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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서혜진 (1)


환상 같던 밤을 보내고, 나는 수면부족인 상태로 회사에 출근했다. 그렇게 비몽사몽으로 업무를 처리하고 있으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나는 채진아게 문자를 보냈다. 잘 들어갔냐고. 좀 늦게 보낸 것 같지만. 몇 분 후 답장이 왔다. [잘 들어갔어?] [점심이 돼서야 ‘잘 들어갔어?’ 라고 보낸 거야? 미친 거 아니야? 하무튼 잘 들갔어 ㅋㅋㅋㅋ 너는?] [미안… 나도 이제서야 술 깼어. 나도 잘 들어갔지. 지금 회사야. 넌 뭐 해?] [방금 일어났어. 이제 밥 먹을 거야. 밥 먹었어?] [아, 방금 먹었어. 뭐 먹을건데?] [...닭가슴살] [아…] 이성과 연락을 너무 오래 못한 탓인가? 단순한 스몰토크도 힘겨웠다. 어떤 내용을 문자로 보낼까를 고민하다, 닭가슴살에서 그녀가 헬스 트레이너라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아 맞다. 너 어디 헬스장에서 일해?] [그건 왜 물어?] [그냥 나도 이제 곧 서른이니까, 운동해볼까 해서.] [맞아, 지금부터라도 운동해야 해. 그런데 내가 일하는 곳에서 운동하려고? 많이 멀어서 힘들 거야.] [아 그래? 많이 멀어?] [한… 차로 이십 분? 헬스장은 집 앞에 있는 게 제일 좋아. 매일 가다 시피 해야 하는 곳이니까.] [흠, 그러면 안 되겠네. 그냥 집 근처에서 다녀야겠다.] 사실 채은아가 있다면 차로 20분 거리로 기쁜 마음으로 갈 수 있었지만, 채은아의 답장에서 완곡한 거절의 표현이 느껴져 포기했다. [그래. 나중에 운동하다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봐.] [나 몸치라서 물어볼 거 많을건데?] [몸치 아닌 것 같던데?] [그걸 어떻게 알아?] [...그걸 굳이 말해야 알겠어?] 내가 채진아에게 몸을 쓰는 것을 보여 준 상황은 딱 한 번뿐이었다. 모텔에서 허리를 흔드는 운동 말이다. “귀엽네, 채진아.” [아… 무슨 뜻인지 알겠어ㅋㅋㅋㅋ] [진짜 눈치 없다…] [아 미안ㅋㅋㅋㅋ 나 전혀 생각지도 못 해서. 나 이제 점심시간 끝나서. 저녁에 연락할게.] 그렇게 문자를 보내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려고 할 때, 채진아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문자가 왔다. [오빠 뭐 해?] 문자를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나의 첫 매칭녀. 서혜진이었다. *** 혜진이는 오늘 저녁에 시간 있으면, 저번처럼 산책하면서 맥주나 한잔 하자고 제안했다. 나는 채진아가 순간 걸렸지만, 사귀는 사이는 아니니 걸릴 게 없었다. 섹스만 했을 뿐이지. 나 쓰레기 같나? 나는 서혜진에게 알겠다고 문자를 보냈고, 서혜진은 오늘 8시에 저번에서 본 공원에서 만나자고 했다. “오빠, 오랜만이야.” 눈가에 흑색점이 매력적인 혜진이는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 그녀의 오른손에는 맥주 캔 두 개가 담긴 투명한 비닐봉투가 들려 있었다. “어, 맥주 사 왔네?” 그녀는 비닐봉투를 얼굴 높이로 들어 올려 좌우로 흔들었다. 그리고 실실거리며 웃으며 내게 한 발자국 다가왔다. “저번에는 오빠가 샀으니까, 이번에는 내가 사야지.” “기특하네.” 우리는 저번 날과 같았다. 똑같은 코스에 똑같은 맥주를 마시며,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 하는 얘기들도 비슷할 것이다. 산책이 끝나고 우리가 저번에 헤어졌던 그 장소에 도착했을 때, 나는 고민했다. 이 시간을 더 이어가고 싶은지, 서혜진에게 묻거나,아니면 이대로 돌아서 집으로 돌아가거나. 저번에는 같이 더 있고 싶다는 욕심과 조급함이 강했지만, 지금은 그 욕심과 조급함이 없었다. 왜일까 생각해봤다. 나는 그때와 다른 점은 크게 없었다. 아 하나 있었다. 채은아와 하룻밤을 보냈다. 서혜진의 문자가 오기 전, 오늘의 생각 중 반은 채은아였다. 그런 탓에 내 머릿속의 서혜진의 존재는 희미해지고 있었다. 아마 오늘 만남이 아니었다면 며칠 뒤면 얼굴과 이름도 기억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나는 서혜진에게 말했다. “그만 헤어질까?” “오빠, 나랑 빨리 헤어지고 싶나 봐?” “그런 건 아닌데… 너 룸메가 기다리지 않아?” “룸메 오늘은 남자 친구 집에서 자고 와서 괜찮아.” “아.” “우리 한잔 더 할까? 이번에 길거리에서 맥주 말고 술집에서 제대로 된 안주에 소주 마시자.” 그녀의 저 멀리 네온사인으로 빛나는 거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양손을 바지주머니에 집어 놓고 땅바닥을 바라보면서 왼발끝으로 닥에 땅 구덩이를 팠다. 내가 고민할 때 습관이었다. 내 모습에 자기 제안이 맘에 안 듯 것이라 생각한 건지, 서혜진은 작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왜 별로야?” “흠…그건 아니고.” 나는 땅 구덩이를 파던 것을 멈췄다. 그래도 아직 고민 중이었다. 나는 서혜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디 좋은 술집 알아?” -짝 서혜진은 기뻐하며 살짝 박수를 한번 쳤다. “나 평소에 가보고 싶었던 곳 있는데, 이번에 가보고 싶어.” “흐음.” “왜 아직도 고민 중이야? 가기 싫으면 빨리 말해. 나 자존심 상할 것 같아.”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하는 서혜진에게 나는 고민된다는 말투로 말했다. “싫은 건 아니야, 그냥 내가 내일 아침에 출근해야 해서 그래.” “조금만 먹고 집에 가자. 나 정말 평소에 가보고 싶었던 곳이라 그래. 그리고 아직 9시인데 아무리 많이 마셔도 11시까지야. 그때까지 무조건 집 보내줄게. 내가 이렇게 간절하게 부탁하는데 거절할 거야?” 계속 마시자,마시자며 애교부리는 서혜진에게 결국, 나는 져 버리고 말았다. “그래, 마시자. 오늘 잠 덜 자고, 내일 점심시간에 조금 자면 되겠지.” “좋아! 시간 없으니까 빨리 가자!” 서혜진은 내 왼손을 잡고 네온사인이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거리를 향해 이끌었다. 나는 몸에 힘을 빼고 그녀의 연약한 힘에 몸을 맡기며 끌려가 주었다. 그녀의 손은 무척이나 부드럽고, 그녀의 몸에서 나는 기분 좋은 시트러스 향의 향기가 그녀와 손을 타고 나에게 넘어와 내 코끝을 간지럽게 했다. 손 하나 잡은 것만으로 방금 전까지 서혜진에 대해 무심에 가까웠던 내가, 이렇게 설레다니 참으로 남자라는 생물은 단순하고도 불쌍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쩌겠는가? 그게 남자라는 생물이다. 그녀가 내 손을 놓아주었을 때 , 우리는 작은 술집 앞에 서 있었다. 뭔가 복고풍이면서 레트로하게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게 무척이나 감성적인 술집이었다. 술집이라고 말해주지 않았으면 카페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것도 같다. “여기야.” 사라진 손의 감촉과 서혜진의 향기가 사라져, 속으로 안타까워 하던 내게 서혜진이 말했다. “예쁘네? 그런데 가게만 봐서 어떤 안주 파는 지 모르겠다.” “나도 잘 몰라 히히. 그냥 예뻐서 가고 싶었어.” 술집에 들어간 우리는 좌석에 앉고, 서혜진을 메뉴판을 펼쳤다. 나는 메뉴판을 보는 대신 주변을 둘러봤다. 가게가 작은 편이라, 테이블이 많이 없었지만, 그래도 평일날에 거의 만석이라는 사실이 대단했다. “평일인데, 사람이 많네.” “요즘 인스타에서 떠오르는 핫플이라 그런가 봐. 오빠, 메뉴판 봐봐. 그냥 한식 중식 양식 다 있어. 이제 뭘 먹을지 행복한 고민만 하면 돼!” “잡탕이네.” “말을 해도, 잡탕이라니! 술맛 벌써 떨어지게 그게 뭐야? ” “아, 미안.” “됐어. 어서 고르기나 해.” “...흐음. 너무 많아서 더 선택하기 어려운데. 화채?” “오빠, 그건 아니야. 치즈닭갈비 어때?” “나 치즈 못 먹어.” “아, 진짜.” 우리의 격렬했던 메뉴 토의 시킨 메뉴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마라탕이었다. “여기 마라탕이랑 소주 한 병 주세요!” 요즘 마라탕은 어디에서나 파는 것 같다. 분식집, 중국집, 술집 어디서든.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요즘 여자들 사이에 마라탕의 위상은 떡볶이와 동등해졌다.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컬트적인 인기다. 나는 딱히 마라탕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딱히 땡기는 음식이 없었기에, 결국 혜진이의 의견을 따라 마라탕을 시켰다. 잠시 후 마라탕과 소주가 나왔고 우리는 각자 수저를 들어 동시에 마라탕 국물을 입에 넣었다. “흐음, 생각보다 먹을 만 하네.” “...뭐야. 마라탕이 왜 이렇게 밋밋해.” 전자는 내 반응이었고, 후자는 서혜진의 반응이었다. 나는 생각보다 자극적이지 않는 마라탕에 맛에 생각보다 괜찮다는 생각이었지만, 서혜진은 마음에 안들었나 보다. 한입 먹고서는 알 수 없는 요상한 표정을 짓다니, 투덜거렸다. “이게 무슨 마라탕이야. 우리 집 김치찌개가 이것보다 맵겠다.” “...너희 집안 너무 짜게 먹는 거 아니야?” “아 고향이 전라도라서, 짜게 먹는 편이야. 내가 말 안 했어?” “응. 안 했어. 전라도 어디인데?” “목포. 목포 알아?” “알지, 세발낙지랑 항구 유명한데.” “에휴… 그놈의 세발낙지와 항구. 사람들 다 똑같은 소리 하네. 난 세발낙지 먹은 적도 없는데.” “그러게, 누가 안 먹으래?” “오빠, 진짜 열 받는다.” “하하하.” 투덜거리는 서혜진을 보니, 고향에 있는 여동생이 순간 생각나 나도 모르게 크게 웃어 버렸다. 내 동생도 항상 저런 말투로 투덜 거렸는데, 지금 잘 지내는지 모르겠다. 내가 크게 웃자, 서혜진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왜웃어? 촌년이라 웃겨?” “촌년이라니, 내가 언제 그랬어. 그냥 너 투덜되는 모습이 귀여워서 웃은 거야.” “...별 게 다 귀엽데. 아! 진짜 메뉴 잘못 지켰어. 이 집 그냥 인테리어 빨로 장사하네.” 서혜진은 들고 있던 수저를 바닥에 일부러 탁하는 소리를 내며 두었다. -탁 그러고는 소주잔을 들었다. “안 되겠어. 안주가 맛없으니까 술빨이라도 세워야겠어. 짠하자.” 서혠지의 말에 나도 소주잔을 들었다. “어. 짠” “개 같은 마라탕! 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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