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이건 동정인가 비동정인가.
뭔 여자 몸이 이렇게 무거워.
여자가 내 위에 올라탄 것은 처음이었다.
아주 어렸을 적 누나나 어머니가 끌어안았을 때도 항상 그녀들이 아래에 있었고 내 위에 올라탈만한 일도 없었을뿐더러 그녀들에게 힘을 쓰는 일도 없었다.
말이나 서적에서만 경험했던 말들. 선천적으로 연약한 남자와 선천적으로 강인한 여자. 그 차이가 실제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내 위에 기절하듯 쓰러진 그녀는 몸에 힘을 쭉 빼고 있었을 텐데도 나는 그녀를 밀어낼 수 없었다.
겉보기에 가슴에만 살이 쪘지 마른 몸매. 이렇게나 잘록한 허리 가진 그녀를 밀쳐 내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이었나.
손으로 꾹 밀어 내려 했지만 결국 살짝 뒤로 밀려났다가 손의 힘이 쭉 풀려 내 몸으로 푹 쓰러진다.
그저 기절한 그녀를 흔드는 꼴 밖에 안 된 행동.
내 품 안으로 안기듯 쓰러진 그녀를 깨워야할까.
하지만 이건 역시.
“너무 아깝잖아. 첫 경험이 강간이라니.”
인생 40년의 동정을 떼는 게 강간에다가 그것도 친구의 엄마라니. 솔직히 이대로 당하기에는 억울했다.
올라탄 그녀를 꾸욱 강하게 밀어내자 천천히 그녀의 몸이 뒤로 쓰러져 반대쪽 욕조에 등을 기대어졌다.
강제로 끼워진 자지를 빼내는 것도 그녀를 밀어내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았다.
어찌나 꽉 조여물고 있는 것인지, 마치 처녀의 보지를 탐한 것같이 질육이 바짝 달라붙어 왔다.
솔직히 이대로 바로 허리를 흔들어대고 싶었지만 쓰러진 그녀를 보니 남자의 자존심, 그리고 억울함이 올라왔다.
적어도 첫 경험 만큼은 내가 주도하고 싶었다. 그게 욕심이라는 것은 알아도 이 정도 욕심은 부려도 괜찮지 않을까.
욕조에 버려진 그녀를 뒤로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이건 아니야.”
순간의 성욕에 져 버린 내가 후회스러웠다.
어차피 거절한다 하더라도 이미 그녀에게 덮쳐졌겠지만.
옷 바구니에 고이 벗어둔 옷을 챙겨입고 욕실에서 도망가듯 뛰쳐나왔다.
편히 지낼 수 있게 나에게 선뜻 내준 방까지 복도를 가로질러간다.
“목욕은 다 끝났어요?”
친절하게 묻는 메이드의 말에 고개만 살짝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매트리스 위에 누웠다.
욕조 안에 기절한 그녀를 두고 그냥 나온 것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설마 일어나서 방까지 쫓아오겠어.
만약 나였다면 기절했던 것이 쪽팔려서라도 찾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매트리스에 누워 눈을 감는다.
차라리 그딴 일보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훨씬 건설적일 테니까.
그래, 내가 생각해 두었던 사업의 일부터 말이다.
이전에는 모험심 가득했던 세실라가 강제로 이끌고 들어간 숲에서 발견한 작은 호수. 굉장히 맑고 커다란 호수 답게 그곳에서 물장난도 치고 수영도 하던 적 있었다.
최근에 들렀을 때에도 그곳의 물은 굉장히 깨끗했다.
호수에서 놀다 지쳐 가장자리에 앉아서 쉬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그것이었다.
이 물이 뜨끈했다면 온천처럼 뻐근한 몸도 풀고 좋았을 텐데.
언제나 그 아쉬움이 항상 머릿속에 가득했다.
마법적 재능은 고사하고 마나자체가 없어 나 혼자서는 그런 미래조차 그리지 못했지만, 그녀는 아카데미에 들어갈 정도로 마법적 재능부터 뛰어나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녀에게 항상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다.
내 아이디어와 그녀의 마법적 재능만 있으면 떼돈을 버는 것은 쉬운 일이라고.
같은 평민이라 할지라도 돈 욕심이 없을 정도로 이미 잘 사는 그녀였지만 마음씨 착한 그녀는 내 말이라면 언제든지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혹시 오늘 말했던 약속이 혹시 그거였나?
하긴, 돈이란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 아니겠나.
내 온천 아이디어를 들은 그녀도 결국 그 아티팩트를 만들어 주지 않았던가.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이건 사업성이 괜찮다고 판단한 것이다.
끼익-
앞으로의 사업을 머릿속으로 구상하던 중 들려온 문소리에 흠칫 놀란다.
설마 그녀가 찾아온 걸까?
차마 실눈을 떠서 확인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만약 기절한 채로 버리고 온 것이 화가나 찾아온 것이라면 깨어 있는 것을 눈치채면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되려 무방비하게 잠든척을 해,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것이 훨씬 좋을 것이다.
속으로 숫자를 세어가며 규칙적으로 숨을 내쉰다.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보니 아마 내 매트리스 옆까지 찾아온 것 같았다.
혼신의 잠든척이 통한 걸까. 내 옆에서 한참을 멈춰 서있던 발걸음 소리는 다시 멀어진다.
조용하게 다시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에 안도해서 그런가. 긴장이 풀리며 자연스럽게 잠에 빠져들었다.
낯선 천장이다.
아무래도 나는... 아, 여긴 낯선 천장이 맞았구나.
눈을 떠 깨어나 보니 암흑의 공간. 이딴 것은 한 번으로 족했다.
낯선 천장이 오히려 안도감을 쥐여주었다.
느지막히 몸을 일으킨다.
낯선 환경인데도 잠은 참 잘 잤는지 몸은 개운했다.
“으으, 이 감촉 오랜만이네.”
제대로 된 푹신한 매트리스를 쓰는 건 대체 얼마만인가. 만족스러운 감촉에 크게 기지개를 핀다.
“잘 잤어?”
“어, 잘 잤어... 어?”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린다.
언제부터 나를 보고 있었던 걸까. 침대 옆에서 나를 바라보며 싱긋 미소 짓고 있는 세실라.
그녀와 알고 지낸지 10년쯤 되어서 나는 그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평소에 잘 미소 짓지 않는다. 분명 나를 만났을 때도 미소를 짓기는 했지.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환한 미소였지만 지금 짓는 미소는 분명 무언가 기분 나쁜 일이 있을 때 짓는 미소였다.
“잘 잤지. 슬슬 밥 먹을 시간이래서 깨우려고 왔어.”
시간이 그렇게 지났나? 푹신한 매트리스... 이거 위험하군.
잠깐, 밥 먹을 시간이라니 설마?
“혹시 어머니도 같이 먹어?”
“아.”
그녀의 입가에서 미소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보통 잡담하고 있으면 금방 풀리곤 했는데 무슨 일이지?
“같이 먹지 않을 거야. 먼저 먹고 나갔거든. 왜, 불편해?”
“아, 아니야 아니야. 불편하기는.”
내가 죽을까 봐 그러지.
싱긋 미소 지어주곤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고 보니 이 세계에서 잘사는 집은 뭘 먹고 지낼까.
이전의 삶도 그닥 잘 사는 편이 아니었기에 항상 부잣집에 대한 무언가 로망 같은 것이 있었다.
아침부터 온갖 맛있는 음식을 깔아 놓고 먹는 걸까.
쉐프가 만들어 준 음식을 먹는 건가.
그렇게 기대를 하고 그녀를 따라간 식탁은 생각보다 평범해서 아쉬웠다.
빵과 스프, 스테이크와 샐러드.
식사하는 내내 시종인이 식탁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정리하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불편하긴 했지만 맛 자체는 맛있었다.
기대가 커서 만족감이 낮았던 건가. 그래도 매일 이렇게 먹는 것은 부러웠다.
“그런데 오늘은 뭐 할 거야?”
식사를 마치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 매트리스에 앉은 나를 따라 들어온 세실라가 물어왔다.
그러게, 사실 나도 갑작스레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었다.
남의 집에 얹혀살면서 아무것도 안 하고 뻔뻔하게 사는 것은 내 양심이 찔려서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그래, 차라리 이왕 하기로 한 거 일찍 움직이는 것이 좋겠지.
그녀도 부탁한 물건을 가져 왔다고 하니까.
“일단... 대출받아야지.”
그래, 빚밖에 없는 내가 돈을 만드는 방법은 빚을 지는 것뿐이었다.
오늘 할 일을 결정한 이상 바로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그녀는 따로 할 것이 있다며 방으로 돌아갔기에 도심으로 향하는 것은 나 혼자였다.
이 세상에 은행은 없다. 누가 누굴 믿고 자기 돈을 마음대로 맡기겠는가.
그럼 대출은 없냐면 그것은 또 아니었다.
돈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이상 돈장사하는 것은 이세계라고 다르지 않았다.
무엇을 믿고 돈을 빌려주냐는 것은 여긴 더 지독했다.
여차하면 뭐 장기를 판다? 고기잡이 배에 끌려간다?
이곳은 장기매매같은 것이 애초에 없었다.
고기잡이 배라면 오히려 다행이었다.
여자는 몸이 튼튼하니 그런 곳에 간다 하더라도 금방 벌고 나오겠지만 남자가 가진 것이 몸뿐이지 뭐가 있겠는가.
그래서 이 세계는 평민에게 대출을 해 줄 때에는 신용 대신 몸을 대가로 돈을 빌려 준다.
만약 갚지 못했을 경우에는 이 사람을 이용해서 얼마나 돈을 뽑아낼 수 있을까.
그것이 대출의 한도를 정해주었고 상환기간을 결정지었다.
나는 지금, 이 도시에서 가장 커다란 대부업 회사에 와 있었다.
건물은 무려 4층건물에, 하나의 상업길드 만한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세상에 얼마나 돈을 잘 벌면 이 도시에서 이만한 건물을 가지고 있을까.
대출 면담을 신청하려 카운터로 향하자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요상한 눈빛으로 나를 슬쩍 훑어본다.
“왜 왔어요?”
뭔가 퉁명스러운 말투. 뭐지? 내가 뭐 못올 곳이라도 왔다는 듯이 아니꼬운 말투에 인상을 찌푸렸다.
“대부업을 하는 곳에 대출을 받으러 왔지 왜 왔겠어요?”
당연히 좋은 말이 나올리가 없었다. 장사하는 처지에서 저렇게 퉁명스러운 말투라니. 장사의 기본이 안 되어 있구만.
“흥, 뭐 그래요. 이름이랑 나이. 그리고 얼마나 원하는지 말해 봐요.”
근데 이 새끼 날 언제 봤다고 이 지랄이지? 좀 아니꼬운데?
“근데 당신, 내가 누군지 알고 그런 말투를 쓰죠?”
난 옛날부터 당하면 그대로 갚아줘야 한다는 나만의 철칙이 있었다.
특히 이렇게 말로만 건방을 떠는 사람을 보면 심기가 뒤틀렸다. 쥐뿔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자기보다 낮을거로 생각되니 어떻게든 우위에 서보려는 건방진 놈.
이 세계에서 남자가 건방을 떨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우선 계급적으로, 귀족이라 한다면 물론 어느 정도의 건방은 가능했지만 보통은 남자가 가주인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귀족의 남편이거나, 돈이 많거나. 혹은 귀족의 심부름으로 왔거나.
그는 먼저 건방을 떨다가 내 당당한 자세에 흠칫 놀란다.
“아, 저, 그...”
“됐고, 당신 같은 사람이랑 이야기하기 싫으니까 윗사람이랑 면담하게 해 줘요.”
“죄, 죄송했습니다.”
당당한 남자의 모습. 내 모습에 지레 겁먹고 휙 들어간다.
난 이래서 이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조금만 화내도 겁먹어 버리는 남자라니.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했던 게 바로 10분 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