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돌아온 소피아
저택의 정원에는 따사로운 여름의 기운이 서서히 스며들고 있었다. 꽃들이 풍성하게 피어나고, 그 사이로 살랑이는 바람이 부드러운 햇살을 데리고 다녔다.
클라라는 저택 안에서 정리해야 할 물건들을 점검하고 있었다.
클라라는 소피아에 대해 떠올렸다. 그리고 그녀에 대한 소문도. 클라라는 그 소문이 그저 누군가 만들어낸 이야기이기를 바랐다.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때, 멀리서 마차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클라라는 저도 모르게 몸을 돌렸다. 저택의 정문 너머로 한 대의 마차가 들어서고 있었다.
곧 마차에서 소피아가 내렸다. 창백한 안색, 조용히 들려 있는 작은 가방.
클라라는 숨을 멈췄다. 소피아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더 이상 그 어리숙했던 소녀의 미소는 없었다. 대신 차갑고 단단한 무언가가 그녀의 눈동자에 깊이 박혀 있었다.
[61. 돌아온 소피아]
신록이 우거진 따스한 바람이 장미꽃을 살랑이며 흔들었다. 소피아는 저택의 정문 앞에 멈춰 섰다. 3개월 전, 이곳을 떠날 때와는 전혀 다른 마음이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저택은 기울어진 오후의 햇살을 받아 묘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때는 익숙했던 곳이었지만, 이제는 낯설고도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하녀복을 입은 몇몇 하녀들이 정원을 지나다가 소피아를 발견했다. 그녀들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하녀들은 서둘러 시선을 피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소문은 이미 저택 안에 퍼져 있을 터였다.
소피아는 창백한 얼굴로 저택의 대문을 향해 걸었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가방 하나가 들려 있었다. 매일 아침 찾아오는 구토와 어지러움을 애써 감추며 그녀는 곧은 자세를 유지했다. 대문 앞을 지키던 수문장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마거릿 여사님을 뵙고 싶습니다."
소피아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예전처럼 수줍은 망설임도, 해맑게 웃건 기색도 없었다. 저택 앞을 지키던 수문장은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기다리게."
그가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곧이어 마거릿이 그녀를 들였다. 저택 안으로 발을 들이자 익숙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왁스로 광을 낸 나무 바닥, 새로 세탁한 커튼의 향... 모든 것이 3개월 전과 똑같았지만, 소피아에게는 그저 낯설고 차갑게만 느껴졌다.
마거릿의 하녀장실 앞에 도착하자 클라라는 조용히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소피아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걸어야 했다. 그녀의 손이 살짝 떨렸지만, 눈빛만큼은 단단했다. 로웬 백작은 그녀와 뱃속의 아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했다.
닫혀있던 문이 열리고, 소피아가 들어서자 마거릿은 서류를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러나 소피아는 그 담담함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의도적인 절제임을 알았다.
"돌아왔구나."
마거릿의 낮은 목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오랜 세월의 무게가 서려 있어다. 소피아는 고개를 들어, 마거릿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백작님께 전할 말이 있습니다."
"...이미 그만 둔 마당에 갑자기 무슨 할 말이 있단 거냐? 백작님은 바쁜 분이시다."
마거릿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눈에는 깊은 피로감이 서려있었다.
"제가...제가 임신했습니다."
소피아의 말에 마거릿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백작님의 성벽이 결국 일을 내는구나. 그녀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이건 백작님의 아이입니다."
소피아의 손이 살짝 떨리고, 이를 감추려는 듯 손끝을 움켜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어린 것, 어리석은 것. 마거릿은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이게 이 아이에게 기회가 될 것인가, 아니면 더 깊은 진흙탕에 빠지게 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내일 다시 오거라, 오늘은..."
마거릿은 잠시 고민하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고요하게 말을 이었다. 깊어지는 눈가의 주름이 그녀의 생각을 말해주는 듯했다.
"따라오렴. 하지만... 백작님이 널 만나주실지는 모르겠구나."
마거릿이 방을 나서며 소피아에게 눈짓했다. 낮고 단단한 굽소리가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소피아는 그녀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복도를 지나며 창밖으로 보이는 정원의 풍경이 흐릿하게 스쳐 지나갔다. 저택 안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백작의 집무실 앞에서 마거릿이 먼저 문을 두드렸다. 소피아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안에서 들려오는 낮고 깊은 목소리가 그녀를 더욱 긴장하게 했다.
"들어오시오."
소피아가 함께 들어가려 하자 마거릿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멈춰."
짧고 단호한 말이었다. 마거릿은 혼자 집무실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 다시 나왔다.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읽을 수 없었다.
"여기서 기다리거라. 백작님이 부르시기 전엔 절대 들어가지 마."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복도를 지나가는 하녀들이 소피아를 힐끗거리며 수군거렸다. 그들의 속삭임이 바람 같이 흘러갔다.
"저 애가 소피아 맞지?"
"설마 정말로..."
소피아는 그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꿋꿋이 서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점점 더 흐려져갔다. 초여름인데도, 어쩐지 복도의 공기가 차갑게 느껴졌다. 구토감이 다시 치밀었지만,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은 짙어졌다. 저택의 시계가 울리는 소리가 심장 박동처럼 들렸다. 하녀들의 수군거림은 점점 또렷해졌고, 시선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로웬 백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차가운 시선이 소피아의 얼굴을 스친 뒤, 그녀의 배로 향했다. 복도의 공기가 얼어붙는 듯했다.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서서 소피아를 바라보던 로웬은, 마치 그녀의 존재 자체를 평가하듯 눈을 떼지 않았다.
"임신이라고...증명할 수 있나?"
로웬의 눈빛이 소피아를 탐색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그녀는 조금 더 마른 듯 보였다.
"백작님...저는, 처녀였습니다. 그 누구도 만난 적 없었고 이 곳을 나가서도...그러니까..."
소피아의 목소리는 떨렸다. 처음에는 간신히 말을 이어가던 그녀가 점점 더 힘을 잃었다. 그의 시선이 자신을 향할 때마다 목에 무언가가 걸린 듯,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결백했다. 지금 자신의 몸 안에서 자라나고 있는 생명이 누구의 씨인지, 그녀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고 흐려지는 순간, 로웬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녀를 꿰뚫었다. 그의 눈빛은 차갑고 냉정했다.
"그래서, 뭘 원하고 온 거지? 돈을 원하나?"
로웬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의 질문에 소피아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를 더듬어 무언가를 꺼내려 했지만, 손끝이 얼어붙은 듯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몇 번이고 헛손질을 하던 끝에, 마침내 그녀는 반짝이는 금화 하나를 꺼냈다. 그녀가 떠나는 날 로웬이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던 금화였다. 금화는 그때와 다름없게 흠 없이 빛나고 있었다.
"이거... 백작님께서 주신 금화입니다. 한번도, 한번도 쓰지 않았어요."
사실, 금화를 쓰지 않았다기보다는, 사용하지 못한 것이 더 정확했다. 그녀가 태어난 시골 마을에서는 이런 고가의 금화를 쓸 일이 없었다. 마을의 작은 가게들은 보통 동전이나 물물교환으로 거래가 이루어졌다.
아무 소식 없이 백작가의 하녀 일을 그만두고 돌아온 소피아를 본 마을 사람들은 그녀의 귀환 이유를 멋대로 추측했다. 그런 상황에서 금화를 쓰는 것은 더 큰 의심을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시골 하녀가 어떻게 금화를 가지고 있느냐는 질문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돈을 쓰는 것은, 마치 자신의 몸을 팔아 얻은 대가를 인정하는 것 같았다. 소피아가 로웬에게 금화를 돌려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떨리는 손끝에 금화가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그럼 뭘 원하지? 만약 너의 말이 거짓이라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로웬의 말에도 소피아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안에는 단단한 결의가 서려있었다. 그녀에게는 이제 돌아갈 곳도, 의지할 곳도 없었다.
시골 마을에서의 생활은 그녀에게 긴 고문과도 같았다. 돌아온 그녀를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했고, 시간이 갈수록 그들은 그녀의 괴로움을 유희로 삼는 냉혹한 인간의 본성을 드러냈다.
그녀의 볼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손등으로 급하게 닦아내려 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책임을...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백작님이, 백작님이 책임을 지셔야 해요."
그녀는 로웬에게 제발 자신을 숨겨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로웬에게 그렇게 애원하지 않은 것은 이 모든 것의 원인이 로웬에게 있다는 뼈아픈 현실에서 오는 원망과 자존심 때문이었다.
한참의 대치 후, 로웬은 소피아를 내려다보던 시선을 거두고 문 밖을 향해 외쳤다.
"제인"
곧 문이 열리며 제인이 들어왔다.
"소피아를 2층 동쪽 끝 방으로 안내하게. 당분간 그곳에서 지내도록 하지. ...가보게."
제인은 소피아를 힐끔 쳐다보고는 고개를 숙여 방을 나섰다. 제인을 뒤따라가며, 소피아의 눈에는 미약한 안도와 불안이 스쳤다. 그녀는 눈을 꾹 감으며 그 감정을 애써 억누르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