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토끼덫
[62. 토끼덫 ]
이른 아침, 맑고 투명한 햇살이 유리창 너머로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이오는 걸레를 들고 창문을 닦다가, 반쯤 비친 자신의 흐릿한 얼굴에 시선을 멈췄다. 저택에 들어온 지 벌써 한 달. 손에 익은 동작, 익숙해진 먼지 냄새, 반복되는 하루. 이젠 어느 정도 하녀의 일상이 몸에 밴 듯했다.
그러나 손이 멈춘 순간, 그녀의 눈길은 어느새 정원 잔디밭으로 향했다. 백작이 언젠가 언급했던 하얀 토끼. 단 한 번도 눈으로 확인한 적은 없는데도, 그녀는 매일 아침 같은 자리에 시선을 두곤 했다.
이오는 토끼를 보기 위해 잔디 위에 무릎을 꿇고 몸을 낮췄던 기억을 떠올렸다. 엉덩이를 들고 엎드린 그녀의 뒤로 느껴졌던, 남성의 단단하고 뜨거운 그것.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것이 현실로 내려앉는 순간이었다. 그것이 우연이었는지, 의도된 것이었는지 알 수 없기에, 오히려 더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이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애써 그 기억을 밀어내려 했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정원의 장미들이 한창 피어있었다. 만개한 붉은 장미꽃들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그 순간, 갑자기 뒤에서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토끼를 찾고 있나?"
이오는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로웬이 복도 끝에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일정하게 울리는 구두 소리가 그녀의 심장 박동과 겹쳐졌다. 다가오는 그의 모습은 단정했다. 새하얀 셔츠는 주름 하나 없이 정갈했고, 금빛 머리카락은 한 올 흐트러짐 없이 가지런했다. 그가 가까워지자, 길게 드리운 그림자가 이오의 발끝부터 어깨 위까지 차례로 덮쳤다. 그의 키에서 비롯된 그늘이 이오의 작은 몸을 천천히 삼켜 들어갔다.
"아... 아니에요. 그냥..."
이오는 무심결에 등을 곧게 세웠다. 옷깃 안쪽으로 스며든 긴장감이 뻣뻣한 숨결로 변해 목울대에 맺혔다.
"네가 정원을 자주 내려다보더구나."
로웬은 부드럽게 웃으며 이오의 등에 손을 올렸다. 손끝이 천천히 내려앉아, 어깨 너머로 등을 타고 미끄러졌다. 얇은 천 너머로 전해지는 그의 온기는 낯설 만큼 따뜻했다. 안정감과 동시에,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명치를 조여왔다.
"장미가... 예뻐서요."
"그래? 난 네가 아직도 토끼를 찾고 있는 줄 알았는데."
로웬의 목소리에는 장난스러운 웃음기가 섞여있었다. 로웬의 말에 이오의 얼굴이 붉어졌다. 잊으려 했던 기억이 뚜렷하게 되살아났다. 잔디 위에 엎드려 있던 그날, 허리를 감싸 안던 그의 손, 귓가에 흘러들던 숨결.
이오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나 등 뒤엔 창문이 있었고,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햇살이 창을 타고 그녀의 목덜미를 비췄다. 땀에 젖은 블라우스가 피부에 달라붙었고, 얇은 천 사이로 은근히 드러난 살결이 빛을 머금고 있었다. 로웬의 시선이 그곳에 머무르자, 이오는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열심히 일하는군. 하지만 너무 무리하면 안 되지."
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말끝이 귓가를 스치듯 감돌며, 마치 숨결처럼 그녀의 피부에 닿았다.
“잠시 쉬는 게 어떻겠어? 동물을 좋아하는 것 같던데, 마침 집무실에 새로운 앵무새를 데려왔거든. 구경 갈래?”
"앵무새요...?
그가 앵무새를 키웠던가? 본 적이 없었는데. 잠시 그런 의문이 스쳤지만, 이오는 자신도 모르게 그 목소리에 취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시절, 마을 장터에서 본 앵무새의 화려한 깃털이 떠올랐다. 그때의 설렘이 다시 가슴 속에서 피어올랐다.
'절대 로웬 백작님과 단둘이 있어서는 안돼.'
클라라의 말이 머릿속에 다시 스쳤지만, ‘앵무새’라는 단어는 그 경계를 너무 쉽게 허물어버렸다. 그리고, 지금 눈앞의 로웬은 무서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치게 다정하고, 신사다웠다.
"정말요?"
이오의 목소리에는 조심스러움과 순수한 기대가 뒤섞여 있었다. 로웬은 그런 이오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의 눈매에 스며들었다.
"그래. 아주 예쁜 앵무새란다."
그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손을 내밀었다. 미소는 여전히 부드러웠고,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오는 그 손끝을 바라보다가, 잠시 멈칫했다. 눈길이 자연스레 그의 손과 얼굴 사이를 오갔다.
'가도 괜찮을까...?'
로웬은 기다려주었다. 손끝이 조심스레 움츠러들었다. 마치 그 작은 움직임 하나로 지금 이 순간이 갈라질까 두려운 듯, 망설임이 조용히 손 안에 틀어박혔다.
잠시 머뭇이다가,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네... 좋아요."
로웬의 미소가 짙어지더니, 그의 손이 천천히 이오의 손을 감쌌다.
"그럼 가지."
그의 손아귀는 부드러웠지만, 빠져나올 틈 없이 단단하게 감겨 있었다.
복도를 걸으며 짙은 나무향이 코끝을 스쳤다. 벽에 걸린 초상화들이 그들의 발걸음을 지켜보는 것 같았다. 햇살은 점점 더 뜨거워졌고, 이오의 뺨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로웬의 걸음걸이는 여유로웠고, 그의 손길은 부드러웠다. 창밖으로 비치는 햇살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하지만 그 그림자는 어느 순간 하나로 포개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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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웬이 집무실 문을 열자, 높은 천장과 우아한 가구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마호가니 책상 위를 환히 비추고 있었지만, 앵무새는 보이지 않았다.
"앵무새는... 어디 있나요?"
이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로웬은 잠시 말없이 이오를 바라보다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문을 닫았다. 철컥, 문이 잠기는 소리가 울렸다.
"...아, 미안하구나. 오늘 아침에 정원으로 날아가 버렸어."
로웬은 여전히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에 이오는 문득 뒷목을 뻐근하게 타고 올라오는 불안감을 느꼈다. 언니의 경고가 다시금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볼게요."
이오가 문 쪽으로 몸을 돌렸지만, 로웬은 자연스럽게 그 앞에 섰다. 그의 키 큰 체구가 문을 가로막으며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왜 그렇게 급하게? 이제 막 왔잖아."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부드럽지만, 그 속에 담긴 의도가 분명히 느껴지는 손길이었다. 이오는 심장이 어지러울 만큼 크게 뛰는 것을 느꼈다.
"저... 제가 할 일이..."
“네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잘 보았단다. 마거릿에게는 내가 잘 말해두마.”
로웬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를 훑었다. 마치 어떤 장면을 되새기듯 오래 머물며 그녀를 관찰하는 눈빛이었다. 이오는 그 시선이 닿는 곳마다 어색함을 느끼며 몸을 움츠렸다.
"백작님... 저는 정말로 가봐야..."
이오의 떨리는 목소리가 방 안에 가라앉았다. 로웬은 그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꿰뚫어보는 듯한 그의 눈빛에, 이오는 입 안이 바짝 마르는 느낌을 받았다.
그를 올려다보는 올리브색 눈동자가 떨렸다. 그의 시선이 계속 그녀를 따라오자, 이오는 불편함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로웬은 가볍게 손끝으로 턱을 쓸며 고개를 기울였다.
"우리 이오가 놀랐구나. 나는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란다."
그가 다정한 아버지처럼 속삭였다. 그러나 이오는 그 다정함에서 어딘가 모를 기시감을 느꼈다. 이오는 여전히 그의 접근에 긴장을 풀지 못했고, 어떻게 이 상황을 받아들여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로웬의 행동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애매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겁내지 않아도 돼."
그의 손끝이 이오의 손등을 스쳤다. 그 작은 접촉에, 이오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로웬은 그녀의 반응을 바라보며, 느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손이 서서히 그녀의 뺨으로 향했다. 이오는 긴장된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 순간, 이오는 자신이 로웬의 분위기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묘하게 이어지던 긴장감과 뜨거운 감정이 서서히 뒤엉키며, 그녀의 몸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반응했다.
"이오."
로웬의 목소리가 다시 그녀를 부르자, 이오가 어깨를 움츠렸다. 그의 손이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올리며, 허리를 숙였다.
"저, 저 그게..."
이오의 말은 끝맺지 못했다. 로웬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게 끌어당기는 키스였다. 이오는 그의 손이 자신의 허리를 지그시 감싸는 걸 느꼈다. 그 접촉이 너무 가까워, 도망칠 수도 없었다.
"읍, 하음...!"
그의 혀가 그녀의 입술 사이로 파고들어 안쪽을 헤집었다. 뜨겁고 촉촉한 혀끝이 이오의 감각을 짓이기듯 휘저었다. 그녀는 움찔거리며 고개를 젖혔지만, 그럴수록 키스는 더욱 깊어졌다. 거친 그의 숨결이 입안까지 들어찼다. 이오는 저항할 새도 없이 허리를 감싼 팔에 이끌려, 그의 몸에 완전히 밀착되었다.
"으응...! 츕..."
두 사람 사이엔 더는 틈이 없었다. 이오의 가슴이 로웬의 단단한 가슴에 눌리고, 그 열기는 옷 너머로도 뚜렷하게 느껴졌다. 그의 손이 그녀의 목덜미를 감싸 쥐고는, 손가락으로 살짝 움켜쥐듯 누르며 그녀를 고정시켰다. 가느다란 신음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로웬의 혀는 더욱 대담하게 그녀의 혀를 감고 끌어당겼다.
"흐읍..."
이오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내려 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반대로, 그의 손길은 점차 익숙해지며 그녀의 몸을 더욱 깊게 감싸 안았다. 두려움과 함께, 알 수 없는 떨림이 그녀의 안쪽에서 피어올랐다.
그의 혀가, 그녀의 반응을 유도하듯 안쪽을 천천히, 그리고 끈질기게 훑었다. 젖은 입술이 부딪힐 때마다 작은 소리가 새어 나왔고, 그녀의 다리는 힘이 풀린 듯 흐느적거렸다.
"하아..."
로웬은 천천히 입술을 떼며 배부른 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의 입술 사이에 얇게 늘어진 침이 가늘게 끊겼다.
"지금도 무섭니? 난 널 잡아먹으려는 게 아니야."
그의 손길이 부드럽게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을 쓸어내리자, 이오는 다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가슴이 빠르게 오르내렸다.
"이, 이러시면 안돼요... 주인님..."
이오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렸지만, 단호한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의 올리브색 눈동자는 혼란스러움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로웬은 그 눈빛을 따라가며, 그녀의 허리를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그의 손끝은 여전히 부드러웠고, 이오는 그 점에 더 큰 혼란을 느꼈다.
"저를... 저를 사랑하시는 게 아니잖아요..."
로웬은 순진해 빠진 이오의 말에 잠시 동작을 멈췄다. 순수한 올리브색 눈동자가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 연약하면서도 순진한 모습에 그의 푸른 눈동자에 교활한 빛이 떠올랐다. 단순히 욕망을 채우는 것보다 더 즐거운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