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사회생활
월요일 아침, 사무실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정근도 오전 내내 한 마디 하지 않고 일에만 몰두 했다. 이나의 몸에 빙의한 민선 역시 묵묵히 컴퓨터 모니터만 바라봤다.
조용한 건 김 대리도 마찬가지였다. 한창 수다를 떨어도 모자를 시간이지만 오늘은 어쩐 일인지 막내사원에게도 치근덕대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일에만 집중했다.
“김 대리님, 대리님...!”
사무실 정적을 깬 것은 막내사원의 소근거리는 목소리였다.
“어? 어. 왜. 무슨 일이야?”
“오늘 무슨 일 있어요? 분위기가 왜 이래요. 그리고 왜 저보고 자기라고 안 부르세요?”
막내사원은 이 분위기가 도통 적응이 되지 않았다. 여지껏 이런 분위기가 감돈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쉿! 조용히 해, 자기야. 자기는 참 평소엔 말도 없더니 오늘따라 눈치도 없지. 본부장님 개빡치셔서 지금 살얼음판이야. 자기도 조심해.”
사무실에 적막이 흐르는 이유는 바로 김영만 본부장 때문이었다. 출장 후 오랜만에 복귀한 그는 이사에게 한 소리를 들었는지 오전 내내 입술이 대빨 나와있었다.
“아, 네. 근데 이사님한테 한 소리 들을 만 하지 않아요? 이번 출장도 사실 직접 안 가도 되는..!읍!”
막내사원의 고나리질에 소현은 다급하게 입을 틀어 막았다.
“자기야, 나 마통 뚫은거 메꾸려면 여기 3년은 더 다녀야 돼. 조심 좀 하자. 응? 이따 점심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그리고 잠시 후, 본부장실에서 직원을 호출했다.
[김 대리! 들어와봐!]
본부장이 소현을 부른 것이다. 사무실은 한 번더 싸늘해졌다.
잠시 후 본부장실에서 나온 소현은 이나를 탕비실로 불렀다.
“왜요?”
“왜에요오? 자기야, 지금 왜요란 말이 자기 입에서 어떻게 나와.”
“요점만 간단히 말씀하세요.”
“하, 자기는 진짜 재택근무하더니 집에다 간을 두고 나왔니? 본부장님이랑 무슨 일 있었어? 남 과장님 이번에 승진 짤리게 생겼던데. 그리고 자기도.”
김 대리의 진지한 반응에 민선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남 서바...아, 아니 남 과장님이 왜요? 저 아무 일도 없었는데.”
워크숍때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눴던 새벽, 본부장의 은밀한 제안에 뜨뜨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 순간 떠올랐다. 그 이후 본부장이 출장을 갔던 터라 잠깐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근데 노발대발하시던데. 부하직원 관리 어떻게 하냐면서. 자기 외근 나가서도 실수 한 거 없지?”
“아...그, 거래처 분들이랑 술을 좀 많이 마시긴 했어요. 그날...금요일에...”
이나가 금요일 회식 얘기를 꺼내자 소현도 순간 남 과장과 관계를 가졌던 그 날밤을 떠올렸다. 그 후로 정근과는 아무런 연락도 주고받지 않고 오늘이 되어 처음 본 것이기에 사실 정근과도 데면데면하여 말을 더 꺼내지 못했던 것이다.
“흐흠.. 그래? 그래서 그러시는 건가. 암튼 뭐 그 전에 잔 실수 몇 번 했던 거 시시콜콜한 거 두 어개 말씀하시면서 이런 식으로 일할 거면 부부 둘 중 하나는 나가야하는 거 아니냐고 까지 말씀하셨어. 물론 인사결정이 그렇게 쉽게 주먹구구식으로 되는 게 아니니까 짤릴 걱정은 없겠지만 암튼 신경 써. 자기야. 내조 해야지.”
할말은 마친 소현은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민선은 홀로 탕비실에 남아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본격적으로 본부장이 자신을 압박해오는 것을 체감하게 된 것이다.
‘개자식. 감히 내 딸 이나를 넘보고, 내 사위를 협박해? 하... 어떻게 조지지?’
민선은 침착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본부장을 처단할 방법을 찾아내야만 한다.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마음을 비우고 차분하게 생각에 잠겼다.
“김 대리 무슨 일이야?”
이나를 데리고 자리를 비운 소현이 혼자만 돌아오자 정근은 이나가 걱정되어 소현을 불러세웠다. 그날이후 처음 대화를 하게 된 것이다.
“아, 뭐. 주 주임이 예전에 실수하고 그런 게 본부장님 화풀이 대상이 된 것 같아요. 큰 일은 아니고요. 그나저나...주말엔 잘 쉬셨어요?”
역시 소현은 과감했다. 정근이 대화의 물꼬를 트자마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둘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툭 던졌다.
“어, 어... 김 대리도 잘 쉬었지? 흠흠. 나중에 얘기하자고.”
정근은 민망했다. 여전히 소현의 처녀를 뚫고 피를 맛본 것에 대한 흥분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지만 유부남의 신분으로 그것도 와이프의 상사, 자신의 후배와 떡을 쳤다는 것이 껄끄럽고 민망했다.
“그래요, 그럼.”
소현은 새침한 표정으로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민선도 마음을 가다듬고 사무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아 다시 모니터를 응시했다.
[이나야, 괜찮아? 김 대리가 별 말 안했고?]
정근이 사내메신저로 이나의 기분을 살폈다. 민선은 사위의 걱정에 피식 한 번 웃고는 긍정의 답변을 했다.
[괜찮아요. 그냥 제가 예전에 실수한 게 핑계거리가 된 거 같아요. 걱정 말아요. 잘 넘어갈 테니까.]
그렇게 평온한 분위기도 잠시, 본부장이 드디어 이나를 호출했다.
[주이나 주임! 내 방으로 들어오세요!]
본부장실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모든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나에게 쏠렸다. 정근은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이나를 바라봤다.
민선은 걸음도 당당하게 본부장실로 향했다. 김영만 본부장은 원피스 입은 이나의 자태를 보자마자 좀전 짜증스러운 목소리와는 달리 표정이 온화하게 바뀌었다.
“어, 주 주임. 외근하느라 고생많았지?”
“아니에요. 본부장님이 신경 써서 친히 내보내주셔서 사무실에서 갑갑하게 갇혀있지 않아도 돼서 좋았는걸요. 고맙습니다. 호호홍~~”
민선은 비꼬아 말했지만 이나의 몸매에 정신줄을 놓은 본부장의 귀엔 그것마저 칭찬으로 들렸나보다.
“허허허! 내가 이래서 주 주임을 좋아한다니까. 재택근무하더니 사람이 아주 많이 변했어. 아주 넉살도 좋아지고 말이야. 친근하게 표현하자면 아줌마 같은 구석이 좀 생겼다고 해야 하나. 근데 또 몸매는 크..처녀들 뺨치고..햐~”
민선은 본부장의 말에 살짝 뜨끔했다. 이나의 말투가 아닌 자신의 말투로 말했기에 아줌마같이 느껴지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민선은 본부장을 빠른 시간 안에 간파했다.
‘이 새끼는 병신이다...아주 멍청한 변태새끼...잘만 구슬리면 오히려 쉬울지도 몰라.’
속으로는 본부장을 비웃으면서 애써 웃으며 본부장의 비위를 맞추기 시작했다.
“어머~ 그래요? 본부장님이 참 눈이 높으셔요. 사모님도 엄청 미인이시죠? 사모님은 참 운도 좋으셔. 이렇게 능력자 눈에 띄어서 아주 잘~~ 잘고 계시잖아요.”
“허허~ 우리 둘 사이에 왜 우리 와이프 얘기는 하고 그래. 재수 없게. 하하하하!”
본부장은 확실히 병신이 분명했다. 비꼬는 말은 이해 못하고 요염한 눈빛에 취해 좋다고 히죽히죽 웃어대는 꼴이라니.
“그나저나. 내가 그때 말한 거 좀 생각해 봤어? 우리 주 주임?”
본부장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자신의 책상 앞에 서있는 이나 곁으로 향했다.
“아, 그때 그 제안이요?”
민선은 침착하게 대답하며 시간을 끌었다.
“응. 그래. 그때 우리 단 둘이 있을 때 내가 말했던 거...응?”
본부장은 어느새 이나의 옆에 바짝 다가와 어깨에 살포시 손을 올렸다. 그리고 어깨를 느끼하게 주물주물 만지며 이나를 그윽하게 바라봤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본부장님.”
“아직도? 이렇게 시간을 많이 줬는데? 우리 주 주임이 신중한 스타일이네. 허허...이리와봐. 어깨가 많이 뭉쳤어.”
본부장은 노골적으로 이나의 어깨를 두 손으로 주무르며 쇄골뼈를 만지작거렸다. 민선은 당장이라도 불알을 걷어차고 싶었지만 그럼 일을 망칠 뿐이다. 병신 같은 본부장을 살살 구슬려서 원하는 걸 얻어낼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어느 정도의 스킨십은 허용해주면 희망고문을 해야 했으므로 이를 악물로 참아냈다.
“본부장님, 사모님이랑 연애할 때 먼저 고백하셨어요?”
민선은 여우처럼 말을 돌렸다.
“응? 갑자기? 아니, 남자가 무슨 먼저 고백을 해! 와이프가 먼저 졸졸 쫓아다녀서 겨우 만나준거지. 하하하하!”
본부장은 이나의 관심이 싫지 않았는지 유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여전히 어깨를 주물럭거리며.
“얼마나 쫓아다니셨는데요? 그것보다 자리에 앉아서 말씀 나누면 안 될까요?”
민선은 자연스레 본부장을 원탁 회의테이블이 있는 소파로 끌고 갔다. 그리고 2인용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이것 또한 민선의 전략이었다. 줄듯말 듯 여지를 주는 전략에 본부장의 입은 귀게 걸려있었다. 제대로 먹혀든 셈이다.
“아휴 말도 마. 어찌나 쫓아다니는지. 한 1년은 걸렸나봐. 하하하하하!”
민선은 그 대답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본부장에게 다시 어깨를 내맡겼다. 본부장은 좋아라 쾌재를 부르며 이나의 어깨를 마음껏 주물러댔다. 쇄골뼈를 지나 가슴 언저리까지 손이 내려오자 민선이 말을 이어갔다.
“거 봐요. 본부장님도 사모님이랑 연애시작하는데 1년이나 걸렸잖아요. 근데 어떻게 저한텐 일주일밖에 시간을 안주세요. 저랑도 연애할거 아니에요?”
확실히 아줌마의 능글맞음과 연륜이 묻어나는 민선이었다. 그말에 본부장은 주무르던 손을 멈칫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으하하하!! 이야. 우리 주 주임은 역시 똑똑해. 이렇게 날 살살 녹이네. 그럼, 연애해야지. 하고 말고. 알겠어, 우리 주 주임. 생각할 시간 얼마든지 줄게. 그나저나 어깨는 좀 시원해졌어? 어디 또 주물러줄데 있어? 말만해. 내가 그냥 싹~~~ 풀어줄테니까. 흐흐흣..”
본부장은 느끼하게 웃으며 이나의 몸을 구석구석 훑어봤다.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무릎까지 내려오는 원피스 밑으로 드러난 매끈한 다리까지. 조금만 기다리면 자신의 것이 될 거라 생각하니 군침까지 돌았다.
“괜찮아요. 제가 주물러 드릴게요. 뒤돌아보세요. 어서요~”
민선은 차라리 자신이 주무르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변태새끼가 자신의 딸을 만지는 것이 영 불쾌했기 때문이다.
본부장은 이런 속사정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이나가 시키는대로 등을 돌렸다.
“어머, 우리 본부장님은 어깨가 태평양이시다. 멋있어요. 근데 어깨가 많이 뭉치셨네요. 많이 딱딱한데요.”
민선은 본부장의 어깨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앞으로도 이런 식의 스킨십을 이어가며 시간을 끌어야 했기에 본부장이 만족하게끔 이따금씩 얼굴 옆에서 입김을 불어넣기도 했다.
“아음...으음...하..좋네..으음..주물러주니까 너무 좋은데..아...흐...어깨 딱딱하지? 근데 거기가 더 딱딱해. 흐흐흐..나중에 맛보여줄게. 으음..아..좋다..”
본부장은 완전히 심취했다. 민선의 꼬드김에 넘어가버린 것이다. 민선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본부장님, 너무 오래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요. 나중에 연애할 때도 이런거 조심해야하는 거 아시죠? 저 그럼 오늘은 이만 나가볼게요.”
“어? 그치. 맞네. 우리 주 주임 말이 다 맞아. 하하하하. 사내연애 조심해야지. 하하하!! 알겠어. 얼른 나가봐. 참, 내 덕에 갑갑하지 않아서 좋았다고 그랬지? 오늘도 시원하게 외근 한 번 갔다와. 이제부터 외근은 다 우리 주 주임 보내주겠네. 하하하.”
이런 씨. 민선은 속으로 탄식했다. 본부장이 이렇게 멍청할 줄이야. 외근나가서 잘 알지도 못하는 업무 파악하면서 거래처사람들과 대화 나누느라 진땀을 뺐었는데. 차라리 외근은 싫다고 할 걸 그랬나. 아니다. 오히려 본부장과 떨어져 있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호호..네..고, 고맙습니다. 본부장님. 역시 센스쟁이시네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어어, 조심하고. 누가 괴롭히면 말하고. 내가 거래처에 전화해놓을게. 우리 주이나 주임 대접 좀 잘해주라고. 그리고 거기서 바로 퇴근해. 사무실 오지말고. 힘들잖아? 나야 뭐, 우리 주 주임 한 번 더 보면 좋긴한데. 어떡할래? 사무실 들어올래?”
본부장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이나를 바라봤다.
“아, 아니요. 저도 그러면 좋은데, 체력 아껴야죠. 그래야 내일 또 본부장님 어깨 주물러 드릴 수 있잖아요. 아쉽지만 바로 퇴근할게요.”
이번에도 이나의 대답이 흡족했는지 본부장은 또 병신처럼 껄껄거리며 웃었다.
“그래, 그래. 가봐. 어서. 법카로 커피도 한 잔 사마시고 그러면서 일하라고.”
민선은 본부장실 문을 닫고 나오면 눈을 질끈 감았다. 몸서리치게 싫은 사람이지만 한편으론 자신의 딸이 직접 겪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빨리 병신같은 본부장을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