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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장사꾼에게 당하다.


“그래서, 이름이 뭐라고요?”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는 존댓말이었지만 말투는 싸늘했다. “예, 리비드입니다.” 나를 3층까지 안내한 그가 얄밉게 느껴진다. 조금 건방지게 굴던 놈을 엿먹이려고 골탕을 먹였을 뿐인데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귀족도 아닌데 감히 우리 직원에게 뭐라 그랬다는 거네요? 아주 잘 알았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됐고, 얼마?” “네?” “얼마나 빌리고 싶은지 묻는 거잖아. 돈 빌리러 온 거 아니야?” “아 네, 맞죠...” 자기 사람을 감싸 안을 능력이 있다, 누구에게나 쉽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어디서나 당당하다. 외모는 또 어떠한가. 속눈썹이 길면서도 눈이 커다란데도 나를 내려다보는 모습은 마치 깔보는 눈빛. 도도하면서 차가운 모습을 한 것이 조금 나를 오싹하게 만들었다. 이게 진정한 상여자인가. 이 세상 사람들 처지에서 제일 바람직한 상여자의 모습이었다. 다리를 한 번 꼬더니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탁 붙이다. 오, 저건 좀 멋있을지도. “대답. 얼마나 원하냐고 묻지 않았어?” “아, 저... 그게... 글쎄요.” 사실 얼마라고 딱히 생각하고 온 것이 아니었다. 아직 주변 시세도 잘 모르고... 장사를 할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것이었다. 무작정 찾아오긴 했지. “사실 그거에 대해서 상담을 하고 싶어서요.” “흠.” 그녀는 천천히 내 몸을 훑어본다. 얼굴부터 발끝까지. 마치 먹잇감을 바라보는 맹수의 눈빛이라서 소름이 돋았지만 그래도 당당하게 그녀의 눈빛을 마주한다. “깡은 있네. 뭐 때문에 빌리는데?” 방금까지는 완전히 나에게 불만 가득한 목소리였는데 어느새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당당한 내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건가? “그게, 사업을 하고 싶은데 얼마 전에 집이 불타버려서요. 돈이 없거든요.” “사업이라...” 생활고같은 일로 빌리는 작은 돈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사업을 위한 돈. 그게 성공할지 실패할지도 모르는 일. 그녀는 제대로 장사꾼모드가 되었다. “사업 내용은 뭔데? 자세히 말해 봐.” 처음으로 남에게 사업내용을 이야기하는 순간이었다. 온천에 관한 내용. 처음에는 고급스러운 온천식으로 사람들이 즐기고 올 수 있게 만들려 했지만 생각을 달리 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식의 온천과 여러 사람들을 숙식할 수 있게 방을 따로따로 만들려면 그 건물부터 커져야 할판. 그러기엔 생각보다 돈이 훨씬 많이 필요했다. 사업의 내용을 들은 그녀는 가만히 듣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돈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여태껏 그 어디에서 보이지 않은 사업. 그 특별함은 제법 사업이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사업이 성공한다면 훌륭하게 빌려 준 돈을 돌려받을 수 있을 뿐 더러 만약 안 된다 하더라도... 그녀는 무슨 생각하는지 천천히 내 몸을 훑어본다. 이 눈빛은 나를 처음 봤을 때 보았던 그 눈빛인데. “뭐, 좋아. 사업 내용은 그렇게 나쁘지 않은데 그 정도 수준의 사업이라면, 글쎄... 건물과 부지 값만 해도 돈이 꽤 나갈 것 같은데? 얼마를 생각하고 왔어?” 부지값, 건물 값, 인건비 등등. 그것들을 생각해 보니 확실히 어지간한 돈으로는 불가능했다. “100골드...?” 돈 단위는 총 3종류. 쿠퍼, 실버, 골드였다. 1000쿠퍼가 1실버, 1000실버가 1골드. 간단하게 생각하면 1골드에는 약100만원의 가치가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100골드로 얼마나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몰랐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한순간에 팍 찌푸려진다. “아무것도 모르고 왔네. 네가 말한 그 정도로 사업을 하려면. 적어도 3000골드는 필요할 텐데.” “그렇게나 필요해요?” “그래, 그럼 적어도 이자는 1년에 600골드. 한 달로 치면 50골드네.” 한 달에 50골드, 5천만원이라는 소리지. 그걸 매달 갚아나가면서 돈을 모을 수 있을까? 운영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을 텐데. 여러모로 골치가 아팠다. 물론 내심 내 사업에는 성공한다는 믿음이 있긴 했지만 아직 통할지 안 통할지는 겪어봐야 아는 일이 아니던가. 고민하는 내 앞의 그녀 역시도 무언가 골똘히 생각한다. 이렇게 큰 금액을 한낱 평민이 대출받으러 와서 고민 중인 건가? 바로 내치지 않았다는 것은 그녀 역시도 돈이 될 것 같으니 고민 중인 것이겠지. 한 번 떠볼까? “저, 여기서 안 되면 다른 곳은 똑같이 안 되는 거겠죠?” 다른 곳으로 한번 가 보겠다는 어필을 슬쩍 해 본다. 내가 이런 말을 뱉어도 그녀는 역시 장사꾼인지 표정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뭐, 솔직히 말해주지. 가능은 해. 네게 3000골드. 충분히 가능하지. 너라면 최대 만 골드까지 해 줄 수도 있어.” 만 골드라는 말에 혹하기는 하지만 그래 봐야 결국, 내가 갚아야 할 이자만 늘어나는 셈이다. 그래도 궁금했다. 그 돈을 받지 못하면 대체 어떤 것으로 돈을 회수할 생각인지. “그럼 3000골드 대출을 받으려면 어떤 계약을 해야 하나요?” “그거야 뭐. 이런 거지.” 펜을 들고 순식간에 쓱쓱 무언가 종이에 적더니 나에게 건네준다. 마치 메뉴판처럼 얼마를 빌려주면 어떤 계약이 성사되는지 금액 별로 가볍게 정리해준 내용. 종이에 적혀진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 1000골드 – 계약 내용 : 빚을 다 갚지 못할 시, 무보수로 자회사에서 일할 것, 조건 – 숙식을 제공받으며 회사에서 생활한다. 단, 선임의 부탁을 성실하게 들어 줄 것. 3000골드 – 계약 내용 : 빚을 다 갚지 못할 시, 무보수로 카트리나가 운영하는 주점에서 일할 것, 부족한 금액만큼 벌어서 갚으면 계약 해지 가능. 10000골드 – 계약 내용 : 빚을 다 갚지 못할 시, 성 노예로 판매. ] “물론 1000골드 이하의 금액도 가능해. 관심 있어?” 금액이 높아질 수록 페널티 역시 점점 커졌다. 처음 쓰인 1000골드 짜리의 계약도 말이 부탁이지 성희롱에 가까운 일이 분명할 테고. 3000골드에 쓰인 주점이란 곳은 말이 주점이지 성매매업소일 것이 분명했다. 성 노예는 뭐 말할 필요도 없지. 결국은 이런 것이었다. 남자에게 돈을 만들어내고 뜯어낼 방법은 성적인 행위 뿐. 남자가 무슨 힘이 있다고 돈을 벌어오겠는가. 3000골드, 까딱 잘못하면 사창가에 팔려 나간다. 여기서 상남자다 뭐다 밀고 붙이는 것은 상남자도 아니고 자신감도 아니었다. 오만함이고 멍청한 짓. 사업의 규모를 줄여야 하나. 어차피 온천 말고도 생각해 둔 것이 하나 더 있지 않았던가. 공중목욕탕. 이거라면 훨씬 더 저렴한 가격으로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처음 생각했던 온천보다 저렴해진 만큼 조금 저렴한 구조겠지만 오히려 평민들, 그리고 서민들에게 어필할 점은 분명히 있었다. 저렴하게 따뜻한 물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뜨끈한 물에 몸을 지지는 사치 행위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과 같이 탕에 들어간다는 점을 이 세계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1000골드. 저걸로 계약할게요.” “확실해? 확실하게 결정지으면 말해. 계약서를 적으려면 계약비용 1골드가 들어가니까. 물론 계약금은 우리가 내주겠지만. 계약서를 만들기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어.” 본래 생각했던 온천과는 거리가 멀어졌지만 별수 없었다. 금액이 큰 만큼 리스크도 컸고. 이 사업이 얼마나 통할지도 아직 미지수였으니까. “네, 계약해주세요.” 그녀는 곧 새롭게 종이에 무언가를 적고선 밖에서 마법사가 들어온다. 종이에 적힌 내용은 간단했다. 메뉴판에 적혀 있는 그대로의 내용과 추가로 적힌 내용들이었다. [리비드는 1000골드를 대출받고 연이자20%를 낸다. 매년 이자를 변제하지 못하면 변제할 능력이 없다는 것으로 간주한다. 변제하지 못할 경우 자회사에서 일을 해 변제한다. 1년에 50골드로 간주한다.] 1년에 50골드면 굉장히 많이 쳐주는 금액이었지만 내가 하는 일을 생각하면 굉장히 후려치는 금액일 것이다. 계약서가 완성되고 마법사가 종이를 잡더니 뭔가 반짝 빛나고 계약서가 사라진다. “이게 끝인가요?” 뭔가 화려한 이팩트라도 있을 줄 알았더니 그저 잠깐 반짝이기만 할 뿐. 솔직히 조금 김 새네, 나는 나름 내 목숨을 걸었는데. “저렇게 보여도 계약은 확실히 되었어. 너는 모르겠지만 마법의 힘은 절대적이거든.” 흔히 남자가 뭘 알겠어. 같은 말을 뱉는 것이 조금 꼴받네. 하지만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됐다. 어차피 변제만 다 하면 안 볼 사이니까. 누군가 그랬던가. 계약서는 확실히, 꼼꼼하게 읽으라고. 아니, 누가 그러지 않았어도 응당 그랬어야 했다. 그저 게임 약관을 읽듯 대충 눈으로 훑어 넘긴 계약서. 미래의 나에게 제일 후회하는 일이 무엇인가요 라고 물었을 때.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계약서를 읽는 둥 마는 둥 훑어보는 나의 싸대기를 후려치고 목숨을 걸고 카트리나의 궁둥짝을 차버렸어야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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