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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복병등장


“어, 어... 이나야. 흠흠.” 정근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는 그 순간, 이나와 박 대리가 Bar 복도 끝 쪽에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에 정근이 화들짝 마주보고 서있던 소현을 밀치듯 강제로 앉혔다. 소현은 정근의 힘에 풀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무슨 상황인지 어리둥절하다 고개를 45도 틀어 정근의 눈동자가 향하는 곳을 보곤 이내 짧은 탄식을 내쉬며 테이블 위에 놓인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직도 여기 있었어요? 나도 바람 좀 쐬고 왔어요.” 정근은 이나의 다정한 목소리를 듣곤 제대로 풀어질 뻔했던 고삐를 단단히 붙들어 맸다. 처녀의 보지를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욕심에 이나의 존재를 잠시 지워 내다니. 정근은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심한 욕설을 날렸다. 이나를 뒤이어 따라 들어온 박 대리는 Bar 상황을 빠르게 살폈다. 소현과 정근의 옷매무새가 이전보다 조금 흐트러져 있긴 했으나, 소현의 표정이 좋지 못한 것으로 보아 상황에 진척이 없음을 눈치 챘다. 그리고 적막이 감도는 분위기를 깨고자 얼른 말을 이어나갔다. “어, 전무님 아직도 안 오셨나 봐요. 시간이 벌써 1시가 다됐는데.” “그러게. 오늘은 안 오시려나보군. 모두 이쯤에서 자리 정리하자고.” 정근의 한 마디로 모든 사태는 일단락됐다. 정근을 자빠트리고자 계획했던 소현의 계획이 무산된 것은 물론 이나를 한 번 따먹어보려던 박 대리의 기대까지 한순간 물거품으로 사라졌다. 정근 또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나에게도 미안했고, 소현과도 이상한 관계가 되어버려 찝찝했다. 게다가 이나와 함께 들어온 박 대리도 거슬렸다. 둘은 어디서 뭘 하다 지금 나타난 것일까. 자신도 소현과 부적절한 상황으로 발전할 뻔했는데, 혹시 이나도 그랬던 것은 아닐까. 박 대리의 마음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기에 더 심난하고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자신이 지은 죄가 있기에 이나에게 따져 물을 생각은 없었다. “괜찮아요? 김 대리님이랑 술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이나의 몸에 빙의한 민선은 방금 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육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매번 이나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사위의 눈빛이 흔들리는 게 느껴졌고, 당황하는 목소리까지 읽어냈기 때문이다. “아, 아니. 피곤해서 그런가봐. 이번 워크숍 때문에 준비할 것들이 워낙 많았거든. 이나도 피곤하겠다. 일단 방으로 돌아가서 쉬자. 1407호였나? 내가 데려다 줄게.” 워크숍 숙소는 조별로 나뉘어져 성별마다 묵는 층이 달랐다. 아무리 사내부부지만 공은 공, 사는 사이기에 이들도 회사 방침에 따라 숙소를 다르게 배정받게 된 것이다. “아니에요. 내가 데려다줄게요. 바로 밑에 층인데 뭐. 술 많이 마셨잖아요. 얼른 가요.” 민선은 정근이 방 안에 들어가는 것을 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어디선가 김 대리가 숨어 있다가 사위를 채갈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한사코 거절하는 정근을 어르고 달래어 기어코 정근이 머무는 방인 1522호 앞까지 함께했다. “들어가요. 오늘 고생 많았어요.” “이나도. 오늘 컨디션도 안 좋은 것 같은데, 괜히 늦게까지 술자리 남아있었네. 미안...” “뭐가 미안해요. 내가 그냥 남아 있던 건데.” 정근은 이나와 둘이 마주하자 좀 전의 자신의 실수가 더욱 사무치게 미안해졌다. 반짝이는 이나의 눈동자와 사랑스러운 실루엣, 착한 마음씨. 이를 두고 어찌 소현에게 군침을 흘렸을까. 괜히 울컥하는 마음에 정근은 이나를 냅다 끌어안았다. “또, 또. 왜 그래요. 놔요. 여기 다 회사사람들인데. 아이 정말!” 민선은 싫은 척 하면서도 정근의 가슴팍에 젖가슴을 부비며 숨결을 느꼈다. 정근은 이나의 사랑스러운 행동에 불끈 솟아올랐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녀를 탐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진심어린 마음을 담아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쪼옵..쪼옥..하..아.. 민선도 역시 달아오른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오늘은 여기까지라 판단했다. 오늘만 날이 아니기에. 둘은 그렇게 십 여분을 끈적하게 비비적대다 아쉽게 돌아섰다. 민선은 1522호의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한 뒤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한편 그 시각 박 대리와 소현은 여전히 빈 Bar에 남아 인상을 구기며 남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왜 이렇게 빨리 왔어? 시간 좀 더 끌지.” “나도 할 만큼 했어. 근데 이나는 나한테 전혀 관심이 없어, 글렀다고.” “하... 진짜 과장님 손에 넣더니 콧대가 하늘을 찌르네. 박 대리 정도면 훌륭한데. 망할 년. 튕기긴.” “나 훌륭해...? 그럼...” 소현의 입바른 추켜세움에 박 대리의 눈빛이 금세 반짝였다. 소현은 그런 박 대리의 눈빛을 보며 얼굴을 구긴 뒤 대꾸했다. “됐거든?!!! 아오. 열 받아. 됐어. 박 대리는 빠져.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럼 나는?” “각자도생이지.” 신경질적으로 대답하던 소현은 순간 다른 생각이 번뜩였는지 이내 말을 바꿨다. “흠흠. 아니. 나는 내가 알아서 할게. 과장님이 워낙 꼬장꼬장해야지. 박 대리는 내가 동기의 정으로 끝까지 도와줄 테니까 걱정 말고. 오늘은 이만 파하자고. 내일을 위해.” 소현의 말에 박 대리도 개운치 않은 하루였지만 이내 편안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리베이터에 탄 소현은 14층을, 박 대리는 15층을 눌렀다. 15층에서 기다리던 민선은 엘리베이터가 4층에서 멈칫하자 그냥 걸어 내려가려 발길을 돌렸다. 그 사이 4층에서 소현과 박 대리가 엘리베이터를 올라타고 닫힘 버튼을 누르자 이내 엘리베이터는 빠르게 상승했다. 이나의 몸에 빙의한 민선은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것도 모른 채 계단 쪽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계단 옆 1503호의 문이 덜컥 열리며 한껏 헝클어진 남자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바로 술에 취해 먼저 방으로 들어간 김영만 본부장이었다. “어머, 본부장님. 괜찮으세요? 주무시는 줄 알았는데.” 본부장을 알아본 민선은 반갑게 아는 체를 했다. 김영만 본부장은 이나를 발견하곤 손짓하며 말을 건넸다. “주이나 주임? 밖에서 좀 시끌시끌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 길래 나와 봤는데. 주 주임이었네. 어후 머리야.” 김영만 본부장이 이나와 정근의 끈적하게 스킨쉽하는 소리를 들은 것일까. 그렇다고 생각하기엔 숙취에 괴로워하는 모습이 더 커보였으므로 민선은 이내 안심하고 본부장에게 다가갔다. “많이 힘드세요?” “어후. 비싼 술도 나이가 드니까 소용없네. 내가 가방에 상비약을 잔뜩 가지고 다니는데 지금 글씨가 두 개로 보여서 어떤 게 숙취해소제인지 못 찾겠네. 와서 좀 찾아줄 수 있나.” 김영만 본부장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찡그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민선은 야심한 새벽, 남자 혼자 있는 방 안에 혼자 들어가는 것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본부장의 괴로워하는 표정을 보며 흔쾌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 “많이 힘드신가 보네요. 얼른 찾아드릴게요.” 띵- 달칵. 엘리베이터가 15층에서 멈춰서는 소리와 함께 1503호의 문이 닫혔다. 박 대리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서 어느 방안으로 여자의 실루엣이 들어가는 것을 어렴풋이 목격했다. 15층은 모두 남성 임직원만 머무는 곳인데, 잘못 본 것일까. 몇 호였더라. 고개를 갸웃하다 이내 피로를 못 이기곤 곧장 방으로 향했다. “어느 가방이에요, 본부장님?” 민선은 1503호에 들어와 얼른 약을 찾아주고 가기 위해 본부장의 가방부터 뒤적였다. 등 뒤로는 본부장의 시선이 꽂혀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주이나 주임.” 본부장은 언제 머리가 아팠냐는 듯 찡그린 표정을 거두며 민선이 빙의한 이나의 등 뒤에 서서 이나를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네?” 그제야 민선이 쪼그려 앉은 채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신혼이던데. 남 과장이랑.” “네? 그게 무슨.” 순간 민선은 상황을 눈치 챘다. 조금 전까지 복도에서 물고 빠는 소리를 들은 것이 분명했다. “아, 아무래도 아기도 아직 없고요...부끄럽네요. 앞으로 공적인 자리에서는 자중하겠습니다.” 그리곤 담백하게 상황을 인정하고 재빠르게 수습했다. “아니, 뭐. 뭐라하는 건 아니고. 젊음이 역시 좋긴 좋아. 그치? 나는 결혼한지가 20년이 넘어서 그런가 마누라랑 감흥도 없고.” “아, 하하...네... 그래도 사모님이랑 사이 좋으시다고, 남 과장님한테 들었는데. 본부장님 정말 애처가시라며 본받아야한다고 하던데요. 뭐.” 민선은 애써 웃으며 본부장의 푸념에 화답했다. 나이 들어 섹스리스로 사는 남자들의 푸념이니 측은하게 여기며 들어줄 수 있는 수준이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이나가 진짜 이나가 아닌 이나의 몸에 빙의한 민선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동년배의 고충과 고민을 이해할 수 있었으므로 불쾌한 기분대신 측은함마저 느껴졌다. “허허. 주 주임, 정말 달라진 거 알지? 재택으로 근무하면서 사무실 안 나오더니 뭔가 여유로워졌다고 해야 할까. 뭐, 그렇다고 그전에 까칠했단 말은 아니니 오해하지 말고.” 본부장은 이나와의 이야기가 재밌는지 너털웃음까지 웃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50살 넘은 나이든 상사와 단둘이 방안에서 얘기를 들어줄 20대 여직원이 있을 리 만무하기에 김영만 본부장은 지금 이 시간 자체가 즐거웠다. 물론 처음부터 흑심을 품고 이나를 불러들인 것이지만, 당장은 대화하는 것에 흥미를 느끼는 중이었다. “아, 네. 오해 안 해요. 본부장님 이제 괜찮으신 거죠? 그럼 저는 이만.” 민선은 얼른 자리를 떠야겠다고 생각했다. 푸념을 들어주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야심한 새벽이다. 게다가 이유가 어찌되었건 단 둘이 상사와 방안에 있는 건 말이 안되는 상황인데다 자신이 이나임을 잠시 잊은 탓에 괜한 오지랖을 부린 것 같아 마음이 초조해졌다. “벌써 가려고 그러나? 조금 더 얘기하면 좋을 텐데. 그럼 나 약만 찾아주고 가. 노안이라 글씨가 잘 안 보여서 말이야. 주 주임.” 본부장은 이나를 어떻게든 옆에 있게 하고 싶었다. 당장 섹스를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저 젊은 여자의 살 냄새를 맡으며 한 공간에 있는 자체가 기쁨이었다. “네? 네. 그럼 얼른 약 찾아드릴게요. 아프셔서 어째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본부장님.” 김영만 본부장이 갑자기 이나에게 흑심을 품은 데는 컨퍼런스 룸 앞에서 이나가 반갑게 인사한 탓이 컸다. 못 본 사이에 더 멋있어졌단 인사치레에 마음이 동했던 것이다. 그동안 형식적인 인사만 딱딱하게 했던 이나였기에 그 단 한마디만으로 늙은 상사의 마음을 흔들기 충분했던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별 다른 말을 섞은 적 없는 이나가 자신을 계속해서 걱정해주고 있지 않은가. 김영만 본부장은 가방을 뒤적이는 이나의 실루엣을 가만히 응시했다. 민선의 아줌마스러운 작은 오지랖이 몰고 온 파장치곤 상당히 거센 파도였다. “주이나 주임. 곧 인사고과가 있는 거 알고 있나?” 열심히 약을 찾고 있는 이나의 등 뒤로 의미심장한 말 한마디가 꽂혔다. “그게 무슨...” 민선은 동작을 멈추고 벙찐 표정으로 김영만 본부장을 쳐다봤다. 본부장은 그런 이나를 보며 씨익 웃으며 자세를 낮춰 눈높이를 맞춰 앉았다. “남 과장 말이야. 이번에 올라가야하지 않겠나?” 1503호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민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김영만 본부장의 눈만 끔뻑끔뻑 쳐다봤다. 본부장의 입가에는 야릇한 미소가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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