠는지 의외로 먼저 힐다가 말문을 열었다. ​ “구, 궁금하신 게 많으실 텐데 하나씩 질문해 보세요. 카르마가 이해하는 선에서…” ​ “얼굴부터 보고.” ​ “그, 그…” ​ “벗겨달라며?” ​ “…” ​ 그녀의 당황과는 다르게 분위기는 조금 더 편안하게 풀렸다. ​ 망설이던 내 손에 힘이 들어가고 헬멧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 희고 고운 목선에서 이어져 갸름한 턱선이 드러나고 제일 먼저 붉은 입술이 보였다. ​ 촉촉한 습기를 머금어 빛나고 있는 입술 사이에 작게 드러난 하얀 이가 앙증맞았다. ​ 오뚝한 코, 예상보다도 더욱 작은 얼굴과 완숙한 여성의 매끄러운 볼. ​ 백색의 머리칼이 스르륵 흘러내려 찰랑거리고 그녀의 눈이 드러났다. ​ “…” ​ “…” ​ 은실 같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이내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는 신의 대리자. ​ 모든 용의 왕이었던 여자는 카리스마도 위압감도 없었다. ​ 신비를 머금은 옅은 색의 은색 눈동자가 요정을 보는 것만 같았다. ​ 스윽- ​ 헬멧이 완전히 벗겨지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길 한참. ​ “너, 너무 뚫어져라 보잖아요…” ​ 그야… 이렇게 예쁠 줄은 몰랐는데… ​ “어, 응…” ​ 나는 작게 투정하는 힐다의 새초롬한 눈길에 침을 꿀꺽 삼키고 한발 물러섰다. ​ 라이더 슈트를 입은 백색 머리칼의 여자가 볼을 붉히고 노려보듯 바라보니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 묘하게 색기를 머금은 동그란 눈매를 정신없이 바라만 보자 힐다가 묘한 표정으로 나를 훔쳐보다가 씩 웃었다. ​ ‘아…’ ​ 저렇게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어버리니 이전의 색기가 훌훌 날아가고 20대의 제 나이에 맞는 얼굴이 되었다. ​ 그제야 조금 몽환적인 느낌이 가시고 제정신이 돌아와 고개를 털털 흔들어내고 한숨을 쉬었다. ​ 힐다는 그녀대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더니 잡아먹을 듯 바라보던 열렬한 시선이 사라지자 당황했다. ​ “시, 시우 님?” ​ “아, 맞다.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네. 일단 뭐라도 좀 마시자. 나 목말라. 사탕도… 그건 하루에 하나만 먹는 게 제일 맛있긴 하지.” ​ 어리둥절한 힐다를 놔두고 익숙한 공간인 신비상인 조합의 바로 걸어갔다. ​ “…섹스하는 분위기 아니었어?” ​ 뒤에서 작은 중얼거림이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 *** ​ 내가 의문을 가질만한 것도 많고 또 의문을 느껴야 하지만 정보가 부족해 인지도 못 하는 것들도 많다고 생각했다. ​ 가장 궁금했던 것들은 이미 신에게 물었지만 대답해주지 않았으나 내가 어떤 조건을 충족했으니 이런 변화가 있었겠지. ​ 그러니 나는 가장 처음으로 돌아가 질문하기로 했다. ​ 쪼르륵- ​ 잔에 따라지는 찻물이 영롱한 빛을 내며 부서졌다. ​ “에휴…” ​ 김이 피어나 바로 입에 대기에는 뜨거웠고 갈증도 해갈해주기 어려웠지만, 향만큼은 최고였다. ​ “어휴!” ​ “…왜 자꾸 한숨 쉬는데.” ​ 바의 안쪽에 선 힐다가 탱탱한 젖가슴을 받쳐 들며 팔짱을 끼고 나를 노려봤다. ​ 왜 그런지 다 알지만, 궁금증이 도져서 도저히 바로 몸을 겹치거나 하기에는 조금… ​ 거기다가 그녀가 용으로 현신해서 세상이 뒤집힐 만한 전투를 할 때 그 상대의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왔으니 솔직히 조금 쫄렸다. ​ 씹상남자의 자존심에 금이 가긴 했지만 브레스 한방으로 하늘에 닿을 듯 쌓였던 탑의 대부분이 재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는 걸 보면 누구나 그럴걸? ​ “여자만 보면 달려들어서 임신시킬 생각을 하는 사람이. 흥!” ​ “…” ​ “자, 자지가 아깝네요.” ​ 도발인지 유혹인지 모르겠지만 오히려 오기가 생겨 꾹 참아내고 찻잔을 들었다. ​ 힐다도 나중을 기약하고 마지막 한숨을 쉬며 털썩 앉았다. ​ “후- 질문. 할게?” ​ “…신중하게 하셔야 해요. 발키리 길드원들의 모든 카르마를 양도받았기에 가능한 일이니까. 다음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죠. 발키리 길드원들만큼 많은 카르마를 보유한 사람들은 드물어요.” ​ “…응.” ​ 사실 양도라기보다는 편법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 숨을 고르며 잠시 고민하는 나를 채근하지 않은 힐다는 푹 콧김을 뿜으며 바의 테이블 위로 육중한 가슴을 턱 올려놨다. ​ ‘생각… 해야 하는데…’ ​ 저건 중력의 폭력이었고 시선을 강탈하기 위해 발달한 여자의 무기였다. ​ 입을 헤 벌리고 라이더 슈트로 착 감싸진 젖가슴의 중앙에 볼록 튀어나온 흔적을 눈길로 덧그렸다. ​ “크흠. 질문할게. 먼저… 날 빙의시킨 것에 의도가 있는 건가?” ​ “…흠.” ​ 힐다는 내 시선을 의식한 듯 젖가슴을 꾸욱 눌러 더 부각하고는 입을 열었다. ​ “이 세계는 여신님의 손에서 시작된 곳이에요. 발전과 진화의 과정은 손대신 적 없다고 하시지만 결국 모든 것의 원점은 여신님이죠.” ​ 천지창조인가… 여신은 내 생각보다도 더욱 위대한 존재였다. 하긴 신비상인 물건들의 설명에서도 여신을 제외한 다른 신들의 흔적이 보였다. ​ 대부분 여신님이 상대방이 좋은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 두들겨 패서(?) 물건들을 강탈했다는 설명이었지. ​ 또한 ‘여신’과 닿아있는 신화에서는 또 대부분 그녀 본인이 주인공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 “그렇기에 세상에 태어난 모든 존재들의 ‘영혼’은… 모두 여신님의 품에 안기게 되어있어요. 원점으로 돌아가는 거죠.” ​ “음…” ​ “그렇기에 불경한 자들은 그 굴레를 깨려고 했어요.” ​ “…어?” ​ “여신님에게 비롯되지 않은, 불경하고 불순한 자들의 말로는 순수한 영혼.” ​ “…그게 나라고?” ​ “라이칸을 직접 봤었죠. 타락해버린… 그 라이칸의 이름은 타칸이었어요. 저만큼은 아니어도 충분히 강한 존재였죠. 그런 그가 만약 저를 꺾었더라도 여신님께 닿을 수는 없었을 거예요. 왜냐하면.” ​ “결국 여신에게서 비롯된 존재니까.” ​ “그렇죠.” ​ “당신은 여신님 스스로 온 우주에 선언한 카르마의 굴레에서 빗겨나간 존재에요. 진실과 본원에 닿을 수 있는 오롯한 존재.” ​ …불경한 존재. 하늘에 닿기 위해 쌓았던 바벨. 라이칸이 지껄이던 말들. ​ 나는… 신살을 위해 불려온 존재였다. ​ “우습게도 그들의 목적은 이뤄지지 못했지만요. 타칸 때처럼 또 제가 막았거든요.” ​ 자랑스럽게 가슴을 쭈욱 펴는 힐다는 입술을 씨익 당기며 웃었다. ​ “당신이 깃들었던… 비난하는 건 아니에요. 당신이 깃들었던 불결한 존재를 끌어안고 승천했어요.” ​ “허…” ​ “여신님의 품에 안겨서는 안 되는 존재를 감당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여신님에게 부탁한 꼴이었어요. 제 소임을 다하지 못했으니 조금은…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 “진짜 내가 ‘그거’였구나…” ​ 길드장이 표현한 대로 말하자면 세상의 이치를 벗어난 괴물.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에 묶인 영혼이 나였다. ​ 낯선 세상에 뚝 떨어진 동떨어진 존재. 의도부터 불순했고 목적은 불경한. ​ “당신이 피해자라는 걸 잘 알아요. 그러니 여신님께서 이렇게.” ​ 힐다는 바짝 굳어진 내 볼을 콕 찔렀다. ​ “귀엽고 사랑스러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하셨어요.” ​ “다시 태어났다고?” ​ 난 그냥 이 몸에 빙의한 거 아니었어? ​ “빙의는 처음 ‘그것’에 했을 때죠. 지금은…오히려 정당하게 이 세상의 굴레에 반쯤 발을 걸친 후라고 보는 게 맞아요. 당신의 ‘자각’이 늦었을 뿐이죠. 환생이라고 봐야겠네요?” ​ 자각이라면… 빙의 자체를 깨닫게 된 5년 전을 말하는 거겠지. ​ 그렇다면 나는 정말로 누군가의 결합으로 누군가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소리였다. ​ 졸지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진짜’ 부모님의 존재를 인지한 나는 조금 어처구니가 없어 멍해지고 말았다. ​ 그렇기에 조금 나사 빠진 질문을 했다. ​ “그럼 힐다는 유령이야? 승천했으면 하늘나라에 갔다는 거잖아. 그럼 처녀 귀…” ​ “귀신으로 만들어드려요?” ​ “…죄송합니다.” ​ “이참에 한도 풀고 다시 승천이나 해버릴까 보다.” ​ 힐다가 피식 웃으며 내 볼을 만지작거렸다. 쭈욱 늘리며 조물거리는 손길에 귀가 마구 파닥거리며 불만을 표시했다. ​ 힐다는 그걸 보면서 또 군침을 꿀꺽 삼켰지만. ​ 보면 볼수록 전 명예 노처녀 타이틀의 길드장이 생각났다. 순진하게 생긴 것도 그렇고. ​ 손길을 쳐내는 대신 꼬리를 불만스럽게 휙휙 흔들자 힐다가 아쉽게 혀를 차며 손을 내렸다. ​ “그럼… 나는 도대체 뭐야?” ​ 어쩌면 이전과 같은 질문이었지만 달랐다. ​ 나는 지금 너무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웠다. 불려온 이유는 알았지만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으니 또 다른 이유가… 필요한가? ​ “이미 질문하면서 답을 찾으신 것 같은데요?” ​ “…그러네.” ​ “돌아가고 싶으신 건 아니죠?” ​ “…응. 난 여기서 여자친구들이랑 행복하게 살고 싶어.” ​ 각오를 새기듯 다시 한번 다짐했다. 나를 노리고 있는 놈들을 신을 위해서라는 거창한 목적이 아니라 내 삶을 위해서라는 목적으로 치워버리는 것. ​ “아주 좋아요. 멋있어. 흐흣.” ​ 입술을 싸악 핥아 올리는 힐다를 떨떠름하게 바라보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 “근데 왜 그렇게 날… 좋아하는 건데? 힐다도 내 여자친구가 되려는 거야?” ​ “…” ​ “뭐야, 왜 대답을 안 해.” ​ “그, 그게요. 당신의 몸을 만들 때는 조금. 아아아주 조금 여신님과 제 사심이 들어갔거든요?” ​ “…” ​ “시간선을 뒤틀면서 겨우 성인으로 만드는 데 정말 힘들었어요. 휴우…” ​ “이 몸을… 여신님과 네가 만들었다고?” ​ “그럼요! 정말 귀엽고 사랑스럽지 않아요? 카르마를 완전히 무시할 수 없어서 예전의 ‘그것’의 특성이 그대로 남아버렸지만! 진짜 최고! 추릅!” ​ 그러니까 나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이 그냥 만들어졌다는 거 아냐? 이, 이, 이 쇼타의 몸으로! ​ “남자는 역시 작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게 최고죠! 당신의 키를 설정할 때는 여신님과 며칠 동안 싸웠다니까요? 더 작아야 한다고 고집 부리는 여신님을 설득하는데 진짜 힘들었어요. 뭐든 적당한 게 좋은데 말이죠!” ​ 나는… 나는 참지 못했다. ​ 키가 작아 서러운 지난 세월. 마트나 편의점에 가서 높은 곳에 있는 물건을 꺼낼 때마다 낑낑거리며 발끝으로 서다가 눈물을 머금고 돌아가던 세월이 파릇파릇 피어났다. ​ 신상 맥주가 조금 높은 곳에 있을 때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여자 점원에게 말을 걸어 남자라는 걸 들키는 걸 피하고 그냥 평소 먹던 맥주를 먹어보지도 않은 신상 맥주와 비교하며 역시 먹던 맛이 최고지, 하고 자신을 위로하던 힘겨웠던 세월. ​ “어쨌든 당신은 제 이상형이에요. 단지 외모뿐만 아니라 어쩜 성격이랑 사고방식도 제 취향인지. 지켜보면서 정말 오늘을 기대했어요. 하아…” ​ “이…” ​ “네? 뭐라고 하셨어요?” ​ 귀엽게 갸웃거리며 열렬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빌어먹을 도마뱀. ​ “이 미친년아아아-!” ​ 짜아아악-!! ​ “꺄아아악!!” ​ 신의 대리자, 위대한 용, 전쟁 영웅의 괘씸하고 괘씸한 젖탱이를 전력을 다해서 후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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